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화형 사건
똘레랑스, 그 바른 역사 위에만 세워지는 행동
잠시 다시 짚어 보건대, 당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대립에서는 자주, 전쟁 프로페셔널 무인(武人)들과 선비 학자들의 싸움이라 해야 할 희극적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읽기 나름으로는 이런 말이 좀 이상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겠지만, 역사적 사실의 근저에 흐르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을 균형있게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이런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물리력의 측면만을 본다면 한 쪽은 전쟁하고 싸우고 쳐 죽이는 일을 전문하는 무리들 같고, 다른 한 쪽은 아예 도무지 상대조차 될 수 없는, 상대가 되기를 처음부터 포기한 책상물림들 정도로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단 이 16세기 초 중반의 맹렬한 역사를 끌어가는, 이 상황이 전개되어 나가는 양상이 완전히 그러하다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인문주의적 아카데미시즘으로 풍부한 지성과 밝은 판단력을 갖게 된 개혁 그룹에 대하여, 도무지 충돌의 유래나 본질에 대한 이해, 또 복잡 다난한 현상을 설명할 어떤 능력도 갖지 못한 수구 가톨릭 세력이, 그저 주체하지 못하는 힘만을 가지고 폭력과 파괴로써 상대를 우격다짐하려는……, 참 답답 난감한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프랑스 버전(version)?
중세 가톨릭은 서기 405년경에 완성된 제롬(Jérôme 347– 420)의 라틴어 번역 불가타(Vulgata) 성경과, 그 번역의 다양한 오류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초로 축적한 자신들의 신학적·종교관습적 전통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 완강함을 견지했다. 반면에 당시 개혁그룹은 라틴어는 물론, 헬라어와 히브리어, 심지어는 아람어와 같은 고전어까지 능통하여 당시에 일어나던 역사적 인문주의로 잘 무장한 학자들이 원어 성경을 손에 들고 차근차근 정오(正誤)를 추적해, 그들 신앙과 신학의 오류를 바로잡아가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당연히 당시 가톨릭은 라틴어나 헬라어를 공부하는 일 따위는 결코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신약 성경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질의를 받은 어느 추기경이 “아마 그 책은 마르틴 루터 따위가 써낸 신간(新刊) 나부랭이인 모양인데……” 등의 말로 답하면서, 자신은 “그런 형편없는 서적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는 천주님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외쳤던 기록 등은 그저 그 시대 가톨릭의 수준 실상을 보여주는 일화들 가운데 짤막 유치한 에피소드 하나일 뿐이다.
신앙의 내용이나 복음, 은혜와 생명에 관한 어떤 관심도 의미 추구도 없이, 다만 교권의 행사와 그 물리적·세속적 나타남에만 치중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시대 주류 교회의 지도자들도, 또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한계를 느낀 프랑수와 1세는 이 무지몽매를 고집하는 가톨릭에 반발, 가톨릭 신학의 본산지인 소르본느 대학 바로 맞은편에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가르쳐 인문주의 발전을 도모할 왕립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당시의 가톨릭 교회와 그 시대의 종교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그 자신의 세속적·정치적 이해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울 정도로 모호한 입장을 보였던 이 프랑스의 국왕조차도 상기한 현상과 현실에 대하여서는 극단적으로 부정적일 만큼, 당시 가톨릭 교회는 저급하고 부패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정도에서 우리 독자들은 오늘날을, 그것도 우리들 교회의 현실을 대화하고 싶어할 심정 십분 이해하지만, 지금은 우선 우리 논지의 일관된 추적을 위해 잠시 참고 지나가기로 한다.
말하자면 애시당초 학문적·신학적 토론이나 대화가 가능하지 않은 대립이었기에, ‘법보다 주먹’이라는 방법으로 당대의 성(聖)과 세속(世俗)을 장악하는 것이 국가나 사회의 일치와 통합보다 화급했던 그들로서는, 걸거치는 모든 대상을 다 잡아 죽여서라도 자신들의 완력을 정당화하고 싶은 열심에, 이 무자비하고 무수한 학살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프랑스 가톨릭 교회가 벌인 학살들과 핍박의 극단적인 잔인함, 처참함의 한 가지 설명이라 하겠다.
바돌로메 대학살에 대한 역사의 반응
프랑스의 유명한 역사가이며 정치가였던 앙드레 모로와(André Maurois)는 그의 「프랑스史」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사를 다루면서 감정과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진실에 도달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상존하는 불균형과 실수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최소한 나쁜 의도를 가지고 이를 다루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역사가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만을 그대로 말하자면, 유독 프랑스의 위그노 핍박사, 오늘날에도 가톨릭 교회가 반복하여 이 시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보자면, 모로와의 부정적 지적이 마치 이들을 직접 겨냥하고 있는 것만 같고, 가톨릭은 아예 그 설명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500년 세월이 지나다 보니 이제는 가톨릭 교회 밖에도 이들의 왜곡과 프로파겐다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상당수 생겨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서는 심지어 기독교와 복음, 성경에 대하여서 지독히 냉소적이었던 무신론 인문주의자 볼테르(Voltaire) 같은 사람들조차 탄식을 숨기지 않을 정도였다.
필자는 지금 이른바, 가톨릭의 사실(fact) 왜곡과 사실 외면(denial), 특히 ‘관용’에 관한 뒤집어 씌우기(turning it out) 작업 같은 역사 서술 방법과 주장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엄청난 분량과 수준(level)의 역사적 사실(facts)과 증거(evidences)들,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온 역사적 상황의 엄존(儼存)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부 일본인(日本人)들과 일본 정치가, 학자들의 ‘독도’ 문제 만들기와 분쟁화(紛爭化) 방식에서 너무나 유사한 느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일본인들이 16세기 프랑스 역사를 의도적으로 모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되는 지경이다.
말하자면, 부패하고 오도된 교권이라는 종교적 파괴력이 야기하는 포악함과 국수주의로 무장한 팽창 세력이 저지르는 무자비한 폭거는, 인류 역사에 끼치는 패괴함의 성격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만약 이들이 실제로 어떤 계획을 갖고 그런 모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불행한 결론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남기고 지나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 심성의 한 부서진 본질 안에 이미, 역사를 교묘하게 비틀어내는 자질 또는, 자신의 집요한 욕심을 허위와 사이비함으로 지원하는 독특한 기술과 재능이 깊숙히 또아리 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처절한 절망이다.
유럽 전역에 이 바돌로메 축일 대학살의 소식은 파급되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보도에 접하고 충격을 받아 상복을 입었다. 잘 알려진 가톨릭 교도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공포에 떨었다는 기록이 있다. 쥬네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가족들과 친척들, 동료들과 동문들이 즐비한 모국 모교회에서 터져나온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는 반가워하며 이런 축사를 읊었다고 한다. “나의 생애에서 겪는 가장 기쁜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사람은 성격적으로 웃음과 기쁨의 표현에 아주 인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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