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31]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4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5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 에브라임 산지라면 팔레스타인의 거의 중심부다. 이 지파 경내에 실로의 장막이 있었고(그렇게 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곳에 법궤가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실로로 가야 했다(삼상 1:3). 그러나 미가는 결론적으로 자기 집에 신당을 만들어 다른 경배 장소를 만든 것이다. 이것은 종교적 타락의 형태다. 이것은 교회 분열의 씨앗과도 같다. 분열의 씨앗은 사람이 제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나오며, 특히 물질적인 욕심 때문에 생겨난다. 미가의 어미는 자기가 모아놓은 돈으로 자신의 집에 신당을 만들고 종교적인 많은 일들을 돌보아줌으로 자식의 생계 문제와 장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깊이 파고 들어가면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분열의 원인이다.

신약에도 교회의 통일성에 관한 문제가 있었다. 사도는 ‘몸(교회)이 하나’라고 정의하면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든 한 주님만 섬기고 예배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미가의 산당에 가서 제사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유일한 장막인 실로에 있는 것과 유사한 제사장도 있고 에봇도 있지만 실상은 우상들(은 신상과 드라빔)이 있다.

그들은 왜 그런 신당을 만들었는가? 어미가 자식의 장래를 생각해서 종교적인 일을 통해 돈과 명예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 어미의 자식에 대한 각별한 애정(아들을 위하여 신상을 만들었음―2, 3절 참조)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어미는 축복할 줄도 알고 저주할 줄도 알며 여호와께 무언가를 거룩히 구별하여 드리는 것도 아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종교심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기 집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경배의 중심지가 되기를 원했고, 자식들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 돈을 들여 신상만 만들어 놓으면 그 목적이 이루어지리라 본 것이다.

이는 당대의 타락상을 보여준다. 성경은 말씀 말미에 이 구절을 추가했는데, 이는 사사기의 타락의 상황을 단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절)”. 어미와 아들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행습과 열심만 생각하였지,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지는 묻지도 않고 주의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물질을 여호와께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자기 집에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제사장을 세워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인가는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었다. 오늘날에도 은혜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헌신하고 많은 것을 드릴 수 있지만 경배의 중심지를 만드는 문제는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열과 부패가 가속화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무질서의 상황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사사시대를 마감하는 엘리 제사장 시대에 블레셋의 침공을 막아보려 법궤를 내어왔다가 빼앗긴 뒤 사무엘이 라마 자기 집에 단을 쌓은 것을 볼 수 있고 또 기브온에 큰 산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왕상 3:2-4). 이 일 후에는 예배가 반드시 실로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장소 개념보다는 영적 개념으로 바뀐 느낌이 있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는 실로에 법궤와 함께 장막이 있었던 고로 그런 정해진 장소 외에서 제물을 드리고 경배를 드리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았다. 이런 산당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와 그 땅 백성의 영향을 받고 각처에서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신명기에서는 계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경배의 중심지는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임을 말씀하신다(신 12:8-14 등).

오늘날 경배의 중심지에 관한 문제는 매우 혼란스럽다. 어떤 사람들은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붙잡고 어찌하든 모여서 경배를 드리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집이든 어디든 주님을 찬미하고 예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경배의 중심지다. 그 예배가 하나님 백성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혼란의 일부인가, 한 몸의 위치에 서 있는 교회의 일부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나는 사무엘이 라마에 쌓은 단과(삼상 7:17) 그 산당이(high place) 비록 실로의 장막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종교적 통일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 장소에서의 활동을 용인하시고 역사하셨을 것이다.

