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스피노자’(Spinoza)는 “기적이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자연적인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적이란 믿음으로 바라보면 너무나 쉽다. 믿음으로 기적을 재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믿음만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고 교훈하신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가지의 불가사의한 문제들 때문에 환난과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 환난과 고통의 문제들 때문에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믿음만 있다면 이 세상의 어떤 절망과 부조리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보여 주신다. 그렇다면 삶의 아픔과 고통, 부조리를 능히 이겨나갈 수 있는 믿음,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아버지가 자신의 불쌍한 아들을 데리고 찾아갔던 대상은 누구였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이 아이를 끌어안고 목사님과 같은 교역자들을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기독교 전문 상담가들이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왔다고도 할 수 있다. “바로 그 사람들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쥐고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 그들에게 문제를 의논하고 도움을 요청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아버지는, 과거에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가지 능력을 행한 제자들의 경험을 비춰 봐서, 나도 오늘 어쩌면 그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에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상황 설명을 듣자마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다. 귀신들린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다는 말씀을 주목하자. 이 순간이 바로 모든 것을 변화되는 순간이다.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던 길이었다. 전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변화의 모습의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화는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이 발견하고 확신한 사실은 결국 한 가지였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골짜기 같은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친히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다. 나를 지으신 나의 창조자, 내 병을 치료하시고 내 내면의 병과 내 환경을 치료하시고, 내 삶을 바꾸기 위해서 삶의 현장에 찾아오신 그분이 바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네 문제를 가지고 내게로 오라’. 주님 앞으로 그 문제와 아픔을 안고 나아가자. 종교에 대한 외적인 믿음만 가지고 삶이 변화될 것이라고 너무 쉽게 낙관하지 말자. 형식과 외식으로는 안 된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배의 형식도, 절차도 아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교역자나 직분자도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문제를 풀어주신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기적을 낳게 된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
마가복음 9장 22절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하면서 도움을 구하고 있는가?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수 있거든”이라고 말한 그 아이의 아버지 말에는 전혀 확신이 없었다.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자의 모습이 결코 아닌,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던져보는 구조 요청에 불과했다. “당신의 제자들이 실패했는데 당신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마음이다. 그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을 들어 보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같은 사건을 다루시면서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제자들이 이 아이를 고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작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그 당신 세대를 가리켜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의 밑바탕에 결정적으로 믿음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는 ‘너희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단지 믿음이 작다고만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지만 겨우 신뢰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풍성하고 넉넉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믿음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믿음은 역동적이며 살아 있다. 연약한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제한한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칠 때마다 사용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고 하셨다. 작은 믿음은 작은 역사를 가져오고, 큰 믿음은 위대한 역사를 가져온다. 아무리 큰 문제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이 문제를 감당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가? 바로 그 믿음이 중요하다.
기도의 능력에 대한 믿음
마가복음 9장 28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29절에 이렇게 대답하신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태복음에서는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고 답하셨는데, 마가복음에서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도의 삶을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기도의 삶을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기도의 영성이 사라질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기도 외에는 문제의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가 기적을 가져온다.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기도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도대체 기도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일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기도이다. 현실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눈이 현실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보면 현실의 문제가 점점 더 크게 보인다. 나중에는 문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도할 때는 어떤가? 주님만을 바라보게 된다. 주님만을 의지하게 된다. 주님만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오직 믿음 뿐인 것을 기억하자.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능력의 믿음이다.
행복한교회 최명일 담임목사
기적, 그 놀라운 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