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여행 중에 계실 때 어떤 관원(one invested with power and dignity)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진지하게 묻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하였다. 그가 관원이었다는 말은 어느 지방의 회당을 관활하는 위원이 아니면 그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판사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앞길이 유망한 청년이었고(마19:22), 또한 대단한 재산가이기도 하였다.(눅 18:23).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그가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예수를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또한 영생의 문제로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는 선한 일을 행함으로서 영생에 이르는 줄 알고 선한 일에 힘썼지만, 영생의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하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사람을 보고 선하다 일컫지 말라는 말씀이다. 사람은 아무리 선해도 하나님 앞에 설 만한 선인(善人)은 못 된다는 뜻이다. 선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로 선한 사람은 언제나 선을 행할 수 있지만, 선을 행하여 선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선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런즉 예수를 하나님이신 동시에 독생자이신 구세주로 알고 ‘선한 선생님’이라고 하였다면 옳았겠지만, 예수를 사람으로만 알고 선하다고 일컫지는 말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길을 묻는 그에게 먼저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선한 일은 계명을 지키는 일이요,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분명해 계명을 지킬 때 이를 ‘의’라 하였고(신 6:25), 또 이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신 18:5). 다만 문제는 사람이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계명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다고 하였다. 그 만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계명을 다 지켰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예수는 그를 사랑하시면서도(막 10:21),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눅 18:22)”고 지적하셨다.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Yet on thing is lacking, remaining to you)’이 있었다. 즉 아직 이행치 못한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먼저 주시고 나중에 복음을 주셨듯(갈 3:24) 계명을 지켜도 영생의 확신이 없으면 율법을 온전히 지킨 것이 못되고, 온전히 지킬 수도 없는 것이니 온전한 선, 완전한 의를 얻고자 한다면, 그리고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따르라는 말씀인 것이다.
재물이 풍부하였던 그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것만 보아도 그는 결코 계명을 다 지킨 자가 못되었다. 그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한 가지 부족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가 진실로 영생 얻기를 바란다면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랑이 결여되어 계명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했어야만 했다.
전의신학연구원 신원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