독일교회를 통해 배우는 한국교회의 통일노력(2)
크리스천투데이는 총신대학교 총장 정일웅 박사의 논문 ‘독일교회를 통해 배우는 한국교회의 통일노력’을 매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정 박사는 이 논문에서 독일교회가 독일의 통일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분석하며, 이것이 한국의 통일과 한국교회의 연합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 박사는 얼마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서로 연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때 독일교회가 독일의 통일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연구한 적이 있다. 결론은 당시 독일교회가 하나로 연대했었다는 것이다. 에카데(독일개신교협의회)라는 하나의 조직을 만들었다. 이것이 엄청난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 감리교단을 비롯한 한국교회는 어느 때보다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이번 연재가 한국교회 연합의 길을 모색하는 의미있는 장이 되길 바랍니다. -편집자 주
1. 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대한 성경적 교훈
성경에는 교회란 개념이 벌써 개인보다는 더 공동적이며, 연합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란 원래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백성들의 모임을 가리켜 ‘카할’이라 불렀고, 그 말이 70인경(Septuaginta)을 통해 신약에 와서 ‘에클레시아’로 번역된다. 그리고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거의 편지 수신자가 에클레시아로 칭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 한 사람을 칭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지역의 다수(공동체)를 통칭한 것으로 사용되었다(고전 1:1~2, 고후 1:1, 갈 1:2, 살전 1:1, 살후 1:1).
원래 희랍 말 에클레시아도 부름받은 자, 역시 부름받은 백성들의 모임을 모임을 뜻하며,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부름받은 백성들의 모임으로서 역시 교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기리키는 말로, 한편으로는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모이는 모임을 뜻하며 다른 한편,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전’ 등의 의미로 사용되어 교회의 공동체적인 의미를 표현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이다.
베드로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는 주님이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고백하는 신앙에 근거해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상에 세워진다(마 16:16~1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바탕이요, 근거요, 초석이며,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엡1:22). 그리고 성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로 표현되어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고전 11:27, 롬 12:5).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하나됨인 교회 공동체의 연합과 일치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갈 3:28).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도 안에서 하나됨과 연합을 어떻게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가? 그것은 교회를 통한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행하여지는 예배와 예전 가운데서다. 예배를 통해 성도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교제와 대화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서 하나됨을 경험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믿음을 회복하고 강화하며, 또한 예배자들의 주님을 향한 마음을 기도와 찬송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에서 말씀의 전파, 즉 가르침만이 전적으로 지배하게 될 때, 그곳에는 그리스도가 나누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게 된다(고전 1:13). 왜냐하면 설교자에게서 말씀의 표준이 사라지거나 주관적으로 해석된 지나친 가르침이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소개된 고린도교회는 그 대표적인 교회로 이해될 수 있다. 역시 현재 교회분열의 모범을 보이는 한국교회도 동일한 모습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할 것이다. 즉 가르침의 일방적인 지배로 인해 많은 교회와 교파들이 생겨나게 되는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연합과 통일성을 상징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연합을 경험하게 하는 실제적인 사건으로는 역시 성례(Sacrament)를 들 수 있다. 성례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나타내신 신비로운 일이다.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성례를 통해 그의 독생자를 통해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그리고 성례 가운데서도 성찬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연합과 일치를 느끼고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은혜의 수단이다. 구체적으로는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들음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라면, 성찬은 주님이 행하신 사랑의 행위를 가시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 동안 목회사역의 실제에서 성례(세례와 성찬)의 가치를 자주 활용하지 않음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과 연합과 일치의 은혜를 나누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교회의 통일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이뤄야 할 과제로 설명된다. 우리는 그 예들을 바울의 가르침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분리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편지의 서두에서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가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예수파로 나누어지는 문제의 원인을 지적하고, 그들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각각 부름 받은 사명을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며,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한다(고전 3:6).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하나님의 복음이 뿌려져 열매를 맺어야 할 밭이며, 하나님의 집이라는 공동적이며 연합적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되어야 할 하나님의 교회임을 또한 강조했다(고전 3:9).
교회를 하나되게 하려는 바울의 이러한 노력은 역시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구약의 유대종교 관습을 지키는 것과 관련, 베드로의 외식하는 태도를 책망한 일에서 더욱 드러난다(갈 2:11~14).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증거했으며, 동시에 그것으로 초대교회의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 사이를 연합하고 통일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이해된다. 바울의 이러한 노력은 후에 바울 자신이 활동했던 선교지역의 교회를 통해 헌금을 수집하게 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기근과 흉년을 극복하도록 도운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고후 8:1~9, 15).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사실을 강하게 증거하고, 그 하나됨을 힘써 지키도록 교훈한 가장 본보기적인 말씀을 에베소서 4장 1~6절에서 발견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니이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모두 자세히 번역되지 않았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본문의 마지막에 ‘모두’라는 말이 세 번 나온다. 그것은 우리가 그 하나의 진술로서 총체적인 교회와 관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을 지탱하도록 ‘너희가…힘써 지키라’는 요청은 ‘너희들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라는 교회연합에 대한 근본 통찰에 기인한 것이라 할 것이다. 또한 ‘평화의 띠’-우리말에는 ‘평화의 매는 줄’이라고 번역되었는데-는 먼저 억지로 엮거나 잡아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평화의 띠’는 벌써 그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실행되고 보호되어야만 한다(엡 2:14)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몸이 하나’란 말은 몸이 몸 되게 하는 것은 그 자체 안에 스스로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한 분 주인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교회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3절에서 고린도인들을 향해 약간은 비판적이며, 역설적으로 “도대체 그리스고 나뉘었느냐?”라고 반문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고린도교회가 아볼로, 바울, 게바, 그리스도 등의 그룹으로 나누어진 소식을 접하고 이러한 행동은 몸을 쪼개어 나누는 일과 같다는 것을 교훈한 말이다. 우리는 실제로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과 일치를 간절히 소원했던가를 그가 행한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문에서 발견한다(요 17).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1, 20~23, 26)
이 기도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역을 이루시고 아버지께 돌아가게 될 것을 전제하여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게 될 모든 자들이 하나될 것을 위해 기도했으며, 하나되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사랑하신 것처럼 저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대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이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통일에 대한 간청이 그리스도의 가장 근원적인 기도의 고유한 관심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위대한 기도자는 언제나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도록 힘쓰는 교회연합의 기도(21절)는 제자와 교회의 통일을 위해 예수님이 행하신 기도를 따라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시에 한국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기도를 실천해야 하며, 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바로 그리스도의 명령임을 깨닫고 한국교회가 하나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