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가급적이면 명예와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일평생 평안히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최대의 낙을 가져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류대학 졸업이 어떤 사람에게는 행운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화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삶의 의의와 행복은 천명을 알고 그 명을 따라 사는 데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신다”(시 37:23) 하였으니 어떤 사람에게는 대학교육을 받아 그 천명을 다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초등교육마저 받지 못하게 하셔서 그 천명을 다하게 하시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서는 불공평하신 처사 같이 들리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소아시아 다소 태생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최고의 교법사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물론 그 부모의 교육열의 결과라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반면 이스라엘 태생인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어부로 종사하다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천명을 따라 산 사람이다. 베드로가 어부였던 것은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이방의 사도로서, 후자는 선민의 사도로서 사역하였는데 그 두 사람의 업적을 비교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각자가 서로 못지않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의 천명을 따라 충실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고난의 교육, 곧 하나님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학으로 치면 일류대학(一流大學)도, 하류대학(下流大學)도 아닌 초류대학(超流大學) 교육을 받은 셈인 것이다. 이를 과장된 표현으로 생각한다면 아직 고난의 대학(大學)이라는 의미를 이해 못한 것이니 더 논할 것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시인은 고백하였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7)라고. 이것이 바로 고난의 초류대학이요 하나님의 대학인 것이다. 사람이 세상교육은 못 받아도 하나님의 대학은 반드시 수료하여야 된다. 그리하면 인생을 뜻있게 그리고 복되게 천명을 다하며 살다가 영생의 나라로 여행할 때가 찾아 올 것이다. 생전(生前)에든, 사후(死後)에든 말이다.
전의 신학원 원장 신원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