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흔 칼럼] 폭력을 통한 지상 최고 행복 추구자 바라바
폭력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들의 지상행복(地上幸福) 달성을 추구하며 열심히 노력했던 유대 민족의 지도자 바라바(Barabbas)는 헬라어 이름에 ‘아바의 아들’ 또는 ‘아버지의 아들’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웃 사람들이 평소 그를 향해 호칭한 이름 바라바는 본명(last name)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을 나타내는 성(姓/surname)으로 보인다.
초대 교부인 제롬(Jerome)은 자신이 쓴 마태복음 주석에서 ‘바라바’라는 이름이 히브리 외경에 ‘그들 주인의 아들’로 해석 표기됐다고 지적한다. 아람어로는 랍반(어떤 랍비의 아들) 또는 바르압바(아버지의 아들)로 표기될 수 있다. 신약성경 네 복음서가 모두 바라바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건이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경은 바라바를 유명한 죄수(마 27:16), 강도(요 18:40),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들 중 하나(막 15:7)로 기록한다. 주후 1세기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으로 보아, 투옥된 바라바는 젤롯당(Zealots) 또는 열심당에 소속된 자로서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대인 독립운동가로 알려진다. 젤롯당(열심당)은 주 후 1세기 정통 유대종교 내 중요 계파로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사두개파, 바리새파 및 에세네파와 함께 이스라엘 중요 4대 당파 중 하나이다.
젤롯당은 로마 제국 같은 외국의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애국운동 단체였다. 주후 1세기 어느 날 로마 황실이 파송한 구레뇨 총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적하라는 강제 명령을 내렸다. 선민으로 수치감을 크게 느낀 그들은 범민족적, 범국가적으로 반대운동을 했다. 그때 주도자가 돼 백성들을 지도하던 바나바가 로마 군대에 체포되어 구속됐을 가능성이 크다.
바라바는 포악한 로마제국의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수 유대인들을 규합한 독립운동 단체의 최고 수뇌(首腦)였다. 바라바가 이끌던 유대인 애국 독립운동단체는 이스라엘 땅에 거처하는 로마 사람들에게 테러를 감행했고, 심지어 로마 사람들의 가택과 사무실 등에 방화를 일삼는 등 폭력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당대 선량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원해, 반(反) 로마제국 운동에 가담시켰던 최고 인물이 바라바였다.
바라바가 투옥돼 있는 동안 나사렛 출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회의 전면에 구세주로 등장했다. 바라바보다 훨씬 출중한 능력을 가진 것을 알고, 독립운동가로 나선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삼고 적극 추종하기 시작했다. 구약에 있는 메시아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의 폭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장 구원해줄 것을 믿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던 놀라운 이적과 기적 사건은 그를 구세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됐다. 수많은 유대인들은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독립이 될 것으로 믿고 적극 추종하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은 그들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는 출중한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 주후 1세기의 정복자 로마 제국을 가나안 땅에서 몰아내려는 마음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을 폭력으로 격파하고 이스라엘을 독립국가로 만드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대 백성들이 원하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예수 그리스도가 실현시켜 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좌절감은 그들의 기대를 젤롯당(Zelot) 수뇌인 바라바에게로 옮겨가게 했다. 반(反)로마적 성향을 지닌 민족 지도자 바라바가 이스라엘의 염원인 독립을 이뤄줄 것으로 신뢰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았던 유대인들조차 죄인 바라바 대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로마 총독 또는 황제의 특사로 중죄인 한 사람을 석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무죄한 나사렛 출신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 황제의 유월절 특사로 석방해야 했다. 사악한 대제사장의 지시를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바라바를 특사로 삼아 석방하도록 외쳤다.
중죄인 바라바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고 석방됐다. 그들은 무죄한 성자 하나님을 감히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사악한 결과를 낳게 됐다. 유대인들은 눈앞에 보이는 지상 행복만을 위해 바라바를 선택하므로, 영원한 행복을 보장할 성자 하나님을 죽게 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삶은 매사에 한계가 있다. 많은 물질과 권력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지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는 없다. 특히 바라바처럼 무력을 통해 지상의 행복이 달성될 수는 절대로 없다. 무력을 통해 순간적인 행복은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한 참된 기쁨은 보장될 수 없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원한 행복이 보장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이익에 눈이 멀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은 영원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금번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언어폭력 등은 주후 1세기 바라바가 사용했던 방법과 유사함을 깨닫게 된다. 바라바가 실패한 것처럼 21세기 오늘도 폭력을 통한 파라다이스는 이뤄질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을 지배하고 이끌어 나갈 지도자는 폭력을 부인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