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37]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
2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구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2 백성이 벧엘에 이르러 거기서 저녁까지 하나님 앞에 앉아서 대성 통곡하여 3 가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어찌하여 한 지파가 이즈러졌나이까 하더니 4 이튿날에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거기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총회와 함께 하여 여호와 앞에 올라오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니 이는 그들이 크게 맹세하기를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 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8 또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치 아니하였으니 9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거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 회중이 큰 용사 일만 이천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 11 너희의 행할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거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인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자지 아니하여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오니라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 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인 중에서 살려둔 여자를 그들에게 주었으나 오히려 부족하므로 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
1. 죄는 미운 것이지만 형제는 사랑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보편적인 교회의 위치에 있었기에 전쟁 후에 승리의 자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지파의 이즈러짐에 대하여 슬퍼했다. 이것이 옳은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교회의 성도들의 축복인 것이다. 종파적이고 육체적인 성향의 단체의 사람들은 이러한 감각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이긴 것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전 지파를 대표한 백성들은 이기고도 애통한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일찍이 일어나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이는 교회의 온전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또 하나의 그림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어디에 서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2. 패전한 베냐민 지파는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만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한 지파가 궐이 나는 위기를 맞았다. 이스라엘은 미스바에 모여 아무도 베냐민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했다. 결과는 한 지파가 사라지는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때 온 이스라엘은 통곡하며 슬퍼하며 울었다. 그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인간이 잘한 일 가운데도 지나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베냐민을 징벌하였지만 잘했다는 느낌보다는 죄를 지었다는 느낌, 하나님의 백성 한 지파를 궐이 나게 할 판에 이르게 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모든 지파가 하나님께 소중하고 제사장의 흉패에는 열 두 보석이 물려 있었다. 그들 모든 지파가 야곱이나 모세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니 그들은 사생결단을 한 전쟁을 승리하고도 축배의 잔을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승리 후 슬퍼하고 통곡했다. 죄는 밉고 심판받아야 하지만 죄인은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가운데 있는 심판이다. 의를 위해 심판하는 경우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동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도 사람을 벌하실 때 기쁜 마음으로 하지 않으시는데 하물며 은혜 받은 죄인인 사람이 그리해서는 안 된다(매튜 헨리).
3.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는 맹세하여 베냐민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베냐민의 보존책으로 베냐민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야베스 길르앗을 쳐서 응징하고(그들은 함께 베냐민을 치러갈 때 함께 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은 벌을 받았다. 따라서 많은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침을 당하고) 처녀 400명은 베냐민에게 주어졌다. 기드온이나 입다나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하다 보면 지나친 맹세를 하게 된다. 그러한 맹세도 지나친 것의 일종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이 끝난 후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마음에 평안을 찾고 베냐민에 살아남은 600명(림몬 바위로 피한)에게 평화를 선포했다. 이는 그들의 주님 앞에서의 회개와 제물 드림이 진정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그나마 600 명이라도 도망하여 살아 남아준 것이 고마웠다. 그들로 말미암아 한 지파의 존속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길르앗 야베스를 징계하여 남자들과 남자와 잔 여자들은 다 죽이고 남자들과 자지 않은 400명의 처녀들을 600명의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럼에도 200여명의 여자들이 부족했다. 그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며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다. 그들을 연민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이다. 이것이 없다면 어떻게 형제 자매라 할 수 있겠는가?
16 회중 장로들이 가로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 17 또 가로되 베냐민의 도망하여 면한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19 또 가로되 보라 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편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하고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 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22 만일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쟁론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거기 거하니라 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을 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곧 각각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1. 이 구절에는 베냐민 지파 사람 200명에게 아내를 구해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베냐민 지파 남은 사람 200명에게 실로의 들에서 매년 열리는 무도회에 나오는 처녀들을 붙잡아 아내를 삼도록 허용했다. 그 춤은 아마도 초막절을 기념하는 경건하고 정숙한 무용이었을 것이다(매튜 헨리). 이스라엘 장로들은 베냐민 200명의 사람들에게 포도원에 숨어서 지켜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붙들어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들어가라고 훈수했다. 그럴 때 그 아비나 형제가 와서 쟁론하면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의로 딸들을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니 죄가 당신들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라고 해주었다.
그러므로 베냐민은 그대로 했고 그들의 수효대로 여인들을 붙들어 가지고 자기들의 기업의 땅으로 돌아가서 성읍들을 중건하고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베냐민에 대한 심판의 일은 끝났다. 그들은 부패한 죄악에 대하여 참담하리만큼 큰 심판을 받았다. 그들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베냐민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며 무진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죄란 자기를 망치고 남을 괴롭히며 다른 사람들도 역시 크나큰 실수와 죄악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찌하든 죄를 피해야 한다.
