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28] 나귀 턱뼈로 3천명을 죽인 삼손
15:1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가로되 내가 침실에 들어가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 가로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 그 동생이 그보다 더욱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의 대신에 이를 취하라 3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 홰에 불을 켜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으로 몰아 들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감람원을 사른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가로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혹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취하여 그 동무 되었던 자에게 준 연고니라 블레셋 사람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비를 불사르니라 7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은 후에야 말리라 하고 8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
1. 삼손이 아내에게 염소새끼를 가지고 간 것은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지난 번 삼손은 아내의 배신으로 수수께끼에서 지게 되었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삼십 벌의 옷을 노략하여 혼인집 친구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는 노하여 아비 집으로 갔다. 여기서 삼손은 다시 아내와 화해할 목적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아내의 아버지가 이미 그녀를 지난 번 잔치에 참석했고 어쩌면 수수께끼에 참여했을 한 남자에게 주어버렸다. 장인이 보기에 비록 삼손이 힘이 장사라고 하지만 그들(블레셋)이 더욱 세력이 있고 의지할 만했을 것이다. 또 그들에게 자기의 딸을 맡기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장인은 다시 찾아온 삼손을 들어오지 못하게 거절하면서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로 내가 생각한 고로 그를 네 동무에게 주었노라”고 하였다. 어쩌면 그 동무라고 하는 자는 수수께끼의 일로 그녀를 접촉하여 압박하고 겁을 주던 자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장인은 힘이 강한 삼손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으므로 타협적으로 동생을 취할 것을 제의했다.
2. 삼손은 지난번보다 이번이 블레셋을 치는 데 더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확실히 삼손은 블레셋을 치려는 한 가지 일에 결혼의 목적을 두었다. 삼손은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여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홰에 불을 붙여서 곡식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이 있는 밭과 감람원으로 여우들을 몰아넣었다.
그는 매우 희한한 방식으로 일을 했다. 여우 삼백 마리를 어디서 어떻게 잡을 수 있었을까? 어떤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여우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겠는가? 이는 삼손의 범인(凡人)을 초월하는 능력을 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블레셋을 벌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었다. 그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고 이스라엘에게는 블레셋을 징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시사하는 방식으로 일하였다.
삼손이 여우들을 사용한 것은 또한 그들의 일하는 방식이 여우 같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들이 그의 아내를 이용하여 수수께끼를 맞춘 일이며, 삼손을 무시해도 될 만한 상황이 오자 그 아내를 친구에게 주어버린 일이며, 더욱이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방식은 다 여우같이 교활한 것이었다. 삼손은 여우꼬리를 묶어 홰를 달아 불을 붙여 곡식밭에 들여보냄으로 그들 속에 있는 습성과 그들의 실행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었다. 즉 블레셋이 이스라엘에게 하는 모든 일이 여우처럼 교활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우처럼 이스라엘의 곡식밭을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삼손은 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간교한 술책을 이러한 모습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이상한 행동 하나 하나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블레셋 사람들은 곡식밭과 감람원의 큰 화재로 인한 손실을 입자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를 물었고 삼손의 장인 가족이 삼손에게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그들은 그 아비와 여인을 불살라 버렸다. 이 일은 다시금 삼손에게 보복할 길을 제공했다. 결국 삼손은 원수를 갚는 양으로 많은 블레셋 사람을 쳐 죽였다. 그리고 에담 바위 틈에 거했다.
9 이에 블레셋 사람이 올라와서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편만한지라 10 유다 사람들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오기는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11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관할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12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려고 이제 내려왔노라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친히 나를 치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13 그들이 삼손에게 일러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붙일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1. 삼손의 블레셋에 대한 보복이 점점 심해지자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 레히라는 곳에 진쳤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은 그 전쟁의 원인이 삼손에게 있음을 알고 삼천 명이 동원되어 삼손을 잡으러 왔다. 용맹을 자랑하던 유다 사람들이 이젠 완전히 날개가 꺾여 자기 나라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사를 잡아 대적에게 넘겨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극한 타락의 국면이다. 이들 눈에는 자신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가 대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대적의 편이 되어 하나밖에 없는 자기편의 용감한 장군을 적군에 넘겨주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독립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블레셋의 편에 있었던 것이다.
