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7] 드보라와 제갈량
삿 4:1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이방 하로셋에 거하는 시스라요 3 야빈 왕은 철병거 구백 승이 있어서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8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9 가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일만 인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1. 80년 간 태평성대를 누린 이스라엘은 다시 악에 빠졌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다. 하솔 왕 야빈은 여호수아 11장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자로서 그는 여호수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불사름을 당한 나라의 왕이었다. 아마도 같은 가문의 사람이 새로 일으켜져 다시 야빈이란 이름을 갖고 도읍을 하솔에 정하였을 것이며, 그는 철병거를 구백 승이나 둔 막강한 전력을 갖춘 자였다. 그들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몹시 학대했다. 그들은 그 동안 이스라엘에게 종노릇 하던 원주민들이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 진멸당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정하심과는 전혀 반대로 이스라엘이 종노릇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심하게 앙갚음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에 대한 압력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또 그들이 억압당하는 기간도 8년에서 18년으로, 20년으로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들의 죄의 양이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다(이상근 주석).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당시 사사는 여자였고 그 이름은 드보라였다.
2. 야빈의 히브리어 의미는 ‘이해’다. 사람의 천연적인 이해는 언제나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를 방해함으로 하나님 역사에 대적이 된다. 약 100년 전 여호수아에 의해 철저히 진멸된 야빈이 100년 후 더 강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 출현했다. 이스라엘은 그에게 20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 기간이 길어진 것은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 해롭지 않다고 여겨 속임을 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사람의 탁월한 지식으로 대치된 믿음은 처음에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러므로 대부분 어린 신자들은 성경의 오묘한 지식 세계를 접할 때 매우 호기심을 가지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삶에 양식과 힘이 되지 않는 건초와 같다. 하나님 자녀들은 젖을 먹는 기간이 있으나 오래 젖을 먹지 말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단계로 전진해야 한다. 단단한 음식이란 남이 영양분을 만들어 주는 음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빛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누구든지 자신이 직접 말씀의 깨달음을 얻기를 힘써야 한다.
순전한 말씀으로 양육받기 위해서는 모든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벧전 2:1). 사람의 천연적인 이해 속에는 사람의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가 숨겨져 있다. 이러한 천연적인 인간의 이해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된다.
또 인간은 지식을 흠모하고 추구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많은 지식주의 이단들이 생겨나 사람의 이해로 하나님의 계시를 대치했다. 사람의 지혜가 얼마나 매혹적이고 사람들을 확신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그들은 일단 소위 깨달았다 하면 견고한 울타리가 생기고 자신들만이 최고라는 함정에 빠지는데 마치 야빈이 하솔이란 곳에 강한 울타리를 치고 살았던 것과 같다. 그들의 강함은 철병거 900승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일단 인간의 탁월한 지식으로 신앙을 대치하면 그들의 성읍은 철병거로 무장한 것 같아서 하나님의 강력이 아니면 결코 정복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을 통해 직접 얻은 진리가 아닌 그저 머리에서 머리로 전수되는 진리는 헛된 지식에 불과하다. 바울 시대에도 교회 가운데 이런 일이 있었다. 사도는 이런 자들을 대항하여 싸웠다. 이것이 에베소서 4장에 있는 사람의 궤술이요 교훈의 풍조이며(14절), 골로새서에 나오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다(골 2:8).
3. 사사기의 열두 사사 중 여자 사사가 하나 있는데 그녀가 드보라다. 4절에서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라 말하는데, 랍비돗의 아내란 히브리어로 ‘번갯불의 아내(wife of lightning)’라는 뜻이다. 그리고 드보라는 ‘꿀벌’을 뜻한다. 꿀벌은 꿀같이 단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드보라는 비록 여인이지만 말씀을 풍성하게 갖고 있었으며 빛이 충만했다. 결국 사람의 이해의 성읍을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빛이다.
벌과 꿀의 관계를 생각하면 말씀과 말씀을 사랑하는 성도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사람의 이해의 큰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꿀벌이 꽃들을 찾듯이 말씀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서이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에베소서 6장에서 다른 것은 다 방어용 무기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검으로서 공격용 무기다. 대적을 섬멸할 수 있는 무기는 사람의 혈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드보라는 어떻게 대단한 야빈을 물리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꿀벌의 근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이 땅에서 하나님 위에 높아진 견고한 진을 파할 수 있는 자들은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 의해서다. 말씀으로 돌아가라!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만이 대적을 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사의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여자의 위치를 알았다. 여자는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남자의 권위 아래 있다. 고린도전서 11장 2절에서 바울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디모데전서 2장 12절은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다만 종용할지니라”고 했다. 이렇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여자의 위치가 있다.
여사사 드보라는 말씀에 있어서 풍성했으며 자격을 갖추었고 사사로서 많은 일을 했지만,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공적으로 이끌고 전투를 명하고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는 남자인 바락을 의뢰했다. 그녀는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 납달리와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고 했다. 이것도 자신이 명한다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고 했다.
하나님의 빛이 가득한 그녀는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도 알았고 어떤 지파의 사람들이 나가 싸워야 하는가도 알았다. 또 얼마나 많은 군대가 동원되어야 하는가도 알고 적군을 어디로 이끌어내야 하는가도 알았다. 그녀에게 말씀의 풍성이 있었기에 그러한 지혜와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 명예나 권력이나 큰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말씀의 풍성이 부족한 자들이다. 말씀의 풍성이 부족한 자들이 다른 것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 위에 솟아나려 한다. 그러나 드보라는 이미 많은 풍성을 갖고 있어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가 충분했다.
이렇게 좋은 사사가 있는 때에 좋은 동역자가 있었다.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이 귀하고 좋은 인재를 하나 얻으시면 반드시 한두명의 매우 좋은 동역자들이 붙여졌다. 이는 매 시대 공통적인 일이다. 루터 시대에도 멜랑톤이라는 좋은 동역자가 있었으며, 웨슬레에게는 휫필드, 무디에게는 토레이 박사가 있었다. 어쩌면 한 시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사람들이 동시에 함께 나타나 좋은 동역을 한 것이다. 여기서 바락의 좋은 점은 자신이 할 일과 드보라의 역할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따랐다.
바락은 8절에서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라고 조건을 내걸었었는데, 이는 서로 의뢰하는 좋은 동역을 보여준다. 우리는 드보라와 바락의 예를 통해 영적 전쟁에서는 각각 위치를 지키고 은사에 따라 동역해야 함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좋은 동역이 큰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10절에서 스불론과 납달리를 부른 것은 바락이다. 그가 부를 때 일만명이 따라 나왔다. 그 일을 하는데 적격은 바락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일은 드보라의 말대로 됐다. 드보라의 말은 하나님의 계시였고, 바락은 그녀의 계시와 은사를 십분 존중했다. 드보라 또한 바락의 요청대로 그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함께 게데스로 올라갔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승리한 영예로운 사사들을 언급할 때 기드온, 삼손, 입다와 함께 오히려 바락을 언급했다(히 11:32).
4. 야빈의 군대장관은 시스라였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시스라의 군대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내라 하였고 거기서 그들이 전멸되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시스라가 바락이 아닌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임도 알려줬다. 즉 드보라는 전쟁을 하기 전에 전쟁의 전개와 결말에 대해서 분명한 그림을 갖고 있었다. 이는 이 일이 하나님의 계시로 인함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사람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계시는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과 관련된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의 지혜로움보다 낫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강함보다 낫다(고전 1:25). 드보라는 바락의 말을 듣고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전투하러 올라갔다. 드보라는 삼국지의 제갈량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천하의 제갈량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