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흔 칼럼] 본디오 빌라도(Pilate)의 최후
이름 속에 ‘창을 가짐’ 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1세기 유대와 사마리아 및 이두매를 약 10년 동안 다스린 제5대 로마 총독이다(주 후 26-36 재임). 그는 로마 제국을 위해 몸과 마음과 물질을 모두 바쳐 적극적으로 일하며 싸우다 큰 공적을 세우고, 황제에게 인정을 받아 무관(武官)인 기사(騎士)가 됐다.
본디오 빌라도는 원래 갈라디아 지역 출신으로서 독일군 제 22군단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본도에 거처하는 중 기회가 돼 로마 황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열심히 싸운 인물이다. 그 후부터 로마 사람들은 빌라도가 충성을 바쳐 일한 ‘본도’ 지역명을 따 그를 ‘본디오’'라고 부르게 됐다. 그는 또한 투창(Pilum)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빌라도’라는 별칭도 부여했다.
본디오 빌라도는 황실의 임명으로 유대 총독으로 부임할 때 예외적으로 아내를 동반했다(마 27:19). 1세기 당시 로마법은 유대 같은 위험한 지방을 다스릴 총독은 아내나 가족을 동반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아구스도 시대 이후 일시적으로 동반이 허락되자, 빌라도는 아내와 같이 유대 땅에 총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전임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 주 후 14-25)는 가이사랴에 안주(安住)하면서 대제사장 직임을 돈을 받고 파는 등 사복을 채우는데 만족했다. 본디오 빌라도는 처음부터 전임 총독의 잘못된 처사와 식민통치 정책에 반대했다.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부 본영을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의 헤롯 궁전(막 15:16)으로 옮겼다. 빌라도는 야밤중에 병사를 시켜 이스라엘의 성도(聖都) 예루살렘으로 군기를 보냈다. 독수리 그림의 군기와 황제의 상이 그려진 기를 성전 안에 세우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제2계명을 어기는 것이 됐다.
흥분한 예루살렘 군중들은 총독부에 민족 대표를 보내 비난과 더불어 탄원을 올리게 됐다. 유대 군중들은 5일 동안이나 총독의 관저를 둘러싸고 데모하며 소란을 피웠다. 엿새째 되는 날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군중을 법정으로 불러, 만일 해산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했다. 유대인들은 그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로마 군사들 앞에 자신들의 목을 내놓았다. 본디오 빌라도는 마침내 그들의 탄원을 들어 군기를 성 내에서 철수시켰다.
빌라도 총독은 솔로몬의 연못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水道)를 끌기 위해 성전고(聖殿庫)에 있는 금을 함부로 사용했다. 하나님께 헌물로 바친 거룩한 금을 세속적 목적을 위해 도용(盜用)하는 것이라 유대인들은 생각했다. 총독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또다시 소란을 일으키며, 그를 공격하기 위해 둘러쌌다. 빌라도는 그런 일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으므로 흉기를 가진 사복 차림의 부하를 군중 속에 몰래 잠입시켰다. 군중들의 소란이 최고조에 달하자 빌라도의 신호에 따라 폭도들을 습격하므로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총독 빌라도는 주후 29년 유월절에 민중들의 소동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많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일 때 총독도 상경해서 헤롯의 궁전에 묵는 것이 관례였다. 빌라도가 민중 폭동을 일으킨 갈릴리 사람들을 습격하여 그들의 피를 희생의 피에 섞게 됐다(눅 13:1,2). 그는 자신에게 큰 희생이나 손해가 될 경우 올바른 결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묻는 질문은 “나의 의무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항상 “나의 이해 관계는 무엇인가?” 였다. 전임 총독의 정책을 싫어하면서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총독 업무를 수행한 것은 동일했다.
본디오 빌라도의 마지막 과실은 그의 실각 원인이 되었다. 사마리아 출신의 어떤 사람이 빌라도를 찾아와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주전 15세기 모세가 성막의 황금 기구(器具)를 숨긴 곳을 가르쳐 주겠다고 거짓말했다. 사마리아 사람은 폭군 빌라도가 그리심산에 올라오면 제거할 심산이었다. 수많은 유대 군중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그리심산 기슭에 모였다. 빌라도는 무장한 군인들을 두려워하여 민중들을 급습하여 모두 살해하고 말았다. 사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억울한 사실을 로마 황제에게 탄원하자, 본디오 빌라도를 총독직에서 면직시켰다(36-37년). 평민으로 돌아간 빌라도는 여러 모양으로 고통을 당하게 됐다. 결국 칼리쿨라(Caligula, 12-41, 로마의 3대 황제, 재위 37- 41) 황제로부터 사형 집행 통보를 받고 스스로 자살하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국가를 위해서 일해야 할 공복이 사심을 마음 속에 품고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힌 죄악은 결코 묵과될 수 없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이 땅에 세우신 국가 또는 다양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대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지도자를 선택한다. 본디오 빌라도처럼 국가 및 공동체의 통치 원리를 오직 사익에서 찾는 사람은 이 땅에서조차 밝은 결실을 맺을 수 없다. 하나님 세우신 공동체를 해치는 사악한 행동을 하고도 정죄가 없는 것은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지난날 백성들을 괴롭혔던 전세계 독재자들의 비참한 죽음과 퇴보는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