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하나님과 함께 아이를 기르는 동역자로서, 하나님께서 아이의 근원이시다. 부모는 그 아이를 낳아 주는 기구에 불과하지만,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녀를 가르쳐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자다. 신명기 기자는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하여 그 죄악이 자기에게 돌아가서 완전히 끊어질 자”라고 표현하면서 가르침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또 ‘아버지’란 히브리 원어의 의미 가운데 ‘교사’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아버지는 교사와 동질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후대에 교사와 학생 관계의 모델이 되었다. 즉, 교사가 학생들에게 갖는 권위는 부모가 자녀에게 가지는 권위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부모는 자녀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다. 결혼할 자녀라도 한 집에서 살 때는 아들은 물론 며느리에게까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그의 명령은 율법으로서의 권위까지 가졌는데, 초기에는 생명과 죽음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력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부모의 위치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은 부모를 향한 자녀들의 의무 속에 확실히 나타나 있다. 부모를 향한 자녀들의 의무에 대해서는 잠언에 두루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윤리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였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와 같았으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순종을 요구하였듯 자녀는 부모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의 법을 지킨 자와 부모를 공경한 자가 받는 복을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성경은 자녀를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를 부모에게 가르칠 뿐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공경’은 정신적으로 경외하는 것과 동시에 육체적으로 돌보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슬픔을 대변함으로서 하나님을 공경할 것을 가르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기억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 1:2-3)
현대 사회에 있어 부모의 사명은 어느 계층이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동등하다. 즉 자녀가 사회 속에서 그 책임을 다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교육해야 하며, 결국 자녀가 성숙한 인격을 갖춘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길러야 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부모는 보편적으로 이렇게 사명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가정의 부모들은 다른 부모와 구별되는 개념들이 있으며, 또 관심의 영역도 다르다.
첫째, 기독교 가정의 부모가 된다는 것이 완전함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은 부모가 되는 사람에게 있어 근본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복종과 용서와 사랑이 기적을 이루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정은 싸움, 슬픔 긴장, 고통 그리고 죄악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 부모들은 지혜의 은총 없이는 이와 같이 계속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적 관계의 역동성이 용서, 자비, 인내, 이해, 사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해한다.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이러한 역동성의 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징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부모의 모델로서 치료하시고, 훈련하시고, 관여하시며, 모든 것을 아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부모들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성공이 어떤 특별한 기술이나 관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그들 자신의 인격적 성장과 발달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