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흔 칼럼]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공복 느헤미야
히브리어로 ‘여호와께 위로받음’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 느헤미야는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가 을래강 연안에 있던 수산궁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유다 지파 소속 하가랴의 아들이다(느 1:1). 그는 예루살렘의 최고 정치 지도자가 된 하나니의 친형이다. 느헤미야는 가문이나 신분이 이스라엘의 상위계층에 속해 있었다.
느헤미아는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주전 465-424 재위)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궁중의 주관(酒官)이 됐다(느 2:1). 어느 날, 아마도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주전 444년 11월-12월 사이)에 예루살렘이 큰 환난을 만나 성도(聖都)로 능욕을 받았으며, 성벽은 훼파되고 하나님의 성전에 놓여있던 성물들은 거의 소화(消火)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느 1:3). 정통 유대인으로서 그는 너무나 슬퍼 며칠 동안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했다.
그는 바사 왕을 직접 찾아가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에 있는 성읍에 보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느 2:5)라고 눈물로 부탁했다. 바사 왕은 그의 부탁을 허락함과 동시에 삼림감독 아삽에게 예루살렘 성곽과 느헤미야의 집을 건축할 수 있는 재목을 보급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한 군대장관과 마병까지 딸려 보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일정 기간이 차면 바사로 반드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출발하여 동년(주전 445년)에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땅에 도착했다.
약 3일 동안 휴식을 취한 후, 야밤에 몰래 자신의 친위세력 몇 사람만 데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살피면서 심한 파괴 상을 철저히 조사했다. 제사장, 귀인, 방백 및 권위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성벽 중건을 제안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느헤미아의 성벽 재건 제의에 동조했고, 공사에 개별적으로 참여하며 협력했다.
재건 공사는 느헤미야를 지도자로 인정하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달란트에 따라 분담했다. 예를 들면 양문(羊門)과 북편 성벽들은 제사장 엘리아십과 기타 제사장 및 귀족들이, 서편 성벽은 살롬과 그 딸들이, 동편 성벽은 살룬 등이 공사를 진행시켰다(느 3장). 산발랏과 도비야 및 주위 여러 종족들이 성벽 재건을 반대하여 노골적으로 박해했기 때문에, 모두 무장을 하고 복구 작업에 가담했다(느 4:1-6:14). 개시한지 52일만인 엘룰월 25일에 모든 공사가 끝났다. 사역을 철저히 위임하여 일꾼들이 중간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따라서 소신껏 일하므로 크게 성공할 수 있게 됐다.
느헤미야의 정책에 반대하는 대적들과 사면에 살던 이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놀랐다(느 6:15,16). 너무 짧은 시간 안에 느헤미야의 리더십 아래서 공사가 빈틈없이 완성됐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연약한 존재들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조롱했는데, 생각과 다르게 강력한 백성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유다 총독 느헤미야는 막중한 성벽 공사를 진행하면서도 유대인 간의 문화적 악습을 개혁하고, 그들의 불평불만을 해결했다. 성경에 따른 율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 주신 율법을 열심히 가르쳤으며, 초막절 등 이스라엘의 절기를 말씀대로 지키게 함으로써 하나님를 향한 예배와 성회를 부흥시켰다(느 8장).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에는 당대의 유력한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도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느 8:1,9,13,12:36).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사악한 탐관오리의 압제 때문에 생활이 곤궁해졌다고 호소해 오는 자들도 있었다. 총독 느헤미야는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저당잡힌 것을 모두 돌려 줌으로써 민족간 빈부의 충돌을 지혜롭게 조정했다. 자기 형제인 하나니와 하나냐에게 성벽을 수비시킴과 동시에(느 7:1-5) 지방 사람들도 필요에 따라 예루살렘 성내에 살도록 해 지역간 균형발전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느 11장).
성곽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해 성문은 정결케 되었고, 참석한 사람들은 두 떼로 나뉘어 감사 찬송을 부르며 완공된 성 위로 행렬을 지어 걸어갔다. 낙성식에 참여한 백성들은 거제물과 십일조를 드려 하나님 성전의 곳간(庫間)에 쌓게 했다(느 12:27-44).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임명돼 1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민폐는 고사하고 총독의 녹까지 전혀 받지 않았으며, 자비(自費)로 가난한 유대인 150명을 먹이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느 5:14-18).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에서 추방하든가, 가능하면 암살하려는 모략이 있게 됐다. 그가 예루살렘을 부흥시켜 유대를 독립국으로 만들어 왕이 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위증 편지가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내져 한때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스 4:21). 거짓된 편지의 진위는 곧 밝혀졌고 느헤미야를 지도자로 한 성벽공사는 어려움 중에 완성됐다. 느헤미야는 12년간의 성벽 공사 임무를 마치고 주전 433년경 바벨론으로 다시 돌아갔다(느 5:14,13:6).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을 때 대적들의 박해는 없었으나, 내부에 여러 번민이 있었다. 제사장 엘리아십이 이스라엘의 대적 도비야에게 성전의 큰 방 하나를 내주고(느 13:4,5) 레위인들에게는 월급을 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각처로 도망쳐(느 13:10)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느 13:15),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기도 했다(느 13:23).
그는 다시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해 문란한 사회윤리 개혁을 즉각 단행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난 혼혈족인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분리시켰다(느 13:1,2). 암몬 사람과 도비야를 성전에서 추방하고(느 13:4-9), 성전에서 주는 월급을 조정했으며(느 13:10-14), 안식일을 엄수시킴과 동시에(느 13:15-22), 잡혼을 금지시켰다(느 13:23-30). 느헤미야의 최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바사왕 다리오 치세의 말기까지(주전 405년) 예루살렘에 살다가 고령으로 사망한 것만은 틀림없다(느 12:22). 그는 이스라엘 종교 사상 특수한 지위를 가진 인물로, 유대교 건설에 가장 크게 공헌한 공복 중 하나다.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몸을 사리거나 역동적인 사역을 거부하는 소극적인 공무원·직장인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느헤미야는 오늘도 던진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공복을 자처하는 현대의 공직자들은 반드시 귀를 열고 들어야 한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비굴하게 살 것이 아니라, 주전 5세기 느헤미야가 대적 앞에서도 용기있게 살았던 것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기꺼이 바쳐야 한다. 앞으로 있을 총선과 대선은 참된 공복을 가려낼 수 있는 참된 선거가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