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6] 굉장한 헌신을 해도 잘못될 수 있다
3:12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케 하사 그들을 대적하게 하시매 13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들을 모아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을 쳐서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한지라 1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을 섬기니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의탁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16 에훗이 장이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우편 다리 옷 속에 차고 17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심히 비둔한 자이었더라 18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19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가로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고하려 하나이다 왕이 명하여 종용케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20 에훗이 왕의 앞으로 나아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가로되 내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왕에게 고할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 좌석에서 일어나니 21 에훗이 왼손으로 우편 다리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22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 몸에서 빼어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더라 23 에훗이 현관에 나와서 다락문들을 닫아 잠그니라 24 에훗이 나간 후에 왕의 신하들이 와서 다락문이 잠겼음을 보고 가로되 왕이 필연 다락방에서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 25 그들이 오래 기다려도 왕이 다락문을 열지 아니하는지라 열쇠를 취하여 열고 본즉 자기 주가 이미 죽어 땅에 엎드러졌더라 26 그들의 기다리는 동안에 에훗이 피하여 돌 뜨는 곳을 지나 스이라로 도망하니라 27 그가 이르러서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 28 무리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라 여호와께서 너희 대적 모압 사람을 너희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매 무리가 에훗을 따라 내려가서 모압 맞은편 요단 강 나루를 잡아 지켜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였고 29 그 때에 모압 사람 일만 명 가량을 죽였으니 다 역사요 용사라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였더라 30 그 날에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의 수하에 항복하매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31 에훗의 후에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1. 두 번째 사사는 에훗이다. 이스라엘이 다시 악을 행하니(우상숭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압의 수하에 두어 18년 간 종노릇하며 그에게 공물을 바치게 하셨다. 사사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칼로 찔러 죽이고 일만 명의 모압 병사들을 죽임으로 80년 태평성대가 오게 되었다. 이들이 어떤 우상을 섬겼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당시 그들이 공물을 바치고 지배를 받아오던 나라가 모압이니 모압과 암몬의 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모압의 주신은 그모스라고 하고 암몬의 신은 몰록이라고 하는데, 모압과 암몬의 신은 어린 아이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신이다. 매우 끔찍한 우상숭배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지독한 헌신(?)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하게 된다. 오늘날 누가 종교적으로 잘못되어 미쳤다 해도 자기의 아들이나 딸을 제물로 드려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종교심이란 참 신앙이 아닌 경우에도 얼마든지 엄청난 헌신과 자기 부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답이다. 굉장한 헌신의 모양이 있다 해서 그 신앙의 대상이 반드시 옳다고 인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2. 당시 이스라엘이 다시 죄를 짓고 모압에게 다스림 받게 되는 일에 관해 이렇게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타락하곤 하는 원인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반의 순종과 타협의 정신이 급속한 타락을 가져온 것이다.
하나님은 가나안 일곱 부족을 전멸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단번에 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하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점진적으로 쫓아낸다는 말씀이 그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점진적이심과 이스라엘의 타협적 신앙인들의 점진적임은 그 해석이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쫓아낼 때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지 여유롭게 천천히 사정을 봐가면서 쫓아낸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가나안 사람들을 조금씩 용납하고 그들과 연혼도 해가며 천천히 쫓아내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나태하고 타협적인 사상이 온 이스라엘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방 배우자들은 자연히 그들 족속의 우상을 가져오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우상의 유혹에 떨어지게 됨으로 그들은 점차적으로 우상화가 되었다. 결과는 온 이스라엘에 우상이 가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타협적이고 절대적이지 않은 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사용되곤 했다. 오늘날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절대성이 부족한 상태에 대해 아직 변화와 성장의 과정에 있으니 장래 시간이 지나다 보면 바람직한 수준에 이를 것이라 낙관론을 편다. 그것은 매우 좋게 들리지만 사실 타협이고 온전한 순종과 절대성이 부족한 절반의 순종 정신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조만간 세상과 육체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죄와 육체의 지배 아래 떨어지게 된다.
이 길은 절대적인 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언젠가 대적에게 진을 내어주게 되어 있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의 온전치 않은 순종과 전쟁에 있어 절대적이지 않고 타협적인 태도가 결국 그들과 연혼을 하게 했고, 그 결과 그들 가정에 가나안 사람들의 종교 관념과 안주하는 세상살이 방식과 우상이 점차 들어오게 되었으며, 결국은 모압에 복속되었다. 그들은 모압에게 18년 간 종살이하고 공물을 바치는 일을 하였다. 그 땅의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그들의 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압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이 최초로 정복한 ‘종려나무의 성(여리고)’을 점령해 버렸다.