삼손은 그들에게 진솔하게 대답했다. 그는 자기가 큰 애국자로서 자기 나라를 위해 이렇게 일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고 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그러자 그들은 삼손에게 그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겠다고 하였고 삼손은 그들이 친히 자기를 치지 않겠다고만 맹세해달라고 했다. 이는 삼손이 자기 동족에게는 어떤 원한이 없으니 그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였다. 그들을 구출해내기 위해서 그는 어찌하든지 블레셋과 싸워야 했다. 유다 사람 3,000 명은 블레셋과 싸우려는 정신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자기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장군을 붙잡아 적에게 넘기기에 급급해 있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과 매우 흡사하다. 삼손 때 이미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팔리고 동족에게 잡히어 이방 군대에게 넘겨지는 그림을 은은하게 보여주고 계셨다.
2. 삼손은 사실 유다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는 그런 힘이 있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는 동족 형제들에게 순순히 잡히었다. 결박을 당했으며 대적에게 끌려갔다. 이 또한 우리 주 예수님과 같다. 주님은 실상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을 불러서 로마군을 물리치심으로 그 상황을 바꿀 만한 충분한 힘을 갖고 계셨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다. 그와 같이 삼손은 자신의 능력을 동족 형제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으며 다만 그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순순히 잡혔다. 그는 더 많은 이리와 여우를 잡기 위해 어린 양처럼 잡힌 것이다. 그들은 새 줄 둘로 그를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끌어내었다.
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16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17 말을 마치고 턱뼈를 그 손에서 내어던지고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
1. 유다 사람들은 삼손을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데려갔다. 블레셋 사람들은 묶여져 있는 삼손을 보고 잡으려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때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의 권능이 임하여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삼손은 나귀의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여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였다. 나귀의 턱뼈는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결코 싸우기에 좋은 무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하찮은 도구로 일천 명의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인 것이다.
관건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가에 있지 우리의 가진 도구나 솜씨나 재능에 있지 않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때 우리의 가진 도구나 재능이 보잘 것 없어서 하나님의 일에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나귀의 턱뼈로도 큰 일을 행할 수 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명을 죽인 일이 있다(3:31). 여기서 나귀의 턱뼈나 소 모는 막대기는(우리의 가진 것이나 재능)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큰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2. 그는 일천 명을 죽이고서 간단하게 스스로 자축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마치 고린도 교회를 사역하던 바울이 스스로를 천거하고 칭찬할 수 밖에 없었듯이 삼손이 그러했다. 이때 이렇게 많은 대적을 죽이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스라엘의 여자들이나 젊은이들이 노래하고 칭송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도 그의 일에 관심이나 호의를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외로운 시대의 외로운 사사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신 큰 역사를 홀로 찬미하고 기념했다.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에 있던 나귀의 턱뼈를 내던졌다. 나귀의 턱뼈 자체가 큰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능력과 승리는 여호와의 것이다. 레맛레히란 ‘턱뼈의 산’이라는 뜻이며 그 승리를 기념하는 이름이다.
3. 삼손은 싸울 때에는 기세 좋게 일천 명을 쳐 죽였지만 일을 다 치른 후엔 충족한 은혜가 없었다. 이는 외적인 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한계이다. 내적인 은혜가 결여된 채 주님을 위해 이런저런 많은 일을 하다 보면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는 수가 있다. 그는 목마름의 정도가 극심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는 주님께 부르짖었다.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그는 주께서 그의 손으로 큰 구원을 베푸셨지만 이제 목말라 죽을 지경에 처했다고 부르짖는다. 그는 블레셋을 대항해서는 용맹하였고 얼마든지 그들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으나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이 큰 능력을 행하고 많은 일을 하지만 자신의 영성을 부지하는 데에는 속수무책이어서 넘어지는 수가 있다. 밖으로는 큰 일을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정작 자신은 곤고하고 공허하고 좌절하고 어두워짐으로 큰 낭패를 보는 것이다. 삼손은 목말라 죽으므로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떨어질 것을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삼손의 간구를 들으시고 레히에 우묵한 곳을 터치시어 물이 솟아나게 하심으로 갈증을 해소시켜 주셨다. 그러자 삼손은 정신이 소생되었다. 그 샘의 이름을 ‘엔학고레’라 했는데 이는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그 필요를 채워주신다. 당신은 많은 주의 일을 한 연고로 곤고한가? 부르짖으라! ‘엔학고레’의 공급이 있을 것이다.
4. 그렇게 삼손을 무시하던 이스라엘도 결국은 삼손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는 20여 년을 사사로 지내었다. 이때는 블레셋의 때로서 어떤 이기는 자든지 그 시대의 대적을 알고 이겨야 한다. 즉 그 시대의 이기는 자는 블레셋을 알고 그 대적을 이기는 것이다. 신약의 교회의 이기는 자들도 요한 계시록 2, 3장에 의하면 그 여러 양상의 상황을 이기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