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27] 삼손의 수수께끼
14:5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지르는지라 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7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며 그를 기뻐하였더라 8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취하려고 다시 가더니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9 손으로 그 꿀을 취하여 행하며 먹고 그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취하였다고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10 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 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하게 한지라 12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 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13 그러나 그것을 능히 내게 고하지 못하면 너희가 내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줄지니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수수께끼를 하여 우리로 듣게 하라 14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그들이 삼 일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 15 제 칠 일에 이르러 그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이르되 너는 네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비의 집을 불사르리라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16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하는도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 17 칠 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 18 제 칠일 해 지기 전에 성읍 사람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한지라 삼손이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 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 하니라 19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20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 되었던 그 동무에게 준 바 되었더라
1. 어떤 사람들은 5절에서 삼손의 부모가 함께 딤나로 내려갔는데 삼손이 사자를 만나 찢어 죽인 것을 부모가 알지 못했다고 말한 것을 놓고 이 사건의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하는데, 부모가 삼손과 함께 딤나에 간 것이 한 가지 사건이고 삼손이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 것이 또 하나의 사건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부모가 딤나에 함께 간 것이 사실이지만 포도원에는 삼손만 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손의 첫 번째 은사의 표출이다.
어린 사자란 젊은 사자(young lion)로서 완전히 자란 힘이 가장 좋은 사자를 말한다. 삼손은 포도원에 나타나 그를 향해 표호하는 사자를 염소 찢듯 찢었다. 이는 삼손이 장차 이스라엘을 위하여 블레셋을 찢을 것을 암시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신구약 성경 많은 곳에서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셨고 대적을 사자로 비유하셨다. 어떤 사역자는 송곳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언젠가는 찌르는 일이 있다고 하였다. 성도가 가진 은사는 언젠가 나오게 되는 법이다. 삼손은 그의 은사가 사자를 찢는 일로 표출되었다. 이는 그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2. 삼손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였지만 부모에게 그 일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 아내 될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죽은 사자에게서 꿀이 나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죽은 사자에게서는 부패한 것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자에게서는 먹을 수 있는 꿀이 나온 것이다. 삼손은 그것을 먹고 부모님에게도 가져다 드렸다. 우리는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을 듣는데, 꿀에 대하여는 이곳에서와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 때에 땅에 흐르는 꿀을 먹었다는 기록을 볼 뿐이다(삼상 14장 참조).
그런데 이 두 곳에서 공히 꿀은 싸워 이기는 때 주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나안의 꿀과 양식이 싸워서 이긴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손의 참된 양식은 대적을 찢을 때 거기서 나왔으며 삼손은 이 일에서 이것을 배워야 했다(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삼손은 잘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가나안의 대적들을 그들의 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의 양식은 대적과 싸워 이긴 데에서 생겨난다.
꿀은 말씀의 맛이다. 참된 말씀의 공급은 대적과 싸워 이길 때 얻을 수 있다. 그런 양식만이 남을 공급할 수 있다. 말씀의 참된 공급은 생활 가운데 승리하는 많은 일들을 통해 주어지며, 그럴 때 강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도 채워줄 수 있다. 삼손은 자신만이 아니라 부모에게도 꿀을 갖다 드렸다. 부모는 먹으면서도 그 꿀이 어디서 나왔는지 몰랐다. 그가 만일 이 원칙을 알았더라면 더 많은 양식을 먹었을 것이고 더 많은 대적을 쳐부수었을 것이다. 삼손은 그 꿀의 출처도 부모에게 고하지 아니하였다.
3. 이런 투쟁들, 즉 삼손이 소리 지르는 어린 사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사건들은 성도들의 신앙 초기에 임한다. 즉 그것들에 대하여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 임하는 것이다. 당시 삼손은 야생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훈련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성도들이 주님 안에 들어와 그것들에 대하여 전혀 대비되어 있지 않을 때 어린 사자가 물어뜯으려 대드는 것이다.
