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교회를 통해 배우는 한국교회의 통일노력(10)
1) 독일교회의 역사적 배경
종교개혁 이래로 독일의 개신교회는 지역과 신앙고백의 차이에 따라 수없는 교파의 분열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쟁과 분파는 1803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독일제국이 무너지고 제국의 대리통치체제가 결성되기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1815년 빈에서 개최됐던 회합의 결정에 따라 프로이센 제국은 크게 동서의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 또한 동서의 정치체제는 역시 지역의 독립성과 특성을 전제한 독일동맹체(Deutscher Bund)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인 결정들은 교회의 영역에도 완전히 새로운 조직의 집중화와 교회통치의 통일된 모습을 이루는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주(州)지역 교회들(Landeskirchen)의 형성이었다. 이전의 지역 성주들은 여전히 개인적인 신앙고백의 신분에 대한 관심 없이도 그 지역 개신교회의 최상위 감독의 역할을 유지했다. 그들은 교회의 지역을 나누는 일과 교회의 감독과 통치를 위한 규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1815년 이래로 독일에서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통일을 향한 전진으로 모든 지역동맹체(Bund des Landes)를 형성하고 있는 지방에서 각 지역의 주(州)로서 지역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교회는 외형적인 조직체로서의 독립적인 행정기구들이 생겨나게 된다. 지(支)교회들과 목사들에 대한 감독기관으로 교회의 지방감독(Superintendant oder Dekan)에 의해 교구들이 생겨났으며 교구에 대한 영적인 감독으로 지역 감독의 장을 세웠다. 그 감독의 장은 지역교회 최고의 영적 책임자였다. 그리고 교회행정은 종교국, 또는 장로회(Konsistorien)에 의해 이뤄졌다. 각 주 지방교회를 관리하는 중앙행정관청이 부분적으로 설립됐는데, 이것은 오늘까지도 상급종교국(Oberkonsistorium)으로 불려진다. 이러한 기관의 이름들이 뮌헨 지역에서는 1818년에, 베를린에서는 1850년에 개신교의 상급교회교직자회(Oberkircherat)로, 그리고 하노버에서는 주 지역종교국(Landeskonsistorium)으로 명명됐다. 후에는 총회의 조직까지 이뤄졌다. 그리고 그 조직과 교회의 지도부에는 평신도의 참여가 이뤄졌던 것이다.
이러한 주 지역교회로의 역사적 발전과 함께 독일교회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된(자유형) 형태도 아니며, 그렇다고 서로 결합된 형태도 아닌 새로운 형태를 이루게 된다. 흔히 독일 개신교회를 가리켜 국가교회(Staatskirche)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19세기 초 프로이센 제국에서 얼마 간 형성됐던 모습이었으며,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정경분리에 대한 강력한 요구에 의해 독일에서 국가교회의 형태는 점점 사라지게 된다. 그 대신 독일 개신교회는 각 주 정부와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지역교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지방분권의 정치적인 배경 속에서 독일 개신교 각 주의 지역교회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다양한 교회의 통일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은 두 가지 근본적인 구상에서 이뤄졌다. 첫째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실제 정치적으로 상호협력해야 하는 일들로 인한 것이며, 둘째는 총체적인 하나의 독일 민족적인 교회를 통해 교회의 분파주의를 극복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에 있어서 두 번째 것은 아직은 실제화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다만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전자의 것이 1846년에 베를린에서 개최된 교회의 연합적인 모임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 때 독일 개신교회의 새로운 총체적인 조직을 위한 기초를 만들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렇다할 발전을 보이지 못하다가 1850년 슈투트가르트 교회의 날 행사에 즈음하여 몇 지역의 교회 대표자들이 새로운 접촉을 가졌고 1852년 6월 3일에 아이제나하에서 독일 개신교회의 콘퍼런스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 회합을 통해 각 지역교회들이 하나의 교회동맹체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부가 교회의 일반적인 문제에 관해 대화하는 하나의 작은 모임에 대표자들을 보내도록 결정했던 것이다. 아이제나하에서 개최된 교회 콘퍼런스는 이러한 형태로 1922년까지 지속됐다. 이러한 서로의 만남을 통해 각 교회는 신뢰를 쌓아갔으며 개신교회의 통일의식을 성장시켰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1915년에 이르러 342곡이 수록된 독일 개신교회의 통일찬송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1861년에 벌써 1545년 루터의 성경을 그 당시의 현대어로 수정하도록 결정했고 1892년에 그 수정본이 제작되기에 이른다. 또한 1912년 독일 개신교교회위원회가 결성됐을 때 그 위원회를 통해 승인을 받게 하였고, 개교회 전체가 사용하는 통일성경을 탄생시켰다.
1903년 6월 13일에 아이제나하의 콘퍼런스는 독일교회의 업무를 책임적으로 관장하는 조직체로서 독일 개신교 교회위원회를 만들어 낸다. 의장의 임기는 5년이었으면 총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아이제나하의 교회회합과 독일 개신교 교회위원회의 기구는 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독일교회의 연합운동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2년에 독일개신교 동맹체(DEK)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먼저 각 지역의 교회들은 1919년에서 1922년 사이에 각 교회의 새로운 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교회의 날 행사가 매년 개최됐다. 이 모임에서 교회 사이에 긴밀한 대화가 오고갔고 독일교회의 연합를 위한 동맹체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교회 동맹체의 과제와 기구는 독일 개신교의 연합을 이끌며 특별히 외국에 흩어져 있는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돌보는 일을 수행했다. 남미(브라질)와 남아프리카 지역의 독일교회와 여러 독일 식민지 국가에 있는 독일인 교회들을 하나로 통일하는 과제를 수행했다. 1933년에는 독일교회의 한 기구로서 선교업무와 외국에 있는 독일인 교회의 지원업무를 관장하는 외무 부서를 두게됐다. 그리고 독일 개신교 동맹체는 벌써 세계교회연합운동(WCC)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1933년 독일교회는 새로운 발전과 함께 하나의 새로운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국가사회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나치당을 주도한 히틀러의 통치는 교회의 통일을 요구했고 국가 이데올리기에 종속된 교회를 원했다. ‘하나의 지도자, 하나의 백성, 한 분 하나님, 하나의 교회’라는 국가와 종교의 통일사상을 교회 내에 퍼뜨린 무리들이 바로 ‘독일 그리스도인’이란 국가사회주의 정당에 종속된 단체였다. 이들에 의해 독일 개신교 동맹체는 해체되고 마침내 ‘독일 개신교회’(DEK)라는 교회의 연합기구가 탄생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