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문제를 가지고 나는 몇 주간을 고민했다. 박원순 변호사나 나나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운동가다. 나는 89년에 경실련을 창립했고 박 변호사는 94년에 참여연대를 창립했다. 이념적으로는 달랐지만 부정부패반대, 경제정의 실현, 시민참여, 지방자치 등의 점에서는 생각을 같이 했었다. 그런데 내가 박 변호사 반대에 앞장선다면 이 얼마나 면구스러운가, 그리고 인간적으로 못할 짓인가? 더구나 박 변호사는 한참 후배인데 후배를 돕지는 못할망정 이게 무언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나라가 잘못되는 것을 막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원순 변호사는 소신있게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는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左傾(좌경)·左翼(좌익)을 배제하는 국가는 극우독재정권”이라고 했다. 그리고 ‘左傾’ 속에서 자유민주체제를 보완하는 긍정적 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주장이 다른 나라에서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니다. 한국처럼 세계에 유례없이 종북좌파가 창궐하는 곳에서는 국가보안법 없이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아무리 바빠도 왜 한국에 종북(從北)좌파가 창궐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겠다. 이것은 오랜 군사독재가 남긴 후유증이다. 엄혹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학생운동은 강고한 투쟁을 위해 흑백이념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했다. 그런데 한국에 맞는 이념이 없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은 한편으로 맑스레닌주의(ML)로, 다른 한편으로 김일성 주체사상론(NL)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념논쟁을 했다. 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주체사상파가 학생운동의 주류가 되었고 이 세력은 87년 민주화대항쟁의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승리의 경험을 한 주사파는 기세좋게 사회 각 분야로 진출했다. 시민운동을 좌파로 만들고, 교사가 되어 전교조를, 노동자가 되어 민노총, 민노당을, 기자가 되어 언론노련을 만들었으며 나아가 학계, 정관계, 법조계 등 사회각계로 진출했다. 이들은 규모도 3-40만명이 되는 대한민국 최대의 세력이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마다 反美, 反韓 투쟁을 전개해 왔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2년 미선이 효선이 촛불시위, 2005년 맥아더 동상 철거시도 사건이고 그 후에도 평택 미군철수촉구시위, 한미FTA반대투쟁, 광우병촛불시위, 희망버스, 제주도해군기지건설반대 등 다양한 투쟁을 전개해 왔다.
금년 6월30일 수원지방법원 제410호법정에서 종북까페인 ‘사이버민족방위사령부’ 운영자인 황길경 피고는 국가보안법위반 재판을 받으면서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 만세”를 외쳐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또 8월20일에는 서울시청 앞에서 보수대학생단체가 북한인권 고발 다큐멘타리 영화 '김정일리아'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철폐 등을 주장하며 서울 숭례문에서 집회를 마친 희망시국대회 시위대 4천명이 서울광장으로 몰려와 전선을 끊고 영화관람을 중단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사태들은 종북좌파세력의 기세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어떻게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란 말인가? 국보법 폐지가 소신인 서울시장을 선출하란 말인가?
박원순 변호사는 2002년말 미선이 효순이 촛불시위를 주도했다. 그런데 미선이와 효순이의 죽음은 단순한 교통사고다. 장갑차가 미선이와 효순이를 보지 못하고 치은 것이다. 그러나 한총련, 민노총 등 친북좌파들은 이 사건을 성조기를 불태우는 반미운동으로 발전시켰다. 박원순 변호사는 원래 친북좌파가 아니다. 그래서 사실은 박 변호사가 한총련과 민노총을 비판하고 이들과 거리를 두었어야 맞다. 그래야 시민운동 지도자로서 옳은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 변호사는 이들 친북좌파와 손을 잡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반미운동을 전면에서 이끌었다. 박 변호사는 거대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종북좌파의 파도 앞에 결연히 맞서는 대신 그냥 그 파도 위에 올라타고 말았다. 그 결과 한국의 시민운동 주류는 거대한 종북좌파의 앞잡이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세상사람들이 반미친북세력을 규탄할 때 시민운동도 함께 규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때 박원순 변호사가 김지하선배처럼 이들을 질타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박 변호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러한 박 변호사가 2005년 9월 맥아더동상 철거시도사건에 대해 침묵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6.25때 김일성에 의해 통일되었어야 했는데 맥아더 때문에 통일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3천명이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 했던 이 사건은 우리사회에 친북좌파가 얼마나 강력하게 포진되어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나는 이들이 누구인지 조사했다. 그랬더니 전교조, 민노총, 민노당, 한총련, 전농, 범민련, 통일연대, 민중연대, 진보연대 등의 세력이었다. 나는 박원순, 한완상 등 시민단체 지도자들에게 메일을 보내어 맥아더동상 철거사건에 대한 입장을 질문했다. 그런데 아무도 답변을 주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모습을 보고 나는 우리나라 지식인사회가 얼마나 취약한가를 절감했다. 그리고 나라도 소신있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용기가 부족했다. 틀림없이 후배들이 나를 꼴통보수라고, 변절자라고 비방할 것이다. 한 달을 고심하다가 꼴통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애국심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친북좌파 척결이 시대정신이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운동권 후배들로부터 꼴통보수라고 비난받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김정일 세력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꼴통보수가 된다면 나는 이제부터 자랑스런 보수가 되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때를 되돌아본다. 만일 그때 박 변호사가 이들을 비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지금 나는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 변호사는 반대하는 대신 이들 친북좌파와 굳건하게 연대했다. 박원순 변호사는 세련된 시민운동가다. 그래서 그동안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 희망제작소를 통해 광범위한 지지층을 구축해 왔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활동들도 그의 엄청난 과오를 덮을 수 없다.