온 땅의 모든 족속, 모든 민족들이 다 주 예수를 믿고 주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 그 안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차별이 없고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된 것이다(고전 12:13, 골 3:11). 종과 자유자의 차별도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한 몸의 위치에 있지 않은 종파의 위치를 견지하면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분열의 떡을 떼는 것이요 따라서 죄와 육체이다(갈 5:19-20). 우리는 마땅히 몸을 분변함으로 떡과 잔에 참여해야 한다(고전 11:27-30). 그렇지 않으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유월절을 지키고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는 등의 구약의 일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특히 에베소서 4장은 몸(교회)의 통일성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온전한 신앙은 개인적으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를 넘어 교회의 통일성 문제까지도 망라해야 한다. 여기에 필수적으로 경배의 중심지 문제가 합당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오늘도 어떤 사람은 미가의 신당에 가서 경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육체의 일이요, 종교적 혼란의 극치인 것이다. 백성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 섬기는 것이다. 가인이 이렇게 자신의 생각대로 제물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열납을 받지 못했다. 이것이 사사시대의 종교적 타락이다. 누가 오늘날의 상황을 사사 시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교회의 통일성 문제를 조금 더 보자.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선교회를 만드는 등 많은 일을 할 수 있어도, 교회를 세우는 일은 조심하고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이는 미가의 경우처럼 또 하나의 분열적이고 혼란된 경배의 중심지를 만드는 일에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대처럼 교회의 보편성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때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는 것에 관하여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My Church)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하셨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교회(Our church), 내 교회(My church)라고 말한다. 내가 몸담고 있으니 우리 교회 혹은 내 교회라 부르는 것이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교회, 하나 뿐이다. 유일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고 생명 되시고 내용 되신 교회인 것이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이다(고전 12:12).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해 교회는 내 교회, 네 교회가 없고 오직 주님의 교회(not my church but His Church)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열심과 헌신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성령께서 친히 세우셔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성령께서 친히 사도들을 통해 교회들을 세워 나가시는 것을 본다. 사도들은 그들의 일이 성령과 하나되어 하는 것이라 했다(행 15:28). 어떤 일에 대해 ‘성령과 우리’가 결정하여 행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일에 불과하다. 주님께서 보내신 사도와 선지자들에 의해서만 교회가 세워지고 양육을 얻을 수 있다(행 13장, 엡 2:20-21). 교회는 사람의 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은 여전히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엡 4:3).

오늘날 선교에 대하여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 윌리엄 캐리가 인도에 갔고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에 가서 선교의 일을 했다. 그들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 선교를 하는데 그의 생계나 자녀들의 교육에 목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복음을 잘 전하고 성경을 잘 가르치는 은사도 있다. 그러다 보니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교회를 세우기도 한다. 겉으로 볼 때는 매우 좋고 주님을 위한 것 같다. 대부분 불순한 목적과 의도는 사람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타인은 물론 자신도 모르는 수가 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복음과 교회와 주님만을 위해서가 아닌 다양한 목적과 뜻으로 나가는데, 간단히 말하면 그러한 선교는 성령의 인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스스로 한 번 해보겠다는 야심과 현실적인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인간적이고도 물질에 목표를 둔 종교 행위는 결국 분열적 경배의 중심을 만드는 일에 사용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합당한 그리스도의 몸을 분변할 수 있는가? 간단하게 말해보겠다. 교회의 문제는 영적인 것이니(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은 영적 실체이므로) 영적으로라야 분간할 수 있다(고전 2:13). 이는 주장하는 교리를 보아서 알 수 없고 인수나 전통이나 표명하는 명칭으로 분변할 수도 없다. 교회란 하나님의 집이요 그분 자녀들의 집인데 집을 찾는 문제에서 어떤 이론이나 주장이나 설득이 필요하겠는가?

아담이 하와를 아내로 취할 때 많은 설명을 통해 알아본 것이 아니다. 그는 보자마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 영적인 일은 영으로만 알 수 있다. 많은 주장과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깊은 내면에 아멘이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영적 지각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요일 2:27). 그러나 분열적인 것들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 몇 마디 해보겠다. 어느 곳에서 예배하는데 갈수록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울타리가 높고 단단하게 생겨나고, 온 땅의 다른 그리스도인에 대한 배타심이 고양된다면 그것은 분열적인 단체이다.

그러한 단체에 갈 때, 그 안의 구성분자들, 특히 리더들에게는 진리보다, 주님 자신보다, 형제보다, 자신의 단체에 대한 유지 보존욕과 애착심이 더 강하다. 그들은 자신의 단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표방하던 진리도 가차없이 흔들고 변개시킨다. 형제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보다는 단체에 대한 보존 열망이 강한 것이다. 실상 교회란 뭉치면 몸이요 흩어 놓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의 형제들이어야 한다. 그 외에 다른 요소가 있어서 단체를 조성하고 이끌고 나아간다면 이는 미가의 신당에 속한 것이다.

다른 많은 이유를 들어 정당화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 단체일수록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자신들만이 옳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틀렸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교회라고 하는 특수한 이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특수한 것은 아마도 은 신상이나 드라빔일 것이다. 성도들은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일생 미가의 신당에 붙잡혀 헛되이 제사장 노릇을 할 수 있다. 미가의 신당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위한 제사장이 아니라, 그 가문을 위한 제사장이다. 이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경계가 되어야 한다.

