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9] 승리를 독차지하지 않다
삿 5: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1. 이는 여사사 드보라가 지은 것이며(‘나 드보라가 일어났고’―7절) 사사기에서 유일한 승리의 노래다. 그녀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체험하고 노래를 남겨 하나님의 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찬미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찬송은 모세의 노래처럼 그 역사의 현장에서 바로 지은 것이다. 꿀벌처럼 말씀의 풍성 안에 살았던 그녀가 그 위대한 영적 승리의 체험을 거쳤을 때 찬양을 하며 시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1절의 ‘그날에’라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준다. 시간이 지나면 그 찬미의 영감이 식어질 수 있다. 이 찬미에서 드보라의 좋은 점은 실제로 자신이 지은 시일지라도 바락과 함께 노래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위대한 시를 노래하는 데 있어 함께 싸운 바락을 잊지 않았다. 1절의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12절의 “깰지어다 깰지어다…너는 노래할지어다…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라는 구절이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함께 섬기는 사람들의 수고와 업적과 영광을 가로채거나 홀로 독차지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 특히 드보라와 같이 가장 앞선 위치에 있는 인도자는 더욱 그러하다. 가장 앞에 있는 인도자는 언제나 사람들의 주목과 칭송을 받는 일에 부족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함께하는 자들은 곧잘 뒷전에 있는다. 이러한 부분은 앞서 인도하는 사람이 배려해야 할 몫이다.
2. 드보라의 찬미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녀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승리케 하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놀라우신 업적과 공로와 하신 일의 기이함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드보라는 하나님이 그렇게 축복하시고 역사하셔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두령의 좋은 영솔이 있고 백성들의 즐거운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역대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좋은 부흥의 상황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인도자들(leaders)이 있어야 했다. 이는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별도의 인도자가 필요치 않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별도로 인도자가 필요 없다는 관념이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지만 온전히 균형잡힌 관념은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언제나 맡은 자들과 인도자들이 존재해 왔다(고전 4:1, 히 13:7). 성도들과 인도자들이 좋은 관계성 안에서 전진할 때 부흥의 상황이 올 수 있다(살전 5:12-13). 당시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이스라엘의 헌신된 백성들이 한 목표를 향하여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올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3. 부흥과 승리의 역사(진동함)는 여호와로 말미암는다. 지금까지 이 땅에 있었던 부흥의 특징들은 오순절을 필두로 하늘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셨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노력과 힘으로 부흥을 이끌려 하지만 그것은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드보라는 ‘나오시고 진행하신 분’이 여호와시라고 말한다.
나는 1900년대 초에 있었던 중국의 부흥에 대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당시 상황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한 나이 드신 자매님의 간증에 의하면 그 당시 부흥은 어느 누가 설교를 잘 하고 복음을 잘 전해서라기보다는 ‘주님이 시작하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젊었을 때 그 말을 들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 웨일즈 부흥과 그 외의 많은 나라에서 일어난 부흥에서도 그 원칙은 언제나 동일했다. “주께서 세일 산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였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크고 많을 때 그런 상황을 우리는 부흥이라고 한다. 오순절이 그랬다. 하늘로부터의 성령의 강력한 바람이 역사한 것이지 베드로의 뛰어난 설교가 부흥의 원동력이라고 믿지 않는다.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7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 10 흰 나귀를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할지어다 11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1. 드보라가 사사로 일으켜진 때는 에훗 시대 말이며 삼갈의 때 직후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황폐한 때를 드보라는 삼갈의 날과 야엘의 날로 표현했다. 이로써 우리는 드보라의 영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녀는 과연 영적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바락을 머리 삼고 전쟁을 한 것이나 자신의 노래에서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바락을 내세우며 심지어 삼갈과 야엘의 날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우리는 그녀의 겸비를 볼 수 있다. 그녀는 야엘의 날이라고 함으로 야엘을 사사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칭찬했다.