“삼손이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5절). 이 일은 전혀 예상치 않은 삼손에게 기절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는 사자에 대하여는 전혀 예상치 않고 딤나의 포도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삼손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이것은 그를 사사로 키우는 첫번째 냉혹한 훈련이었다. 이런 시련은 삼손을 강한 사사가 되는가, 아니면 무너지고 끝나는가를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삼손에게는 아무 무기도 대비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 것도 없으니 싸울 수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거기서 끝나면 삼손이라는 사사는 이스라엘 역사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이 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새끼를 찢음같이 찢었도다”(6절). 우리가 싸울 때 성령이 도우신다면 친구도, 무기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홀(Hall) 주교는 이런 말을 했다. “으르렁거리는 사자가 계속 잡아먹으려고 돌아다닐 때 우리가 포도원 가운데 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우리의 소망과 힘은 우리의 빠른 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무 무장도 없고 우리의 손은 너무 나약하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망과 힘은 하나님의 영께 있음이니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싸우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 안에 우리를 대적하고 있는 사자보다 더 강력한 사자가 있다.”
그는 유다 지파의 사자인 것이다(계 5:5). 바울은 늘 이렇게 승리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언제나 의인의 길에는 고난이 있는 법이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리더라도 원수가 삼키러 올 때, 아무리 대적이 사납더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다만 용감한 담력을 갖고 삼키려고 소리지르며 오는 어린 사자를 대적하라!
하나님이 어린 이기는 자 후보생들에게 이런 일을 주는 것은 그들로 달콤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위해 쟁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일이 우리에게 달콤한 꿀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인내와 온전케 함과 은혜가 이러한 시련을 통해 온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안다. 우리가 만난 고난들, 우리가 거치며 체험하며 승리한 경험들은 우리가 남에게 공급할 수 있는 달콤한 꿀을 생산한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에서 전혀 고통을 맛보지 못한 자들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라”(약 1:12).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싸워서 얻은 풍성한 꿀이 저장되어 있다. 많은 앞서간 성도들이 이렇게 싸워서 꿀을 예비한 것이다.
4. 삼손은 꿀을 얻은 직후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부모님에게 꿀을 가지고 갔다. 우리가 먼저 이겼다면 우리는 먼저 가장 가까운 자들에게 꿀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삼손은 그런 꿀을 전달해줄 때 아주 겸비한 태도로 전해주었다. 그는 “내가 달려오는 사자를 죽이고 이 꿀을 얻은 것이라” 광고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음과 진리와 생명을 공급할 때, 내가 얻은 꿀을 공급할 때 매우 주의해야 한다. 다만 우리 속에서부터 나오는 기쁨과 행복(꿀)을 드러내며 말해주어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은 많이 말해도 좋으나 우리가 주를 위해서 한 일은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삼손은 자기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조차 그것은 그가 죽인 사자에게서 얻었노라고 자랑하며 꿀을 전달하지 않았다.
우리가 성령의 기쁨이나 위로를 갖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전달하기를 배우면 좋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사자는 그만두고 생쥐 한 마리를 죽이고도 대서특필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전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겸손하게 여러분의 손에 사랑의 꿀을 들고 나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기 바란다. 따라서 여러분이 영혼의 투쟁을 겪게 될 때 여러분의 고민을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공표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용감히 싸우고 그 승리로 얻은 기쁨과 성령의 소식을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라!
5. 당시 풍습에 따라 삼손은 그 여자의 집에서 잔치를 하였고 블레셋 청년 삼십명이 혼인 집 친구들이 되었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혼인이 예사로운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삼손은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었는데, 수수께끼에서 지는 쪽이 베옷 삼십 벌과 속옷 삼십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삼손이 낸 수수께끼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기간은 칠 일이었다.
삼일까지 그들이 풀지 못하고 칠 일이 되어도 풀지 못하자 그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남편을 꾀어 그 수수께끼를 알아내라고 하면서 그러하지 않으면 너와 너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그들은 옷 한 벌씩 생길 것을 기대하다가 오히려 물어주어야 할 입장이 되자 매우 불쾌하게 변한 것이다.
