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에서 대적을 모두 쫓아내지 못한 결과와 오늘날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유동근의 사사기 3] 주객이 전도된 단 지파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사사기 1:21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22 요셉 족속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니라 23 요셉 족속이 벧엘을 정탐케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 탐정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의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를 선대하리라 하매 25 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르친지라 이에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 그 사람이 헷 사람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곳의 이름이더라 27 므낫세가 벧스안과 그 향리의 거민과 다아낙과 그 향리의 거민과 돌과 그 향리의 거민과 이블르암과 그 향리의 거민과 므깃도와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28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 30 스불론은 기드론 거민과 나할롤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가나안 사람이 그들 중에 거하여 사역을 하였더라 31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 납달리가 벧세메스 거민과 벧아낫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들이 그들에게 사역을 하였더라 34 아모리 사람이 단 자손을 산지로 쫓아들이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지 아니하고 35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더니 요셉 족속이 강성하매 아모리 사람이 필경은 사역을 하였으며 36 아모리 사람의 지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그 위였더라

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 일곱 족속과 싸워 그들을 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신 7:1-26).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내고 진멸할 것을 강력하게 명하시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말고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이 부분의 말씀(21-36절)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못한 것을 보게 된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더라’고 했다.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사실 오른손의 아들은 그리스도이시다. 교회의 부흥은 오른손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힘있게 되고 높여질 때 일어난다. 시편 기자는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 위에 주의 손을 얹어달라고 간구했다. 그리하면 주에게서 물러가지 않을 것이라면서 새롭게 부흥되기를 원했다(시 80:15-18). 그의 인식에 교회가 살고 소생될 수 있음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서 힘있게 되시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반대로 교회의 하락은 그리스도의 권위가 교회에서 약화될 때다. 그들이 만일 오른손의 아들을 높였다면 여부스 사람을 정복했을 것이다.

2. 22-26절까지는 요셉 지파가 벧엘을 공격하여 취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22절은 “요셉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니라”고 한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이다. 후에 열거된 지파들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요셉 족속의 사람들은 한 성을 정복했다. 차이가 있다면 요셉 지파의 사람들은 벧엘을 치러 올라갔지만 다른 지파 사람들은 정복하기 위해 치러 갈 의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저 가나안 사람들과 공존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차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취하러 나아갔느냐의 여부에 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문제는 대적을 정복하는 영이 부족하여 대적들과 공존하는데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겨야 할 세상과 짝하며 그 속에 부속되어 산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사실도 모르고 사는 것이다. 내가 깊은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가장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요셉 지파는 전투하기 전에 벧엘을 정탐케 하였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벧엘의 원래 이름인 루스는 ‘분리’라는 뜻이다. 세상과 분리됨이 없이는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집의 가장 큰 특징은 부르심받아 나와 세상과 분별된 것이다. 교회라는 헬라어가 ‘에크레시아’로서 부르심을 받아 나온 자들이다. 세상과 분별된 간증이 없다면 더 이상 부르심 받아 나온 자들인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교회는 죄와 세상에서 분별되어 나온 자들인 것이다.

요셉 지파는 유감스럽게도 정탐에게 벧엘 성읍의 입구를 알려준 사람을 살려주었다. 그는 요셉 지파에 귀화하지 않고 헷 사람의 땅(수리아 북방)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 성의 이름을 과거 자기가 살았던 도시의 이름을 따서 루스라고 지었다. 이 사건은 라합을 살려줄 때의 상황과 같이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라합은 회개하고 이스라엘을 영접했지만 이 자는 단지 전쟁의 필요를 위해 이용당한 셈이다. 그런 자를 살려준 것은 타협의 일환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요셉이 뒤에 나오는 다른 지파에 비해 강하고 적극적으로 싸우러 나아간 것은 매우 좋았지만 충분히 강하지는 않았다. 영이 충분히 강하지 않은 전쟁에서는 타협이 들어온다. 그리고 이러한 타협의 결과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가나안의 한 성(루스)을 정복했지만 결국 또 다른 곳(루스)에 같은 종류의 독초가 자라나게 만들었다. 하나의 문제를 없앴지만 또다른 문제를 낳은 것이다.

이것이 충분히 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충분히 강하지 못하면 반드시 타협의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중간적인 상태는 비록 대적과 싸울지라도 절대적임과 단호함이 부족한 것이다. 사실 요셉이 충분히 강했다면 정탐조차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전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반부에서 유다는 정탐을 보내지 않고도 많은 곳을 정복했다.