그때 이스라엘의 황폐한 상태에 대하여 드보라의 기술은 이러하다.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이것은 블레셋(삼갈의 날)과 가나안 야빈(야엘의 날)의 압제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말해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대로로 다닐 수 없고 소로로만 다녀야 했다. 일반적으로 나쁜 일을 하는 자들은 골목 어두운 데서 하는데 당시의 대적들은 대로에서 거침없이 악행들을 행하였다는 말이다.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골목길로 피해 다녀야만 했다. 가나안 사람들이 대로에서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욕보이고 탈취하고 핍박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공포의 시간들이었다. 그런 때에 이스라엘에는 관원이 끊어졌다.
교회에서 악이 판을 치고 육체가 세력을 점하며 어둠의 권세가 교권을 장악하면 참된 영적 인도자들은 어딘가로 숨어 보이지 않게 된다. 그 황폐한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합당한 인도자들이 사라졌다. 드보라는 그때 하나님이 자기를 일으키셨다고 선포했다. 물론 하나님이 특별히 일으키신 종들은 겸비하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일으켜진 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시대를 품고 하나님의 대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보라는 말한다. 그때 무리가 새 신을 섬기므로 전쟁이 임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된 원인을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참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기를 그치고 새 신들로 하나님을 바꾼 것이다. 사람에게는 새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바울 사역 당시 우상의 도시 아덴의 사람들은 새로 된 것을 보고 듣는 것 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들이 바울로 하여금 아레오바고에서 설교를 하게 한 것은 무슨 새로운 교에 대한 것이 있나 하는 호기심 때문이었다(행 17:19-21).
드보라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 신들에 혹하여 하나님을 떠나 블레셋과 가나안 왕 야빈에게 20년 간 억눌려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로 인하여 심히 마음 아파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압제당하고 그러한 전쟁을 치러야 했던 것은 그들이 새 신을 섬겼기 때문이라 분명히 말하고 있다. 가나안의 하솔 왕 야빈과 그 군대장관 시스라의 전력은 당시로 말하면 막강하였다. 철병거 900승이라면 오늘날로 말하면 전차나 핵무기를 갖고 있는 것에 비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4만 군대였고(스불론과 납달리는 1만명이었지만 이스라엘 전체에서 나온 사람을 합하면 4만이라는 말이다) 그들 중에는 방패와 창이 없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군에는 창이나 방패가 없었기 때문이다. 드보라는 이를 시적(詩的)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그때에 성문에 전쟁이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전쟁은 시작되었건만 이스라엘 진영은 전쟁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조총으로 훈련되고 장비된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맨손으로, 혹은 겨우 돌이나 약간의 무기로 맞섰던 조선과 같다. 그러니 그 전투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드보라는 방백들이 함께하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한 것에 대하여 감사해한다. 매튜 헨리는 그의 주석에서 드보라의 감사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참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그들은 영원토록 내 마음을 차지할 것이다. 나는 결단코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드보라의 노래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성 사사인 드보라가 이렇게 큰 전쟁에서 이기고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추측하기 어렵다.
그녀는 확실히 영적이고 좋은 느낌을 가졌다. 그녀가 어떻게 여자로서 이스라엘을 재판하는 사사의 일을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이 이 노래에 들어 있다. 과연 그녀는 합당한 영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백들이 함께하고 그들이 백성들 가운데서 헌신적이었던 점을 매우 감사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것은 당시 방백들이 비록 여성 사사였을지라도 드보라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과연 드보라의 감사와 칭찬을 받을만했다.
2. 여기서 드보라는 찬양하면서 또 많은 사람들에게 찬양하는 데에 동참하라고 외친다. 오늘날 찬송시 작자들이 그들의 시에서 산들과 바다와 많은 섬들과 천군 천사를 불러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일깨우는 것과 같다. 그분은 너무 광대하고 위대하신 분이므로 온 천지만물과 모든 사람과 천군천사가 찬미하지 않으면 그 찬송의 질과 양이 너무 부족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나 부자나 귀족들이(흰 나귀를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찬미해야 하고 일반 백성도(길에 행하는 자들) 찬미해야 한다.