3. 이스라엘은 모압에게 공물을 바쳤는데 그 일에 에훗이 책임자였다. 에훗은 당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에 있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다. 모압의 권세를 무력하게 하여 그들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해내는 일이었다. 그는 그러한 일을 수행함에 있어 자세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먼저 모압 왕 에글론을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공물 바치는 일로 에글론을 쉽게 만날 수 있어 그 일이 가능했다. 그를 없애는 일에는 우선 치밀한 작전이 필요했는데, 에훗은 일단 그 시기를 공물을 바치는 때로 잡았다. 그때가 에글론이 가장 경계를 소홀히할 때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알맞은 크기의 칼(장이 한 규빗)을 날카롭게 갈아서 준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돌아가는 것처럼 가다가 길갈의 돌 뜨는 곳에서 되돌아왔다. 틀림없이 그는 길갈에서 주님과 새로운 관계를 갖고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힘을 얻었을 것이다. 길갈은 이스라엘에게 항상 영적인 소생과 회복의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는 왕에게 나아와서 은밀한 일로 왔으니 주위 사람들을 물려달라고 주문했다. 당시 이스라엘이 비록 모압의 통치 아래 있는 속국이었을지라도 에훗은 이스라엘의 재판자였으며 모압 왕을 독대할 기회가 많았으므로 에훗은 그런 위치를 십분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칼을 자기의 오른편 다리에 숨겨가지고 들어가 에글론이 서늘한 다락방에서 홀로 쉬고 있을 때 접견하게 되었다. 그가 오른편 다리에 칼을 숨긴 것은 그가 왼손잡이이므로 칼을 빼기에 수월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때 왼쪽 다리에 칼을 숨기는 것이 상례이지만 에훗은 자신의 장점을 알고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에훗은 그가 비둔한 것을 알았으며 자기가 어떻게 말할 때 그다지 경계하지 않고 들어줄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모든 일은 에훗의 판단대로 되어갔다.
이는 영적 전쟁을 하는 오늘날의 우리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본이다. 물론 하나님은 이 시대에 결코 칼을 가지고 가서 사람을 죽이라고 명하지 않으신다. 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고 하시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당시 사사 에훗의 사명은 에글론을 죽이는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명하셨다. 어쨌든 영적 전쟁에 임하는 자들은 이와 같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즉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여 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이므로 오른쪽 다리에 칼을 차야 빼기가 쉬웠다. 자기의 장점이 무엇인지, 특징이 무엇인지를 모르고는 싸울 수가 없다. 여기서 에훗은 승리하는 장군의 조건을 잘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명한 목표의식과 지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준다.
4. 에훗이 에글론 왕에게 자기가 왕께 전할 하나님의 전갈이 있다고 하니 그가 일어났다. 에글론 왕은 에훗이 말할 때 그래도 경외하는 표시로 일어난 것이다. 그때 에훗은 우편다리에서 칼을 빼어 에글론의 배를 찔렀다. 그리고 그 칼날은 날을 따라 들어가 등 끝까지 나아갔고 기름과 오물이 흘러나왔다. 개역 성경에는 오물이라는 말이 없지만 흠정역에는 ‘오물이 나왔더라(the dirt came out)’는 말이 있다. 에글론은 살이 많이 찐 비둔한 상태에서 칼에 찔려 죽었고 피와 분뇨 위에 나뒹굴어진 수치스런 모습이 되어버렸다.
5. 에훗은 현관문을 통해 나오면서 거실의 문을 잠궈 버렸다. 그래서 신하들로 왕이 거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예상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통치자가 너무 위압적이면 막상 위급할 때 주위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가 어렵다는 것을 교훈삼을 수 있다. 인도하는 자들이 너무 위압적이어서 주위 사람들로 그를 어려워하게 만들면 정작 위기가 닥칠 때 긴밀한 도움을 얻기가 어렵다.
에훗은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서 그런 일을 행했는가? 그렇다면 그의 지혜는 하나님의 주신 영적 지혜임에 틀림없다. 결국 에훗은 도망하여 에브라임 산에서 나팔을 불고 이스라엘 자손을 모아 전투하여 요단의 개울을 점령하여 한 사람도 건너지 못하게 하고 모압 사람 일만명 가량을 죽였다. 그 길목을 지켜서 다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모압 사람들이 매우 용맹한 자들이었음에도 말이다(29절).
6. 에훗의 전투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에훗이라는 사람이 매우 지혜롭고 치밀하고 모략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했다. 그의 철저한 승리가 결국 이스라엘에게 80년의 긴 안식을 가져다준 것이다.
7. 삼갈의 때는 아직 에훗이 죽지 않은 때일 수도 있다(4장 1절의 ‘에훗이 죽은 후에’로 다음 사사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쩌면 너무 늙어 사사로서의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는 때일 것이다. 그때 이미 이스라엘에는 다시 하락의 기운이 있었고 대적의 극심한 공격이 있었다. 그때 일어난 대적은 블레셋이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길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압박하고 괴롭혔다. 5장의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이 소로로 다녔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니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이 일으키신 또 하나의 사사가 삼갈이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고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소 모는 막대기로도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 소 모는 막대기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것으로 어떻게 600명을 죽일 수 있겠는가? 이는 충성된 자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왼손잡이 에훗이나 소 모는 막대기밖에 없는 삼갈을 통해서도 원하시기만 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으시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한 재능으로 어떻게 이 시대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겠느냐고 한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 제한받지 않으신다. 우리의 작은 물질일지라도 드려 그분의 큰 필요를 채울 수 있다. 그분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일을 하실 수 있다. 에훗이 잘 예비된 사사라면 삼갈은 잠시나마 그의 작은 역량이 하나님께 사용되어 이스라엘의 큰 필요를 채운 종이다. “하나님, 막대기만도 못한 우리를 어찌하든 사용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