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여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장 11절).”
1. 무한광대하신 하나님
지구는 1억 4900만km 밖의 태양을 하루 한 바퀴씩 자전하면서 365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돌아올 때 비로소 일 년이 된다고 한다. 우주선은 1초에 8Km를 달린다고 하는데 지구의 그 회전속력이 1초에 30Km라고 하니 팽이같이 빨리 돌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밖에서 팽이처럼 돌아가는 지구의 속력을 느낄 수 있는지, 없다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 신기하고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2. 그분의 섬세하신 사랑
이와 같이 무한광대하신 그분께서 참새 한 마리, 들꽃 한 송이도, 바다 속 어린 물고기 한 마리도 생명을 주시는 그 섬세하심이 놀랍고,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시는 세밀하심이 놀랍고, 더 놀라운 것은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들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캄캄한 지하실에서 번쩍 스쳐간 생각 한 조각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신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여자의 난자에 정자가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그 생명을 온 우주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심이 놀랍고, 그 생명에 주신 영혼을 사랑하셔서 멸망하지 않도록 구원의 길을 예비하심이 더욱 감격스럽다.
그분께서 우리 인생을 향해 “너는 내 하나뿐인 독생자를 대신 죽게 희생시켜 너를 구원하였다. 너는 내 독생자를 주고 바꾼 소중한 존재란다” 하고 우리 귀에 쟁쟁히 말씀하심이 또한 감격스럽고 놀랍다.
3. 기도 듣기를 좋아하시는 속성
그분은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기도를 주문하시고 독려하신다. 그분에게 전지전능, 무소부재, 영원하고 거룩하심, 사랑과 공의 등 다양한 속성이 있지만 우리의 기도 듣기를 좋아하신다는 또 다른 속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토록 무한 광대하신 초월자께서 우리의 작은 속삭임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기도를 듣기 좋아하신다는” 이 놀라운 속성이 우리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
여호수아의 간청을 못 이기시고 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하시던 일, 히스기야의 눈물기도를 보시고 뜻을 돌이키시는 마음 약하신 하나님, 소돔을 멸하실 때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듣고 5번이나 망설이시고 아브라함의 기도에 타협하여 뜻을 돌이키시던 그분. “ 나는 저를 도무지 알지도 못한다”고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를 측은한 눈으로 돌아보시던 주님은 어찌 그리 사랑과 선하심이 풍성하신지 그분을 알면 알수록 좋아질 수밖에 없고 그 크신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내 모습에 감격스러움을 고백하게 된다.
4.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버리라
바울 사도께서는 (1)“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고백하시고
(2)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주를 알게 되리라”고 하신다.
(3) 이 성숙한 고백에 앞서 전제하시기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하시며
(4)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소리 나는 괭가리와 같고, 예언하는 능이 있고 모든 지식과 비밀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며, 내가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시며
(5)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이란 “오래 참고 온유하고 무엇이든지(어떠한 경우에도) 참으며 무엇에든지 믿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소망을 가지고 견디는 것”이라 하신다.
시냇가의 심기운 나무가 가뭄에도 시들지 않음 같고, 정금은 그 순수함을 영원히 변치 않음 같이 믿음이 한결같고 성품이 한결같이 주를 닮은 것이 어린아이의 일을 벗는 것이다.
어렸을 때 딱지치기 구슬 따먹기가 성공이었는데, 지금은 지위나 권세, 수천억의 돈이나 부동산을 성공이라고 맘몬의 신을 숭배하고 있지는 않는지 진단해 보고 이제는 그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성공과 가치를 사모해야 한다.
과연 지금 우리를 예수님과 겹쳐 놓는다면 얼마나 그분과 닮았을까. 부모가 친자확인을 했더니 다른 유전자가 나왔다면 그는 자기 자식이 아닌 것처럼 그날에 주님 앞에 우리가 겹쳐질 때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다면 이보다 더 큰 슬픔과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날마다 거듭거듭 착각 속에서 깨어나야 한다. 나는 얼마나 눈멀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벌거벗고 초라한 모습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그 눈(영)이 맑아지면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볼 수 없다면 그는 영적 감각이 마비된 불쌍하고 초라한 영혼이다.
5. 새로운 두 가지 율법
1) 십자가의 법 /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로마서 7장 21절)
“(1)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나 형제나 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좆지 않는 자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3)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해도 내 제자가 되지 못하며, 이를 실천하지 못하면 (4)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아무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눅 14장)” 하신다.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 받기는 쉽지만 그 구원을 성취하고 거룩함(성화)으로 가는 길은 절대로 쉽지 않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내리오!” 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바울의 비명이 들려야 비로소 시작된다.
예수께서 거듭 강조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단계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는 것”이라 하셨는데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십자가는 죄인이 벌거벗겨져 수치를 당하고 마침내 고통으로 죽어야 하는 형틀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거듭 살아 일어나는 정욕과 육신적 자아(自我)를 날마다 거기에 못 박아야 비로소 예수의 생명이 흘러나온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제자가 아니며 아직 어린아이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예수의 생명이 흘러나오게 하는 새로운 십자가의 율법에 우리자신을 적용해야 한다.
2) 성령의 법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육체의 일들, 곧 우상숭배와 탐심과 교만과 음행 등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독버섯이 생산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정상적인 예수의 사람이라면 이성적인 혼(魂)의 생각이나 판단을 버리고 영(靈)의 직관(直觀)을 따라(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결단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기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자기의 욕심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변명라도 합리화하는 비열한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제는 어둠을 밝히는 산 위의 등대가 되고 신선한 맛을 내는 소금의 역할을 회복하자. 그리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가자.
오 주여! 우리 모두 주의 형상을 본받는 자 되게 하소서!
/박승학 목사(칼럼니스트, 기독교단개혁연(aogk.net)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