11절의 ‘칭술하라’는 히브리어 표현으로서 찬양하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흠정역은 ‘자세히 말하라(rehearse)’로 번역했다. 활 쏘는 자의 지껄임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운 일을 칭술하며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신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고 했다.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어 원래의 평화로운 상태로 되돌려놓으신 업적을 감상하며 찬양하고 있다. 활 쏘는 자의 지껄이는 소리란 지금으로 말하면 점령군들의 대포와 총을 쏘는 훈련장에서 나오는 고함소리에 비할 수 있다. 또 과거 이스라엘이 야빈 군대의 점령 아래 있을 때에는 함부로 물을 길러도 못 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우물가에서 평화롭게 물을 길으며 여유를 누리고 있다. 그래서 드보라는 물 긷는 곳에서 여호와를 칭술하라고 한 것이다.
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평화와 자유를 회복한 광경이다. 성문이란 고대 백성들이 함께 모여 민의를 결정하던 장소였다. 그들이 과거 압제 하에 있을 때는 성문에 모여 무언가를 논의하고 결정한다는 것을 꿈도 꾸지 못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 모든 광경을 처음과 같이 회복한 것이다. 그러니 찬양하고 칭술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특히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칭술하며 그분의 다스리심을 칭술하라고 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대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심을 체험했으며 또 그 다스리심을 체험했다. 그래서 자신이 체험하고 감상한 여호와의 행동들(acts)을 칭술하고자 한 것이다.
3. 드보라는 또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 의로우신 여호와의 일을 칭술하라”고 한다. 대적이 있을 때 이스라엘은 대적들의 강한 위세에 밀려 우물물에도 함부로 내려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제 그 주변에 원수들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원래 엘림에서 물을 마셨고, 족장들은 브엘세바에서 마셨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셨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주기 원하셨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와 성도들의 교제는 생수를 공급하며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대적에게 탈취되고 세상과 연합한 결과는 생수를 얻는 우물이 점령돼 더 이상 평화롭게 우물물을 마실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더 이상 사랑의 우물물을 마실 수 없다. 교회는 마땅히 병들고 가난하고 지친 영혼들에게 생수를 줄 수 있어야 하건만 더 이상 그러한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옛날에는 원수들이 우물물을 막곤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평화롭게 성도들이 우물물을 길을 수 없게 하는 활 쏘는 자들의 지껄임을 갖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대적에게 교회가 상당히 점유된 모습인 것이다. 활쏘는 자들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죄와 육체, 십자가를 거치지 않은 기질들이다. 이런 것들이 성도들의 심정에 불화살을 쏘아대 그리스도로부터 얻는 생수의 누림을 송두리째 앗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 우물에서 물을 길으면서 여호와를 찬양할 수 있게 됐다. 오늘날 건강한 교회 생활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일종의 구원의 물을 길으러 가는 것이다.
이사야 12장의 말씀을 노래해보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리라(2b-4절)
4. 그들은 또한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고 노래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권위와 재판권을 행사하기 위해 성문으로 내려가곤 했다. 이전 야빈의 군대에 점령되었을 때 하나님 백성은 성문에 내려가서 합당한 재판권과 영적인 권위를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할 수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회가 죄와 불법을 처리하고 권징할 수 없는 상태에 떨어졌다는 것은 심각한 타락이다. 이들이 대적에게서 놓여졌을 때 그들은 비로소 성문 집회를 회복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합당한 권위를 갖고 불법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고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성경은 성문으로 내려가는 것을 전장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의미했다. 성도들이 대적에게서 해방됐다면 다른 사로잡힌 자들을 이끌어내고 구원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당시 백성들이 성문에 내려간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