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기훈 목사
UTC와 한남대학교가 공동 개설한 박사과정의 목회자들이 지난 2주간 켈틱교회 현장을 답사했다. 이상택 교수의 지도하에 켈틱의 영성을 찾아 나서는 한편, 얀 후스로부터 요한 웨슬리까지 이어지는 종교개혁의 현장을 직접 살펴보았다. 본지는 이 같은 현지답사로 얻어진 연구 내용을 기행문의 형태로 게재함으로써, 켈틱교회 영성과 사상을 호주 한인교회와 나누기로 한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영성에는 세 갈래가 있다.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한 라틴 영성과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한 지중해 영성 그리고 아이랜드와 스코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켈틱(Celtic) 영성이 그것이다. 이번 여행은 세 번째 영성의 지류인 켈틱 영성의 흔적을 찾기 위하여 떠난 여행이었다. 켈틱 영성을 최종 목적지로 한 이유는 호주의 기독교 뿌리가 영국교회고 영국교회의 뿌리가 켈틱교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켈틱영성을 어떻게 무너져가는 호주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데 여행의 목적을 두었다. 일곱명이 함께한 이번 여행은 기대감과 후원해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연구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출발했다. 목회자들이 어렵게 낸 시간이기 때문에 여행의 일정을 약간 무리하지만 가장 효과 있게 계획하였다.
먼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100년 전에 이미 교회 개혁을 주장했던 그러나 장엄하게 순교를 당했던 얀 후스의 발자취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의 첫 정착지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였다. 그 다음 루터의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찾아보기 위해 자동차 편으로 작센 공화국의 수도였던 드레스덴을 거쳐 독일로 건너 갔다.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아이젠낙(Eisenach)과 에르훠르트(Erfurt) 그리고 비텐베르그(Wittenberg)를 중심으로 찾아가보기로 했다. 다음엔 켈틱 영성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스코트란드의 아이오나 섬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엔 지금도 켈틱 영성을 근본으로 하여 운영되고 있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콜롬바의 신앙과 영성을 찾아보았다. 다음엔 북아일랜드로 비행기를 타고 건너가 아일랜드 사람들이 성자로 추앙하고 있는 패트릭 센터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켈틱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런던으로 돌아와 요한 웨슬레의 신앙과 삶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6월 6일 시드니를 떠나 인천을 경유하여 6월 7일 오후에 프라하에 도착하였다. 공항에 나와 있어야할 가이드 대신에 그곳에서 16년 째 사역을 하고 있는 이종실 목사님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다. 프라하의 역사적 중요성과 얀후스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방문 목적을 십분 충족시켜주었다. 가이드는 한 참 시간이 지난 후에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왔다. 독일 베를린에서 오던 길이 사고로 정체되어 부득불 시간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너무 미안해하는 전도사님을 위로해 주고 자유케 해주었다.
Praha와 Jan Hus
프라하는 야경이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은 저녁나절 인파를 피해가면서 바쁜 걸음으로 프라하 구 시가지를 돌아보았다. 프라하는 종교개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세계 교회사에서 과격한 개혁이었다고 간단하게만 소개될 뿐이었다. 그러나 프라하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프라하는 2차대전 당시 가장 피해가 적은 도시여서 유럽에서 옛 도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관광객들이 수없이 찾아오지만 정작 프라하가 수 백년 동안 간직해 오고 있는 교회 개혁의 의미를 찾는 이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얀 후스(1372-1415)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재학 중 말씀을 강조한 요한 위클리프(1330-1384)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프라하 대학의 교수를 거쳐 총장까지 지낸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카톨릭 교회의 신부였다. 그리고 프라하의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자로 사역하였다. 그의 설교는 평민은 물론 왕족과 귀족들 까지도 좋아했다. 설교 내용은 주로 교회 개혁과 사회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그의 설교가 중세교회의 치부였던 면죄부 판매까지 문제로 지적하게 되자 기득권자들은 그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로 하여금 프라하에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도록 금지조치를 내리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장소를 남 뵈멘 지역으로 옮겨 교회 밖 들판과 광장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교회론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당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던 네 가지 문제를 들어 개혁을 요구하였다. 첫째, 자국언어로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라틴어로 모든 것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그런 예배에 어떻게 성령의 감동이 있을 수 있겠는가? 둘째, 성찬식은 예수님이 하신대로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그렇듯이 로마교회의 성찬식은 성도들에게 떡만 분배할 뿐 잔은 허용하지 않는다. 잔은 사제들만의 것이었다. 셋째, 사제들의 면책 특권을 철회해 한다고 주장했다. 넷째, 교회는 청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교회가 윤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얼마나 타락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교회 개혁은 교회 밖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의 내부에서 성경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주장된 것이었다.