그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 온 좌파지도자다. 그가 초대 이사장을 지낸 역사문제연구소의 학자들은 左편향 고교 한국사교과서 집필에 대거 참여해 온 좌파학자들이다. 또 그가 공동운영위원장으로 일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국가보안법 폐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이라크 추가파병 중단,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 등을 주장하며 좌파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강정구교수와 함께 2003년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추진위원회’를 만들어 곽동의(한통련 의장), 송두율교수 등 해외 親北(친북)인사들의 귀국을 추진하고 “반국가단체 한민통·한통련 합법화” 및 “容共(용공)조작 도구인 국가보안법 즉각폐지”를 주장했다. 그리고 최근에도 민노총, 진보연대 등 좌파단체들이 주도한 ‘제주해군기지 건설중단을 촉구하는 각계인사 선언’에 적극 참여했다.
박원순 변호사가 일관되게 보여준 모습은 대한민국에 대한 일관된 폄훼(貶毁), 헌법파괴자들에 대한 편향된 옹호(擁護), 북한 인권에 대한 방관(傍觀), 북한 정권의 惡行에 대한 묵인(黙認)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국가보안법 철폐·주한미군 철수·연방제 통일이라는 북한정권의 대남赤化전략을 추종하는 단체를 일방적으로 옹호해 왔다. 남한사회는 美제국주의 식민지이라며 先軍정치를 찬양하고 북한의 공산화 전략인 인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하며 그 일환으로 북한식 연방제 통일을 주장해 온 한국청년단체협의회에 대해서도『국가안보를 위해(危害)하는 행동을 한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변호사 박원순의 시각이다.
반면에 그는 대한민국이 이루어낸 기적적인 성취에는 철저하게 눈을 감고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정치범수용소에서만 20만 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이 수감돼 있고 공개처형·비밀처형·즉결처형이 저질러지고 강제송환된 탈북여성들은 강제낙태·영아살해와 같은 끔찍한 고문을 겪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박원순 변호사는 아직도『폐쇄적 사회이므로 잘 알 수 없다』는 논리에 머물러 있다. 그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비교하면 북한정권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우호적이다. 그가 창립한 참여연대가 천안함 폭침이 북한소행임을 믿을 수 없다고 한 것도, 그가 속한 시민운동이 북한인권문제 제기를 반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박원순 변호사는 종북좌파와 그 동조세력을 중핵으로 하고 안철수 교수 같은 중간층을 우호세력으로 해서 서울시장이 되려 하고 있다. 박 변호사의 정체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의 좋은 인상에 넘어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박 변호사가 시장이 되면 우리는 전교조, 민노총 등 종북(從北)좌파들이 환호작약하는 모습을 보며 살아야 한다. 무상급식 등 복지포퓰리즘에 매몰되어 살아야 한다. 그야말로 나라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게 된다. 이점이 내가 조롱받을 각오를 하고 후배 시민운동가의 앞날을 가로막고 나선 이유다.
그런데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나의 문제제기는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2천년에 박 변호사가 주도한 낙선낙천운동이 시민운동 본래의 철학을 완전히 뒤집었기 때문이다. 처음 경실련의 생각은 낙선낙천운동과 전혀 달랐다. 경실련은 진리는 여론조사나 투표 등 다중의 여론으로 결정되면 안 되고 양식있는 이성적 토론으로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경실련 상임집행위원회는 한 번도 표결로 의사를 결정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낙선낙천운동은 국민의 지지가 높으니 이 운동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 과거 운동권이 민주집중제라 하여 민중의 결정은 전부 옳다고 주장했는데 낙선낙천운동 역시 같은 사고방식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실련式 시민운동은 포퓰리즘 운동으로 대치되었다. 한국사회에서 포퓰리즘이란 말이 낙선낙천운동 이후부터 유행한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다.
또 낙선낙천운동은 잘못된 선거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당장에는 인기가 컸지만 사실은 중대한 실수였다. 한 방에 시민운동이 국민을 향해 법과 질서를 호소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낙선낙천운동의 獨善이었다. 시민운동은 겸손해야 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진리도 자기가 결정하지 않는다. 정보를 국민에게 공개해서 국민이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낙선낙천운동은 법위에 군림하고 스스로 판관이 되어 정의의 잣대를 마음대로 휘둘렀고 자기들이 정한 낙선자명단은 무오(無誤)하다고 하여 일체의 변경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낙선낙천운동은 편향적인 특정정당 지지운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시민운동은 그후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고 시민운동이 권력화되고 내부의 言路가 막혀 낙선낙천운동에 대한 비판이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나도 낙선낙천운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의 상임대표직 취임을 거부당했다.
한국역사에서 낙선낙천운동처럼 크게 홍보가 된 운동이 있었을까? 한달 내내 모든 언론의 톱뉴스였으니 말이다. 어떤 시민운동가는 묘비에 낙선낙천운동을 쓰겠다고 까지 말할 정도로 대성공한 운동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시민운동의 묘혈을 판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후 시민운동은 편향적인 운동으로 간주되었고 시민들로부터 외면당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박원순 변호사는 이 운동의 최대의 수혜자다. 그러나 사실은 시민운동의 몰락의 책임을 져야할 사람이 바로 박원순 변호사다.
이 글을 마치면서 박 변호사에게 부탁이 있다. 나의 문제제기에 대해 진지하게 답변해 주기 바란다. 당신은 김정일 추종세력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맥아더 동상 철거사건과 국가보안법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북좌파들과의 관계를 단절할 용의가 있는지 묻고 싶다. 단절만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당신을 반대하는 일에 나서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