2. 혼란의 원인이 다시 한 번 설명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씀을 결론으로 사사기가 끝난다. 이러한 혼란의 원인은 왕이 이스라엘에 없으므로 라고 했다. 사무엘상에 사무엘과 하나님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할 때 기뻐하지 않았다(삼상 8:6-8). 그런데 여기에 반복적으로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꼭 필요한 것처럼 쓰여졌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사 시대의 정치제도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 잘 해나가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셨지만 그들은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 즉 그들이 어떤 강력한 인간 통치가 없이 다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율법을 지키며 살면 최상의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이는 신약의 교회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며 왕국에서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완전한 스케일로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시 그렇게 할 수 있는 생명과 역량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패한 도덕성과 낮은 상태의 종교적 치료책은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온 나라를 다스리는 왕정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최상의 대책이 아니라 그들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궁여지책이다. 왕을 세워 강력한 통치로 제재하지 않으면 모두가 제 소견과 제멋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군왕으로, 그분의 말씀을 법으로 삼아 신정국가를 이루면 최상이련만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
3. 그들이 기브아 사건을 보고 정의 편에 선 것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총회 중에 흥분하여 잘못 맹세한 일, 총회에 나오지 않은 자들을 전부 죽여 버리자는 일, 베냐민에게는 이스라엘 어느 지파도 딸을 주지 말자고 한 일 등은 지나친 처사다. 또 베냐민 사람들 200명에게 실로에서 숨어 있다가 춤추러 온 여인들을 사로잡아 아내를 삼으라고 한 것도 그러하다. 그리고는 그 일이 부형들을 위로, 무마하기를 그들 자의로 한 것이 아니니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의롭고 경건한 일로 보기 어렵다. 엄격히 보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자신들의 맹세에 대한 편의적인 적용이니 일종의 외식이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의 잘못 맹세한 죄를 정직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으냐고, 해결 방법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신약에서 주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맹세는 인본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즉 자신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일조(一助) 할 수 있다는 여지를 갖고 있다는 전제 하에 하는 것이 맹세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네가 머리카락 하나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존재라고 알려주셨다(마 5:36).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맹세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그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고 하신 것이다.
차라리 그때 그들이 하나님께 그저 모든 것을 하시라 매달리고, 하라는 일만 한 가지씩 순종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서원이나 맹세를 하므로 하나님께 무언가 기쁘게 해드리고 더 큰 은혜를 얻으려 하지 말고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와 자비에만 의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분의 은혜는 죄인에게 조건없이 주시는 무한한 은혜다(롬 5:2, 6-8, 고후 12:9, 엡 1:6-7). 더욱 큰 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길 뿐이다(약 4:6).
4. 베냐민과 같이 종파적(sectism)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죄하시는 것임을 알고 피해야 하고(딛 3:10), 따라서 교회의 보편적 위치에 선 것이 좋지만 보편적 단체(전체적인 위치에 서 있는 단체)도 어떤 일을 잘못 결정하고 지나칠 수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 편에서는 언제나 과오와 실수가 있을 수 있음을 알고 겸손하며 조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한 교훈을 배우면 좋다.
가톨릭이 이런 면에서 자신들의 단체를 지나치게 신뢰하여 많은 오류를 발생시킨 것은 역사적인 주지의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든 단체든 주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많은 면에서 옳게 행해 왔고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의 위치에 서 있으면서 많은 선한 일을 해 왔더라도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선과 옳음을 내세워 함부로 잘못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심각한 교훈을 배우게 된다. 아무리 정의를 실행하는 일이라도 흥분된 감정으로 처리하다 보면 과오가 있고, 그 과오를 시정하다 보면 또 다른 과오를 범하게 된다. 우리는 정의감을 흥분으로 가져가지 말아야 하고 흥분된 상태에서 바로잡고 심판하는 일을 함부로 행하지 말아야 한다.
확실히 이 시대의 교회도 사사기에서 배워야 할 공과가 있다. 지난날 모든 실패나 성공의 교훈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거울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고전 10:11). 이런 일에서 사도의 권면은 이러하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두려움 없이 다른 사람의 죄책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스라엘이 베냐민의 불의를 징계하러 일어난 것, 죄에 대한 의로운 분노의 태도는 좋았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죄를 묵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동족 가운데 죄가 심각하게 일어나 온 이스라엘이 난리를 하는데도 전연 개의치 않고 그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교정하지 않는 무관심으로 인해 심판을 받은 것이다. 죄는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고전 5:1-13).
그러나 그때 그들은 두려움과 온유함이 부족했다. 결론적으로 이때 이스라엘은 각기 소견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고, 그만큼 베냐민 지파에 대한 이스라엘의 처사도 옳게 행한 것이 있는 반면 잘못 행한 일도 있다는 뜻이다(박윤선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