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34] 타락하는 시대의 특성
18:14 전에 라이스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 하고 15 다섯 사람이 그편으로 향하여 소년 레위 사람의 집 곧 미가의 집에 이르러 문안하고 16 단 자손 육백 명은 병기를 띠고 문 입구에 서니라 17 땅을 탐지하러 갔던 다섯 사람이 그리로 들어가서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할 때에 제사장은 병기를 띤 육백 명과 함께 문 입구에 섰더니 18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하여 내매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19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 중으로 들어가니라 21 그들이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더니 22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난 때에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23 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낯을 돌이켜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24 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 하느냐 25 단 자손이 그에게 이르되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하고 26 단 자손이 자기 길을 행한지라 미가가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갔더라
1. 다섯 정탐의 영성은 적극적인 면에서 좋았지만 모든 면에서 완전히 좋지는 않았다. 이것이 또한 사사시대의 혼잡한 영적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은 미가의 집에 오자 이전에 레위인 제사장이 적극적인 예언을 해준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근원이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만든 신상에 있는 줄 알았다. 그들은 그 물건들을 취하기 원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러한 제사장의 겉옷인 에봇이나 드라빔이나 신상만 있으면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것에 의지하여 존재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니 어떤 것을 취하면 하나님을 취하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것이 곧 우상 숭배적인 발상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떤 조직이나 단체 속에 가두고 그 안에만 계신 분으로 한정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지식이나 논리 체계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논리와 지식 체계만 소유하면 하나님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어떤 단체 안에만 있으면 하나님 안에 있고 어떤 지식이나 논리를 취하면 하나님을 취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단체나 지식체계)을 붙들고 빼앗기거나 무너지게 하지 않도록 사람들과 쟁론하며 싸우는 것이다. 당시 단 지파 사람들과 미가 집의 사람들이 싸운 것은 하나님을 붙잡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만 있으면 하나님이 있을 줄 생각하는 그 어떤 것들(things)을 위해 싸운 것이다.
2. 단 지파 사람들은 큰 싸움을 앞에 두고 도움이 필요하다 하여 그것들이 필요하였고 미가 집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과 미래와 먹고 살 일을 생각하여 그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힘은 단에게 있었고 소유는 미가 집의 것이었다. 그러나 단 지파의 사람들은 레위인을 고용한 것이나 그 에봇이 한 가정에 있는 것 등이 그렇게 합법적이고 정통성을 지닌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진리가 힘이 있는 것이지 진리가 아닌 것은 정작 필요한 때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그런 비진리를 위해서는 사람들의 양심이 강하게 증거하지 못하며 목숨을 걸고 지키지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 지파 사람들에게는 그 물건들을 탈취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힘이 미약한 미가의 집 사람들은 그 일의 정통성과 진리의 베이스를 생각할 때 그렇게 크게 주장할 만한 형편이 못되었다. 도둑질한 물건을 산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강하게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못하는 원리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거짓된 상태에서 서로 속이고 속고 하였다.
3. 결국 단 지파 사람들은 그 물건들을 완력으로 취했다(미가의 집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그 단 지파 정탐들을 잘 대해주고 다 빼앗긴 꼴이 되었다). 다섯 정탐은 물건들을 취해 나오고 6백명 병기잡은 용사들은 밖에서 엄호하고 서 있었다. 감히 그 누구도 반대하거나 말릴 수 없었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는 제사장에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라고 물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아예 제사장까지 자기들 지경으로 데려가려 하였다. 그리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 제사장은 더 나은 조건에 만족하였다.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이 레위지파 사람은 타락한 하나님의 일꾼을 대표한다. 그가 원래 미가의 집에 있게 된 것은 돈 때문이요 장래 때문이요 얻을 지위 때문이었다. 그런 좋은 조건을 만나자 그곳에 있게 된 것이다. 지금 더 나은 조건의 교섭이 왔다. 그럴 때 이 젊은 레위인 제사장은 매우 기뻐함으로 그들의 말을 접수하였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면 나중에도 그러하다. 처음에 그가 돈으로 청빙이 되었는데 나중에 더 나은 돈의 조건이 왔는데 거절할 리 없다. 홀(Hall) 주교는 그들이 10세겔로 유혹할 수 있었다면 11세겔을 주는 자에게 잃게 될 것이라 하였다(매튜헨리 주석). 돈에 의해 묶여 일하는 사람들은 돈에 대한 더 나은 조건이 올 때 그쪽으로 가버린다.
미가의 집에서는 그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약속을 거르지 않고 돈과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많은 사랑도 주었을 것이다. 아들같이 대했으니 많이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조건 앞에서 그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배신의 한 종류이다. 이와 같이 타락한 시대에는 배신이 많다. 자신의 유익을 따라 변하고 변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과거에 미가의 집에 열심히 섬기고 있었던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돈 때문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4. 단 지파 사람들은 확실하게 자신들의 것을 챙길 줄 알았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과 물품들(훔친 것들 포함)을 앞에 두고 행진하였다. 미가의 집 사람들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따라왔다.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미쳐서는 단 자손을 부르는지라 그들이 낯을 돌이켜 미가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미가가 가로되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때 단 사람들이 미가에게 말했다. “무슨 일로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왔느냐? 우리와 한판 붙자는 말이냐?” 하고 실력을 과시하는 말을 했다.
