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교회의 세습적인 현상이 한국교회의 관행처럼 되어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세습이라 지적하거나 비난하기도 하고, 시기하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응수하기도 한다. 아연실색할 일이다. 시기심에서 나온 비난일지라도 그 내용은 과히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런즉 핵심을 비켜가는 감정적인 응수는 치졸한 것이 된다. 그 말이 옳다면 저의(底意)야 어디 있든지 일단은 수용하고 분석할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세습을 지적하는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세습만 논하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다는 것인가? 교회에서 가장 먼저 생각할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나님의 뜻이란 미명(美名)으로 세습을 강행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세습을 문제 삼는 것이라면 그것은 세습을 좇는 개인의 문제이지 원칙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오용하거나 말거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 외에 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습이란 용어 자체도 교회에서는 속화된 외래어일 뿐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한 실례를 들어보자. 어떤 외딴 섬에서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가 은퇴할 시기가 지났음에도 자원하는 후임자가 없어 여력(餘力)을 다하여 목회하고 있을 때, 보다 못한 그의 아들이 오랜 기도 후에 사명감을 갖고 비장한 마음으로 부친의 뒤를 이어 섬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리라고 결심하였다면, 이를 세습이라 지적하며 만류할 수 있겠는가? 이 일도 분명히 세습이긴 마찬가지인데 비난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목회자다운 결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 외에 세습을 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서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해도 할 말은 없지만, 그 아들이 실로 대형교회를 시무할 만한 시련과 신앙과 인격이 구비되어 있는가 말이다. 준비되어 있다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방황하는 양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드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밤늦도록 깊이 묵상하고 몸소 실행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사신(使臣)이 되어 있지 못하다면 문제는 심각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후임자를 세울 목회자가 “누구는 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면 또 한 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너무나 안이하게 후임자를 구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왜 준비된 후임자가 없겠는가? 하나님이 사울왕이나 요나단 대신 다윗왕을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이 그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위하여 예비하신 목회자가 없겠는가?
세습에 있어서는 당회에도 문제가 있다. 많은 실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습이 아닌 후임자 선택의 경우에서도 유학파 목사, 박사학위 소지자, 혈연, 지연의 관련자 등 외적인 조건들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한국 초대교회처럼 장시간 후임자를 위한 기도는 기대할 수도 없는 현실이지만 적어도 신앙적인 측면에서 심사숙고하여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목회자가 아들을 후계자로 세습하든, 아들이 자원하든 그것은 문외의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아들을 세워야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다면 피할 수 없는 많은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교회는 외형만 남고 사장(死藏)될 것이요, 엘리 제사장의 아들 같은 경우가 반복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차라리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언제, 어디든 가서 사역하든, 경작하든 조용히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 백 번 옳을 것이요, 좋을 것이다.
전의 신학원 원장 신원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