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교회를 통해 배우는 한국교회의 통일노력(9)
Ⅱ. 독일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역사
1. 독일교회의 역사와 전통
독일 개신교의 역사는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에서 시작된다(1517년). 종교개혁의 무리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명명됐고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든 이래로 구라파의 전역에서 개혁의 추종자와 종교개혁을 주도한 여러 인물들이 나타나게 됐다. 이러한 추종자들에 의해 급진적으로 발전된 종교개혁은 로마카톨릭 교회와의 오랜 갈등을 거쳐 오늘의 독일 개신교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역사적 과정은 구라파와 독일사회를 이끌어 온 기존 정치적인 세력의 관계에서 형성된 것으로, 로마카톨릭 교회와 루터의 종교개혁의 무리를 지지하는 그 당시 지방 제후(군주)들의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통한 분쟁과 함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대한 지지 속에서 독일 개신교회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전통처럼 교회가 국가 위에 군림하는 형태도 아니며, 그렇다고 국가가 교회 위에 군림하는 형태도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고 이단적 가르침을 배척하며 진리의 보존을 위해 협력하는 관계였으며, 어디까지나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이 세우신 다스림의 기관으로서 서로 분립된 기구였다.
그리고 국가의 정치적 배려에 따라 루터파 교회가 독일 땅에서 처음으로 종교개혁의 교회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555년 맺어진 아욱스부르그(Augsburg) 평화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도 칼빈파 교회는 독일 땅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30년 종교전쟁(1618~1648)을 치른 후, 제후들 사이에서 베스트팔리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비로서 처음으로 독일 땅에 칼빈파 교회가 루터파 교회와 함께 인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실제로 독일 개신교회는 루터파 교회만이 아니라 칼빈파 교회, 그리고 이 양 교회를 연합한 연합파 교회의 역사로 전개된다. 연합파 교회는 역사적으로 1817년 프로이센에서 종교개혁 300주년 기념 행사를 기해 시작됐다. 즉 개인적으로 경건하고 교회연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파와 칼빈파 교회 사이에 서로 상이하게 이해된 성만찬을 통일시키기 위해 직접 교회의 예전서를 만들어 양 교회가 연합된 교회로서 이것을 사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일이 왕명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져 외형적으로는 교회가 연합된 것으로 보였으나 교회 내적으로는 여전히 연합되지 못한 상태로 남았다. 이에 대안으로 왕은 1834년에 ‘연방제 연합’의 형태로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이미 루터파 교회가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교회의 연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850년에는 베를린에서 연합된 독일교회의 행정당국이 설립되기도 했으나 끝내 연합은 무산됐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파의 전통에 따라 생겨난 것이 독일 개신교 내에 지금도 실재하는 연합파 교회(Unierte Kirche)다. 현재 독일의 개신교회는 이러한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칼빈파) 교회, 그리고 연합파 교회의 역사와 전통, 각 교파의 독립성을 전제로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오늘의 독일 개신교회(EKD)라는 커다란 협의기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독일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어떻게 독일교회가 하나의 통일체로 연합과 일치를 이룬 독일 개신교회로 발전하게 됐는지 그 형성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합을 추구하는 의도와 목표가 무엇인지를 밝히게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