미가의 집 사람들은 감히 대들지 못했다. 미가가 한 말은 그 에봇과 신상들이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즉 그것들은 우리의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나의 지은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단 지파 사람들은 미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잘못하면 노한 자들에 의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 조용히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타이르듯 겁을 주어 돌려보냈다. 종교적인 사람들이 사리와 도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남의 것을 불법으로 빼앗고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 하에 큰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제사장과 도구들이 한 가정에 있는 것보다 한 지파에게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나 이스라엘에게 유익한 것이라 생각했다. 명분을 종교적으로 가질 때 많은 불의가 나름 정당화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완력으로 남의 소유를 탈취한 것을 스스로 옳다고 정당화한 것이다. 결국은 힘이 센 쪽이 승리한 것이다. 미가는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그냥 다 잃고 집으로 돌아갔다.
5. 교회가 타락할 때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拘縮)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미가의 집이 양화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미가의 집 사람들은 자기들의 돈으로 신당을 만들고 제사장도 사서 종교 생활을 영위하려 했다. 그러나 단 지파 사람들은 돈도 내지 않고 거의 폭력으로 신상과 에봇들을 취해 가고 레위 제사장에 대해서도 먼저 고용한 미가의 집과 어떤 선한 상의도 거치지 않은 채 적당한 스카웃 제의를 하여 그냥 데려가 버렸다.
물론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좀 따져본다면 단 보다는 미가의 집편이 더 도덕적이다. 덜 영적인 사람들이 그들보다 약간이라도 나은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영향을 받으면 좋으련만 타락한 상태는 언제나 덜 영적인 사람들이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 왜 그런가? 영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혈기와 육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조금 낫다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별로 없고 혈기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혈기와 육체를 대항할 힘이 없다. 매튜 헨리(M.Henry)는 힘(might)이 정당한 권리(right)를 능가하는 것이 통속적인 일이라 하였다.
6. 교회가 타락할 때 고용된 제사장들(삯군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은 많은 경우 큰 조직에 흡수된다. 작은 단체는 언제나 큰 단체의 사람들에게 사람을 빼앗기게 되어 있다. 큰 조직은 금력과 인력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할 둥지가 많고 따라서 사람들을 흡수하는 흡수력이 크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큰 조직을 선호하는 것이다. 레위 사람은 조그마한 데서 섬기는 것보다 기회가 왔을 때 큰 곳으로 가서 꿈을 펼쳐 보고 자기의 역량을 발휘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런 일 가운데는 십자가도, 진리도, 성령도 없고 오직 인간의 종교심과 육체만이 세력을 점하고 있다.
진실한 주님의 역사는 언제나 작다(눅 12:32).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을뿐 아니라 나무와 질그릇도 있는 법이다. 사도는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해야 귀한 그릇이 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예비된다고 하였다(딤후 2:20-21). 그 젊은 레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와 위임이 없이 다만 섬기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던 데서 죄악이 싹트게 된 것이다. 부르심과 인도하심 없이 달려나가 섬기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작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야망이 이스라엘 전체를 종교적으로 분열시키는 큰 죄에 참여하도록 이끈 것을 생각해 보라! 이는 실로 작은 일이 아니다!
27 단 자손이 미가의 지은 것과 그 제사장을 취하고 라이스에 이르러 한가하고 평안한 백성을 만나 칼날로 그들을 치며 불로 그 성읍을 사르되 28 그들을 구원할 자가 없었으니 그 성읍이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시돈과 상거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단 자손이 성읍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며 29 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더라 30 단 자손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1. 7절과 27, 28절은 라이스성의 특징을 말해준다. 우선 그들은 한가하고 평안하고 다른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한 상태의 사람들은 언제나 위험하다. 이방인들의 특징이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삶을 소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안하고 안주하는 삶은 언제나 심판의 전조이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런 경고는 필요하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가장 자부심이 강하여 어떤 권면이나 충고도 필요없게 느낀다면, 또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전혀 상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위험한 것이다. 카우퍼의 시를 읽어보자. “결코 두려움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 너무 늦을 것이다. 즉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으리라”.
이렇게 자부심이 강하고 자신들만 최고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버림받은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의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의 모든 확신과 자부심이 꿈꾸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스펄전은 “나는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다가 버림을 당하느니 차라리 항상 의심을 품더라도 하늘로 가기를 원한다. 나 자신이 축복받은 사람들 중에 있는 줄 알고 있다가 나 자신이 지옥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내 영의 비탄한 가운데 날마다 자신이 신실한 자인가, 그렇지 못한자인가를 알 기위해 부르짖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데도 구원받은 것으로 확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의 문을 닫아 놓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이다. 잘못하면 라이스성 사람들처럼 걱정없이 살다가 예기치 못할 때 파멸이 우리 문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조심하고 경성해야 한다.