이러한 후스의 주장은 불행하게도 로마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교황청은 스위스 근처에 있는 콘스탄츠에서 후스를 심판하기 위한 공회의를 열고 그를 소환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예상대로 정당한 재판을 받지도 못한 채 구금되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때 그는 유명한 예언을 남겼다. “지금은 당신들이 거위를 제거할 수 있지만(후스라는 이름의 뜻이 거위였다) 앞으로 100년 뒤에 나타날 백조는(마틴 루터를 의미하였다) 결코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후스는 1415년 7월 6일에 화형을 당했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어 교회의 참된 개혁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진실한 크리스찬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진리가 너희를 죄와 악마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할 것이다.” 후스의 예언대로 100년 뒤에 마틴 루터가 등장하여 교회개혁을 성공하였다. 그리고 칼뱅에 의해서 교회개혁은 완성되었다. 그의 죽음은 경건주의의 모태가 되는 Brethren church(보헤미안 형제단)을 태동하게 하였다.
얀 후스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농민들이 봉기를 했다. 그러나 타보르 전투에서 패배하므로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621년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27명의 귀족들이 한꺼번에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목을 잘라 카를교 입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구시청사 앞 바닥에는 1621년 이라는 날짜표시와 27개의 하얀 십자가가 그들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져 있다. 비록 후스의 개혁은 실패로 끊나버렸지만 유럽의 종교개혁을 일깨우는 불씨가 되었다.
틴(Tyn) 교회
구시청사 맞은편에는 두 개의 종탑이 우뚝 솟아 있는 틴 교회가 있다.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어 밤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이 교회는 후스의 종교개혁을 가장 먼저 지지한 교회였다. 이 교회는 비성서적인 상징이었던 금으로 된 성찬기를 성전 밖 문 위쪽에 홈을 파서 놓고 사람들로 보이게 하였다. 그러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자 로마교회 지지자들이 교회를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성찬기가 있던 자리에 성모 마리아 상을 세워놓고 그곳에 있던 금잔을 녹여서 마리아 상을 빛나게 하는 표시로 사용해버렸다. 그리고 개혁파들이 단순한 고딕형으로 장식했던 교회 내부를 바로크 형식으로 화려하게 장식해버렸다.
베들레헴 교회
구시청 광장에서 바츨라프 광장으로 가는 길에 베들레헴 교회가 있다. 이곳은 후스가 체코어로 설교하던 곳이다. 1300년 경 얀릴리치라는 사제는 수도원 학사에서 창녀들의 고해성사를 받아 주었다. 당시 프라하는 부흥하는 도시로서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창녀들의 활동이 컸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같은 사람들이 같은 죄를 가지고 찾아와 계속 같은 고해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의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교회라는 제도 속에는 있었지만 복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씀이 없으니 변화도 없었다.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은 하지만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아무런 은혜를 얻지 못했다. 당시 라틴어는 귀족들과 사제들의 언어였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학사 옆에 개혁교회의 처음 출생을 의미하는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의 교회를 세우고 최초로 창녀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체코어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성례전이 없는 말씀만 선포하는 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는 교회의 구조도 카톨릭의 형식을 배제하고 개신교 스타일의 형식을 취했다. 이것이 후에 칼빈이 주장했던 광야교회의 원형이 되었다. 강단에는 오직 성경만을 비치해 놓았다. 오늘날 개신교의 형식을 배제하고 말씀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의 전통은 이렇게 프라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최초로 평신도들이 2종 성찬에 참여한 교회
다시 골목길을 돌아 한 교회에 다다랐다. 비록 늦은 시간이라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문 앞에 서서도 그 교회가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이 교회는 1414년경에 최초로 평신도들이 이종 성찬에 참석한 교회였다. 회중들이 떡과 잔을 함께 받는 그런 교회였다. 2004년에는 6백 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구 시가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프라하 광장은 야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조명에 비추어지는 건물들과 길거리 카페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광장을 빠져나가 카를교를 건너갔다. 이 다리에 입구에 매달려 있었던 개혁자들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건너갔다. 밤에 보이는 프라하성의 아름다움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광장과 구시가지 골목들은 온 세계에서 여행을 온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이곳을 방문했는지 알고 싶었다. 과연 종교개혁의 첫 발생지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면서 찾아온 것인지 묻고 싶었다.
저녁 늦은 시간 숙소로 돌아와 어떻게 잠에 들었는지 모른다. 모두들 긴 하루의 여정을 소화하느라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다음날 일정을 조정하여 마틴 루터의 흔적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아침 일찍이 프라하를 떠나 독일의 첫 방문지인 드레스덴을 향하였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쯔윙거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성경을 주제로 한 유명한 그림이 있었고 또한 루터의 전문 초상화가 그린 작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일 통일의 대업을 시작케 한 교회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를 태운 차가 체코의 국경을 넘어 독일로 들어서자마 국경 수비 경찰차가 뒤 쫓아왔다. 아마 불법 입국자들을 조사하기 위한 과정인 듯 했다. 우리의 여권을 살펴본 후에 가던 길을 계속 가도록 해주었다.
시드니온누리교회 담임 이기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