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는 그 시대 이단자였다. 당시 모든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이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이슈화되니 교황청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재판에 회부하여 협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영웅 심리에 의한 터무니없는 낭설이었고 역시 땅은 평평하다”는 진술을 하고 겨우 구속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방면되는 재판정 문을 나서면서 “아무리 그래도 땅은 둥글다. 이는 변할 수 없는 진실이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또 이탈리아의 탐험가 콜럼버스는 대서양 끝까지 계속 가면 거기에는 금이 돌멩이 같이 흔한 나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모험을 시작하여 드디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거기가 인도인 줄 알고 원주민들을 ‘인디언’ 이라 불렀다. 만일 인류가 성서에 기록된 “그(하나님)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매다시고”라는 욥기 26장 7절 말씀을 일찍이 발견하였다면 좋을 뻔 했었다.
진실에 대한 도전과 모험은 가치있고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불과 144년 전(1866년), 조선 25대 철종이 죽고 고종 즉위 3년차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있던 그 시절에는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한양까지 빨리 걸어야 6-7일 걸리는 먼 길이었는데, 지금은 KTX 개통으로 부산까지 2시간 18분 시대가 되어버렸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밖에서 푸르고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 같은 지구를 한눈에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구를 우주적 시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은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 온 우주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과학과 문명의 시대에 살게 되었음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한과 영원이라는 위치, 그리고 영적(靈的)인 차원에서 나 자신의 현재가 어디쯤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가져야 한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높은 망루에 올라 자신이 추구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점검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인생의 종말과 남아있는 연한이 매우 짧다는 것을 보았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든든히 선 때가 진실로 허사뿐이니 이다”. 생명과 시간의 주인께서 허락하신 날들이 손 넓이만큼 밖에 안 되며, 견고하게 섰다는 허세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때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보았다.
둘째, 추구하고 목 말라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아침 안개같이 각 사람이 그림자 같이 다니며 헛된 일에 분요하고 재물을 쌓으나 그 재물은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며, 힘들게 쟁취하여 움켜쥐고 있는 재물이나 지위들이 그 날이 되면 누가 취하게 될지 모른다고 탄식한다.
셋째,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순간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이 주께 있나이다” 라고 했다. 소망이 오로지 주께 있음을 하늘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넷째, 이같은 어리석음에 집착하고 있는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고 우매한 자에게 욕을 당치 않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다.
다윗은 “삶과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삼상 20:3)” 뿐이며, “자신은 항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넘나들고 있다고(시 23:4)” 고백한다. 사도 바울도 “내가 담대하게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로되 그런즉 몸에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고후 5:8)”고 한다. 우리 살아있는 자들은 몸 안에 머물고 있는 기한과 몸을 벗고 난 후 주와 함께 있을 그 중간에 아직 머물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 우리 곁에 함께했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추억해 보자, 그리운 사람들을 추억해 보자. 어느날 갑자기 사망(소천)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과연 인생은 꿈과 같다는 생각이 새롭지 않은지…. 그분들의 죽음에 나 자신을 도입한다면 나도 어느날 갑자기 그렇게 그 분들처럼 육신을 벗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아니겠는가.
우리가 지금 집착하고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는 것들이 벗어 놓을 육신처럼 썩을 것은 아닌지, 그날이 되면 과연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나는 지금 허망한 것들에 집착하여 시간과 생명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또 예수께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마 6:22)” 하는 말씀과 성령의 빛을 힘입어 밝은 눈을 구해야 한다. 이 빛이 명확한 사람은 언제 어떤 환경이 닥쳐올지라도 당황하지 않고 어떤 문제를 만나도 담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니 이때 조카 롯은 풀과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땅 소돔을 향해 갔고, 아브라함은 척박한 땅 헤브론에 남게 된다. 아들처럼 사랑하는 롯과 이별을 아쉬워하는 그에게 여호와께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티끌을 능히 설수 있을 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 하시며 고향을 떠날 때 들려주시던 그 음성을 다시 듣게 된다.
촉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 부분적으로 알던 것은 온전한 것이 올 때 그것을 폐하는 것이며, 어린아이 때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같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차원 높은 자세와 위치에서 미래를 꿈꿔야 하고, 직책을 수행해야 하며, 사역에 임해야 하고, 생을 채워 나가야 한다. 높은 곳을 다니며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안목을 지닌 자들은 세상이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박승학 목사(칼럼니스트, 기독교단개혁연(aogk.net)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