2. 단 지파는 자신들의 분깃이 너무 적다는 것으로 인하여 언제든지 나가 싸워야 할 상황이었다. 그들은 미가의 집에서 우상과 그 제사장을 취하여 라이스로 싸우러 갔다. 그들은 미가의 만든 우상과 제사장을 의지했을 것이다. 그들이 라이스를 쳐서 이기고 승리한 것은 그들이 의지한 우상이나 제사장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믿음이 없었기에 보이는 것들을 신뢰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우상을 신뢰하고 여러 가지 부족한 상태에 있었을지라도 그들이 약속하신 땅을 취하러 나선다고 할때 그들을 도와주셨다. 그들이 라이스에 가보니 과연 정탐들의 말대로 한가하고 평안했으며 그들을 불로 사르되 구원할 사람들이 없었다. 또한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이는 정탐들의 보고가 정확했음을 확인해주는 구절이다.
3. 그들은 그 성을 불지르고 칼날로 쳤으며 성읍을 새로 중건하고 그 성읍이름을 단이라고 했다. 이 단의 원래 이름은 레센 혹은 라이스였으며 이스라엘의 북방한계선이 되었다. 그들은 라이스에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이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이 백성이 사로잡힐 때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30절). 이 백성이 사로잡힌 사건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블레셋에 의해 언약궤를 빼앗겼을 때 상황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글을 쓴 저자가 사무엘이라면 더욱 그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 유력하다.
또한 31절 말씀은 미가의 신상이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단 자손에게 있었다고 말해지는 것으로도 문맥상 증명이 있다. 이 작은 사건은 단에게 큰 우상숭배의 길을 열어주었고, 후에 여로보암 때 금송아지를 두 개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갖다 두게 되었는데 이 작은 미가의 신당의 일은 그 큰 죄악의 원조가 된 것이다. 아마도 그 에봇과 신상은 그 이후 블레셋 전투 때든지 그 후 사무엘의 치세 때 사라지게 되었을 것이며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단에다 옛날 신상을 세웠던 전처를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하였을 것이다(왕상 12:29).
하나의 죄는 완전히 처리하지 않을 때 또다른 죄를 낳는 길을 열어준다. 특히 종교적인 나쁜 선례는 악한 자들에게 더욱 악해지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하나님이 세우신 집은 실로에 있었으며 그 집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배의 중심이었으나 단에 세운 신상은 사람이 만든 분열과 혼란의 신당이 되었다. 하나님의 집의 분열과 혼란은 이렇게 사람들의 야심과 진리를 떠난 행동들에 의해 야기된다.
단 자손은 한 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의 기업을 취하는 일을 했고 또다른 면으로는 부패한 우상숭배의 일에 연루되었다. 사사 시대는 이와 같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하나님에 속한 것과 사람에 속한 것의 혼합의 시대였다. 그러므로 왕정의 시대적 요청이 있었던 것이며 사무엘을 통한 시대의 전환의 필요가 있었다.
4. 단 자손은 그 신상을 자기들을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30절). 이것이 곧 종파의 근원이다. 종파(hairesis)는 자신들만의 단체를 위한 신앙에 기초를 둔다. 단은 이스라엘의 일부다. 그들은 응당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또 온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을 섬겨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지파(for themselves)를 위해서 신상을 세웠다. 우주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이다. 그 한 몸 이외에 또 다른 많은 몸들이 없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한분이시고 주도 하나이시며 성령도 한분이시고 몸도 하나이다(엡 4:4-6). 단 지파는 자신들의 지파를 너무 위했다.
그들이 세운 신상으로서 그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실제로는 우상이지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 지파를 위한 지파의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을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기록한다. 또 그의 자손이 계속해서 제사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미가 집의 제사장이었던 친구가 모세의 증손자였으리라고 추론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하나님의 훌륭한 종인 모세의 증손자 때 와서는 자손 중에 이스라엘의 분열을 조장하며 우상숭배를 하는 제사장이 나왔다는 말이 성립된다.
어떤 히브리어 번역본은 모세를 므낫세로 바꿔 기록하여[모세(hvm)의 히브리어 철자에서 간단히 ‘눈’(n)을 첨가하면 므낫쉐(hvnm)로 읽어진다] 그 사람이 모세가 아닌 것으로 읽으려 하였다. 그것은 모세를 폄하하는 것이 되어 불경스럽다고 느껴서였을텐데 많은 학자들이 이를 모세라 읽는다. 그리고 그 레위 소년이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이었다는 데도 학자들 간 별 이견이 없다.
5. 18장에서 우리가 느끼는 바는 교회가 타락할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보이는 우상과 의식주의로 바꾼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 같이 순종하며 따르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한 발씩 순종하며 나아간 믿음이다. 누구든지 보이는 것을 의지한다면 실족할 것이다.
편안한 생활 가운데서 쉽게 믿음 생활을 하려할 때 그러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치한 많은 의식과 대단한 사람과 믿음직한 단체와 탁월한 지식과 많은 보이는 것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많은 기도와 기다림과 순종함 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쉽게 알 수 있고 따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보이는 우상들이 들어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