결국 그들의 사주를 받은 아내는 울면서 삼손에게 졸라댔고 삼손은 부모에게도 알리지 않은 수수께끼의 비밀을 아내에게 말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아내는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결국 삼손이 진 것이 되었다. 삼손은 그들이 자기의 암송아지(그의 아내)로 밭을 갈아 답을 알아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하였고 삼손은 아스글론 땅에 가서 사람 30명을 쳐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삼손은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갔다. 그때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 되었던 사람 중 하나에게 준 바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삼손에게 그들을 치고 공략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삼손의 방법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유치한 것 같아도 사실 블레셋 사람들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매우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공격한 것은 사실상 물질적인 탐욕에서였다. 그러나 밖으로는 그런 속셈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 수수께끼 사건이 그들의 탐욕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이 수수께끼에 참여한 것은 옷을 얻고 싶어서일 뿐 삼손에게 무언가를 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마 이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좋은 친구로 여기고 서로 혼인도 하면서 잘 지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손은 그들과 이스라엘간의 관계의 실상을 드러내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먹이로 생각하였고 삼손은 그들을 먹이로 생각하였다. 그 수수께끼는 삼손의 먹이(사자)에서 단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삼손의 음식은 실상 블레셋이었고 그들을 쳐서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언제나 꿀과 같은 말씀을 얻는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물질적인 것을 취하려 했다. 그들은 비록 놀이일지라도 조금도 삼손에게 주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옷을 삼십 벌씩 요구한 것이다. 받으려는 블레셋 사람 위주로 수수께끼를 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상은 숨겨져 있었다.
많은 경우 거짓과 위선은 숨겨져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비로소 그 내면의 진상을 알 수 있게 된다. 삼손의 수수께끼는 그들의 감추인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삼일이 되어도 알아내지 못하고 칠일이 되어도 알아내지 못하자 그 아내를 협박했다. 남편에게서 알아내어 주지 않으면 그와 그 집을 불사르겠다고 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조금도 삼손(피정복민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블레셋은 취해야 했고 이스라엘은 바쳐야 했다. 그들은 삼손의 아내에게 “너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고자 하여 우리를 청하였느냐”고 했다.
결국 그들을 좌우하는 것은 탐욕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불공평하게 빼앗고 탈취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채 하며 우유부단한 상태에 있었다. 많은 세월이 그들을 이렇게 동화시켜버린 것이다.
사실 고린도 교회도 그런 상태에 있었다. 이단적인 교사들이 그들을 때리고 잡아먹고 삼키고 하는 데도 성도들은 그들을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라면서 계속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삼손은 이런 현실을 매우 통분히 여겼다. 실상 선지자들이 아니면 자신들이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 현실을 알지 못하는 수가 많다. 당시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에게 당하면서도 그들을 용납하고 있었다. 바울만은 그러한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삼손의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준 것은 또 한 번 삼손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언제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렇게 무시하였다. 어떻게 하든 자기 민족 사람들이 우선이고 이스라엘은 차선이었다. 이것이 대부분 정복자들의 피정복자들에 대한 사고방식이다. 주는 것 같지만 진실로 주는 것이 아니고 양보하는 것 같지만 참되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참된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취해야 할 존귀와 영광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15장에서 삼손이 다시 가서 아내를 달라고 하자 그 동생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정복자의 자세다. 이스라엘을 문화적으로 흡수해서 한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블레셋은 은연중에 이스라엘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내비치었던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강압적인 정책은 언제나 그들이 우선이고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은 그들 차지였다.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 순응하도록 그들을 달래고 어르는 방식을 취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정책에 동화되어 버렸다.
신약의 하나님 교회에는 이와 같은 니골라당의 행위가 없어야 한다. 주님은 자신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다고 하셨다. 니골라당이란 일반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을 말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모든 성도들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력으로 수수께끼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협박과 폭력으로 나왔다. 실상 그것이 그들의 현 주소였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을 지배하며 억압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30명씩이나 이스라엘 사람의 혼인집 친구가 되어주는 등 매우 융화가 잘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결코 기득권의 위치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렵게 되면 그 위치를 사용하는 것이다.
16절에서 삼손의 아내가 자기 민족을 언급한 것은 이 문제가 민족간의 문제임을 시사한다. “우리 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는도다”. 그들은 삼손의 결혼식에도 오고 매우 친밀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수수께끼도 하고 서로 좋은 화목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의 민족의 우위성과 집권을 전제로 한 화목인 것이요 친교인 것이다. 실상 블레셋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을 탈취하여 자기 민족을 배불리려는 욕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40여년이 지나면서 이런 실상은 교묘하게 은폐되어 가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 속임수 속에서 진정한 해방과 구원을 찾지도 않게 되었다. 이것은 사단의 고단수 공격이다.
삼손은 이런 상황속에서 그러한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과 혼인 잔치를 통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들의 참된 상황을 수수께끼를 통해 분명히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그들 중 삼십 명은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그러한 악함과 불법에 대한 응징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그의 결혼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