2. 본문에서 미가는 그 어미의 돈 일천 일백을 훔쳤다. 그 어머니는 그 돈을 아들이 가지고 간 줄 모르고 훔쳐간 사람을 저주했다. 이미 사사 시대에 배금사상(拜金思想)이 있었던 것이다. 그 어미는 돈에 매우 강한 애착이 있었다. 그 돈을 가져간 사람이 어쨌든 동족일 가능성이 큰데도 돈을 가져갔다 해서 저주까지 하는 것은(내 돈 가져간 사람은 죽어버리든지 아주 망해버리라는 식의 말을 했을 것이다) 사람보다 돈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금사상이 우상과 더불어 종파와 혼란을 가져온다. 돈과 관련되지 않은 미가의 신당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늘날 수많은 종파의 나타남은 돈과 관련없는 것이 아니다. 돈과 지위와 권력, 이것이 수많은 미가의 신당을 산출하는 요인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타락의 풍조다. 사도는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한다고 말했다(딤후 3:1). 사람들(믿는 이들을 지칭한 것임)이 돈을 사랑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하면 말씀의 표준에서 떠나고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며 사욕을 만족케 하는 교사들이 많이 나타나고 그러한 교훈들이 세력을 잡게 된다.

성경에 입각한 말씀이라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반드시 바른 가르침, 건강한 가르침(딤후 1:13, 딛 2장)을 받아 지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슨 말씀이든지 성경에 있는 것이면 가르치라고 하지 않고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했다. 여기서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는 것은 원래 ‘건전한 말씀의 표준(standard of sound words)’을 지키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에 좋다고 다 성도들에게 건전한 영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과 성품과 격(格)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그분 자신의 격과 성품과 뜻에 입각하여 양육하고자 하신다. 예수를 잘 믿으면 복을 받고 병을 고치며 이 땅에서 잘 된다고 하는 가르침이 성경에 있는가? 물론 성경에 그런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그런 유의 말씀만을 선호하는 수준(standard)에 머무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한 축복들은 어떤 사람들의 말대로 보너스로 얻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가 되고 백성이 되고 배필이 된 축복은 다만 그런 데 있지 않다.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높고 깊은 말씀의 표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말씀의 수준이 돈 많이 벌고 성공하는 것에 있다면 그것은 사도가 말한바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활동이나 모임을 핑계대고 가정이나 배우자나 자녀들도 돌아보지 않는다. 가령 어떤 아내가 이런 지경에 빠져 어린 자녀나 남편을 저버리고 이 모임 저 모임, 소위 이 봉사 저 봉사한다고 다닌다 할 때 이는 치우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건강한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젊은 여자들이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딛 2:4-5). 바르고 정당한 가르침이 다만 그리스도론이나 삼위일체론에서 빗나간 것으로만 아는 것은 부족하다. 벌써 가까운 사람들과의 보편적인 관계성이나 가정생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이지 않은 불일치의 생성과 괴팍한 편향이 나오며, 생활을 치우치게 만드는 것은 이단적 성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종파적·이단적 성향을 가진 단체일수록 단체의 생성과 보존욕구가 커지므로, 자신에 속한 사람들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배후에는 물질욕과 교권유지욕이 자리잡고 있다.

사도는 말씀의 표준을 말한 다음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받을 것을 권했으며(딤후 1:8)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함께 살고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도들이 전한 말씀의 표준을 보면 분명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전체를 드려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무조건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그리스도 자신의 성품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적인 맥락에 따른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식적으로 대단해 보이는 성경 해설도 그 노선에서 벗어난 것일 수 있다. 그런 것은 자칫하면 성경 말씀보다 해설 자체에 빠지게 한다. 또 어떤 것은 언어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도 있다. 다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

다비(J. N. Darby)는 그의 주석 성경에서 ‘표준’이라는 말을 ‘개요(outline)’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의 맥락이 있고 흐름이 있으며 개요와 대강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갖고 말하더라도 그 대강에서 뭔가 치우친 가르침이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말을 들을 때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들은 주로 이단과 종파가 형성되는 데 쓰여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단적이고 종파적인 사람들,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유업을 얻지 못한다(갈 5: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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