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적신으로 태어나서 적신으로 돌아간다. 갓난아기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모유를 준비하여 주시고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양육을 받도록 섭리하신다. “사람이 제 먹을 것 가지고 태어난다”는 격언은 오랜 경험에서 얻은 조상들의 지혜인 것이다. 아니 그들이 들은 바 하늘의 소리인 것이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차분히 돌이켜 보면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하찮은 것일지 몰라도, 그것으로 다시 소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엘리사의 제자였던 한 선지자가 죽게 됐다. 그 아내가 빚을 갚을 길 없어 자식들이 노예로 팔릴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엘리사를 찾아가 살 길을 호소하였는데, 엘리사의 대답은 그에게 남아 있는 것으로 재활의 길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기름 한 병밖에 없었지만 엘리사의 말대로 믿음의 그릇을 준비하고,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따라 아들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빚을 갚고도 남아 그것으로 유여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것으로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말이다. 사람이 자족할 줄 모르는 것은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심만큼 없다는 생각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족할 줄 아는 신자가 될 것을 간접적으로 권유하였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빌 4:11-13)고.
선행으로 봉사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다음에 하나님이 풍부하게 주시면 그 때에 선행으로 보답하겠다는 생각이나, 선행하기 위하여 모금을 하겠다는 계획이나, 선행을 다한 후에 어떤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라면 결코 선행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나에게 선행할 수 있을 만큼 주셨을 뿐 아니라 내게 있는 것 이상의 선행을 바라시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내게 있는 것으로 선행하면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자신에게 있는 오병이어로 선행하였을 때에 예수께서는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을 베푸셨으니 나의 한계 이상의 일을 주께서 하실 일인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내가 능력의 한계 이상을 행하고자 한다면 오버액션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소생할 수 있을 만큼 내게 남겨 두신 것이 있고, 자족할 만큼 남겨 두신 것이 있으며, 선행할 만큼 남겨 두신 것이 있으니 내게 있는 것으로 살길을 찾고, 또한 자족할 줄 알며, 나아가 선행을 실현하여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