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3일, 나는 <나눔과 기쁨> 유럽연수 프로그램을 위해 목회자 31명과 프랑크푸르트를 가기 위해 북경공항을 경유하다가 공항당국에 4시간 동안 억류당했다. 공항당국이 통과여객의 신분을 확인하는 경우도 처음이지만 여권 뿐만 아니라 주민등록증까지 보고 나서도 신원확인이 더 필요하다며 임의동행을 요구하다가 이에 불응하자 공항건물의 화장실을 이용하고 돌아가는 길까지 막아 나를 억류하는데 성공했다. 그랬다가 한국대사관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출국을 허락하고 비행기 좌석에 앉은 다음에야 여권을 돌려주었다. 중국정부가 이런 행동한 이유는 내 이름이 중국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탈북난민강제송환 저지 국제켐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세 차례에 걸친 유럽 자전거 켐페인을 포함하여 40여 차례의 중국대사관 앞 항의집회를 주도했었다. 우리는 북경올림픽 때까지는 강제송환을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올림픽을 치르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 후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을 보고서야 나는 그동안의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탈북난민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티베트 문제, 파룬궁 문제, 천안문 사태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국에서 온 정치난민이 도움을 청해도 도와주지 않았다. 중국정부에 밉보이면 탈북난민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중국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탈북난민의 강제송환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강제송환 뿐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도 중국의 변화 없이는 결코 열릴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은 동북아의 평화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존재였다. 중국이 있기 때문에 호전적인 북한도 존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북한인권 시민운동은 과거처럼 탈북난민강제송환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티베트, 위그르, 몽골, 천안문사태, 파룬궁 등 중국의 변화를 원하는 모든 세력들과 연대하여 중국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옥에 있는 류샤오보에 대한 노벨평화상 수상 소식은 큰 계기가 되었다. 각 나라가 앞 다투어 류사오보의 석방을 촉구했지만 한국정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부가 침묵한다고 해서 국민도 침묵할 수는 없다. 나는 먼저 한국에 망명한 중국 반체제 인사를 찾아가서 우리가 과거에 군사독재세력과 싸울 때 많은 외국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그동안 당신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당신들을 돕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중국대사관 앞에 가서 류사오보의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나는 “중국이 제 아무리 경제대국이라 하더라도 내 눈에는 하잘 것 없는 인권후진국에 불과하다. 다윗의 물맷돌을 맞고 맥없이 쓰러지는 허약한 골리앗일 뿐이다”고 외쳤다.
그런데 내 이름이 중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것은 그 이전부터였다. 한국정부는 불법체류자를 추방한다. 그런데 파룬궁 불법체류자가 추방당해서 중국에서 실종되었다. 파룬궁은 중국에서 혹독하게 탄압 당하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파룬궁들이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조선족교회 목회자인 나는 그들을 도울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을 도우면 나는 중국에 있는 교인들을 만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파룬궁은 사이비 종교다. 그렇지만 끝내 아무도 이들을 돕지 않으면 나라도 도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중국이 탈북난민을 추방하면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에 갇히니 추방하면 안 된다고 외치면서 똑 같은 처지에 있는 파룬궁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파룬궁과 같이 한국 법무부 앞에 가서 이들의 추방을 반대하는 집회를 했다. 그리고 후에 법무부의 방침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 후부터 나는 중국비자를 발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한번은 누가 중국정부의 편을 드는 발언을 한 번만 하면 이 모든 것을 풀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 수 없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