3. 27절부터 36절까지는 그 외 여섯 지파들의 연약함과 패배의 상황을 말해준다. 므낫세와 에브라임, 스불론과 아셀, 납달리와 단 지파는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내라고 하셨지 같이 살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 말씀에서 “쫓아내지 못하였고”,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는 매우 큰 아쉬움으로 읽어야 할 말씀이다. 그들은 응당 쫓아내야 할 대적들을 두고 편안하게 살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흐려지고 믿음이 약해진 나머지 그들과의 공존을 모색했다. 그들은 굳이 그렇게 어려운 전쟁을 치러가면서 살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가나안 사람들의 편안한 삶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있어서는 안 될 육체와 죄악과 불의를 두고도 쫓아내지 못하고 공존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런 일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상당한 책망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수치스러운 한 가지 일은 단 지파가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기는 고사하고 그들에게 쫓겨 산지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모리 사람들은 단 지파가 골짜기로 내려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림에 거하였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해질 때 교회 안에서도 인간적인 권력이 영적인 권위를 실추시키고 자리를 굳게 잡게 된다. 육체의 사람들과 마귀의 권세도 만만하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으로 원수의 권세가 쫓겨난 곳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마 12:28, 계 12:10).

이 구절은 아모리 사람들이 결심하고 골짜기의 도시들에 거주했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모든 풍요로운 소출은 평지와 골짜기에 있지 산지에 있지 않다. 산지로 쫓겨난 이스라엘은 약속된 소망의 기업에 들어왔을지라도 그들의 체험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 아모리 사람들은 평지인 골짜기에 거하면서 산지로 몰아낸 이스라엘이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함으로 그들을 산에 가두어 버렸다. 이스라엘은 정복자의 위엄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36절에서 아모리 사람들은 그들의 지계를 표시했다. 아모리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의 유업의 땅인 가나안에 자신들의 지계를 갖고 있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다 쫓겨나야 할 자들이고 진멸되어야 할 자들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 제해져야 할 육체나 세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고전 5:2, 13, 6:9).

2: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1. 1절의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이다. 피조물인 천사라는 견해도 있으나 구약의 이곳저곳에 나타난 메시아로 보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이다(창 16:7, 9, 11, 출 3:2).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의 상태에 매우 관심이 많으시다. 이러한 주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신지! 그분이 그리스도임에 틀림이 없는 것은 “내가 너희로…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 자신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끄신 분이며 언약을 세우신 분이다.

2. 길갈에서 보김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 분이 과거에는 길갈에 계셨다는 뜻이다. 실지로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시작하거나 마칠 때 반드시 그곳에 가서 새롭게 주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곤 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들이 연합하여 죽고 부활했음을 상징하는 돌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을 떠나 높은 상태에 이르렀다. 길갈은 십자가의 지점이므로 높은 곳이 아니라 가장 낮은 지대였다. 그러나 보김은 ‘여호와의 사자가 올라갔다(came up)’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높은 곳임에 틀림없다.

1장에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그렇게 높은 상태에 있지 않았다. 비록 유다 지파의 승리가 있긴 하지만 다른 대다수 지파들은 패배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약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저열한 죄악이 있었음에도 교만했던 것처럼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보김으로 올라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주님은 1장의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것과 단들을 헐지 않은 것을 책망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쫓아내지 않으므로 그분도 쫓아내지 않겠다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고 지켜야 함을 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것을 잘못 가르쳐 사람을 완전히 피동적이 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다 하시니 사람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라!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쫓아내지 않으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을 쫓아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1장에서 유다 지파나 요셉 족속이 적극적인 영을 갖고 대적을 치겠다고 할 때에는 여호와께서 즉각 함께하겠다고 나서셨다. 대적을 공격하고 쫓아내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소홀히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마음은 겸비치 않고 높은 데 있었던 것이다.

4.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의 상태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면서 그 쫓아내지 않은 가나안 족속이 그들의 올무가 되며 옆구리의 가시가 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은 슬피 울었다. 그들의 울음이 비록 효과없는 울음이었을지라도(후에 이어지는 사사기의 역사는 진정한 회개의 열매가 없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그 말씀이 얼마나 엄중한 말씀인지를 알았다. 물론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했다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닥칠 불행을 예감하고 우는 성분이 많았을 것이다.

보김(학자들은 그곳이 벧엘-칠십인 역 참조-이라고도 하며 실로와 동일 지명이라고도 한다)은 후회의 눈물이 있는 곳이다(이 사건을 언약궤의 이동―길갈에서 보김―으로 보기도 한다). 누구든 실제가 없이 허황되게 높은 곳에 있게 되면 주님의 음성이 들릴 때 통한의 눈물이 있게 된다. 그것은 지난날의 잘못된 생활에 대한 것이요 또 장래에 닥칠 어려움으로 인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실제는 없이 마음만 높은 정상적이 아닌 영적인 상태에 처해 있었다.

5. 그들은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다(5下절). 눈물과 회개와 제사, 모두 귀한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처리는 철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오늘날도 한 순간 주의 음성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으로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은 희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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