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56)
희랍, 헬레니즘 종교의 “신의 아들들”과의 차이
머리말
희랍과 헬레니즘 세계의 자연종교는 “신의 아들들”(paides dios, huios dios)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제우스는 다산(多産)의 신으로서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이다. 그리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들, 반신들, 그리고 죽을 운명을 지닌 아들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자연종교가 말하는 “신의 아들들”, “신적 인간”(theios aner)과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인 유일한 하나님의 독생자 사이에는 연결점이 없다(Martin Hengel The Son of God, 김명수 역, 『하나님의 아들』 대한기독교서회, 1981, 51).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우리는 신의 후손이다“라고 설교하였으나 헬라적 신의 아들들과 히브리적 “하나님의 아들”(huios tou theou)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다. 자연종교의 “신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독생자”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이 없다. 자연종교에서 “신의 아들들”은 자연 현상의 출생-죽음-재생처럼 셀 수 없이 많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오로지 하나인 독생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독일 튀빙엔의 복음주의 신약학자 마르틴 헹엘의 “하나님 아들”에 관한 연구(Martin Hengel The Son of God, 1975, 김명수 역, 『하나님의 아들』대한기독서회, 1981) 방법에 동의하며 그의 성과에 의존하고 있다.
1. 신비종교에서 “신의 아들들”과의 차이
헬레니즘의 신비종교는 죽고 부활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알지 못했다. 프리기아의 아티스(Attis), 페니키아의 아도니스(Adonis), 이집트의 오시리스(Osiris) 등 죽고 소생하는 식물과 같은 신들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기능을 가지지 않았다. 헬라의 전설적인 영웅 헤라클레스는 고대 후기시대에는 자주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으로 간주되었다가, 죽은 후에 불사성이 주어졌다. “아티스, 아도니스, 오시리스는 죽고, 애통하게 여김을 받다가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 의하여 구원이 온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죽어가는 식물의 신들로서 어느 누구도 인간을 위하여 죽지 않았다. 이들 신들에게는 선재(先在) 사상도 없이, 이 땅 위에 태어남으로써 이들의 생존은 시작된 것이다. 이들에게는 보냄이라는 사상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선재와 보냄 사상은 헬라의 신 헤라클레스(Heracles)에게도 없다. 헤라클레스의 죽음과 그를 신격화는 인간들을 위한 구원의 제한된 의미만을 가졌을 뿐이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89). 헤라클레스가 신성 혹은 신의 아들됨은 그의 초인간적인 덕(arete)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는 지극히 가난한 상태에서 “땅과 바다를 지배했으며” “자신을 제어했고, 고난을 당했으며, 사치를 누리려고 하지 않고, 능력 있는 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Ps. Lucian, Cyn.13). 헤라클레스와는 달리 나사렛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였고, 처음에는 메시아의 비밀로 그것을 숨기다가 나중에 그의 부활하심으로 그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됨이 공적으로 표명되기에 이른 것이다.
세네카의 헤라클레스 드라마에서 헤라클레스는 구세주(Kyrios)요 죽음의 정복자로 표시되고 있으나, 그것은 단지 통치자와 뛰어난 지혜자의 시적인 확대일 뿐이다. 헤라클레스는 그의 용감한 행위에 의하여 하늘을 차지하고 제우스(Zeus)에게 세계를 요구할 수 있었다. 죽음과 혼돈을 극복한 헤라클레스의 승리는 단순히 이성에 대해 적대적인 모든 권세들을 정복한 신인 이성, 로고스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539). 이들 신비종교의 신화는 초대 기독교의 기독론 형성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53). 2세기에 이미 초대 기독교는 이미 널리 퍼져서 자체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동방의 신비주의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54). 2세기에 혼합주의적 영지주의가 교회에 침투하여 초대교회와 투쟁을 벌였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이미 초대교회 내에 침투한 영지주의자들을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적(敵)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3).
“하나님 아들”의 이해에 있어서 기독교는 신비종교와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헬라사가 닐센은 『종교사 II』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기독교 안에 있는 신자들은 자주 하나님의 자녀들로 불린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한 어떠한 신비적인 종교들에서도 입문자(the initiate)들을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지 아니한다… 비록 신화론이 신들의 많은 수의 자녀들에 익숙하였지만, 그러한 편법(expedient)들은 신비제의 안에서 신적인 아들됨(sonship)의 확실성에 관한 사상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위대한 공헌은 이러한 의미(즉 진실한 사랑)에서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이해하는 데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성을 사랑으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신적 아들됨을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형성시켰다”(M. P. Nilsson, Geschichte, II, 2. Aufl. 1961, 688f.).
2. “신적 인간들”과 차이
기독교 신학에서 20세기 중반 독일의 신약학자 불트만(R. Bultmann) 등 종교사학자들은 기독교 신비주의가 이들 헬레니즘의 신비종교의 영향을 받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huios tou theou)”이라는 칭호 자체도 초대교회 독특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신비종교의 표상을 기독교의 나사렛 예수에게 입힌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독일 튀빙엔의 신약학자들, 오토 베처(Otto Betz),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 같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종교사적 문헌들의 연구를 통하여, 기독교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불트만 류(類) 종교사학파의 견해가 방법론적 오해와 편견임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초대교회에 예수에게 붙은 칭호 “하나님의 아들”은 헬라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신적 인간들”과도 다르다. 이 표상들은 1세기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와 교회의 성인전(聖人傳)에서 온 것이다. 독일 신약학자 폰 마르티츠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신적 인간은 적어도 기독교 이전 시대에는 결코 고정된 표현이 아니다… 그 자료에 의거해서 그런 신적 존재들이 언제나 신들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W. von Martitz, TDNT 9, 337f., 339f.). 2세기 신비종교의 창시자인 아보누타이쿠스(Abonuteichus)의 알렉산더는 제우스의 손자인 아셀레피우스(Asclepius) 제의에서 뱀의 신 글리콘(Glycon) 제의를 도입하였다. 그는 자신이 에셀피우스의 아들이요, 신적 기적을 베푸는 의사 포달레이누스(Podaleinus)의 후예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방종교의 창시자로서의 신의 아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에 대한 하나님 아들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Lucian, Alex 11, 14, 18, 35, 39ff). 헹엘은 이러한 신비종교의 하나님 아들에 관한 자료들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전형(典型)인 선재와 보냄의 결합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57).
3. 영지주의 구속신화와의 차이
불트만은 초대교회의 “하나님 아들” 칭호가 영지주의의 신화에서 온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1950년대 신약성서의 비신화론화를 제기하여 교회와 신학계에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는 불트만의 종교사학적 연구가 신선미를 주었으나, 오늘날에는 보다 포괄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의 영지주의 구속신화 가설은 더 이상 역사적 예수의 칭호와는 연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헹엘은 하나님 아들에 관한 종교사학파의 영지주의 신화 유래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첫째, 영지주의 신화는 역사적 연구의 터전 또는 자료들의 연대기를 무시하거나 임의로 조작한다. 도마행전에 나타나는 “진주의 노래” 등을 1세기로 소급시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어떠한 역사적 자료에도 영지주의 구속자 신화가 기독교 이전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없다.
둘째, 헤르메티카와 몇 가지 낙 함마디(Nag Hammadi) 문서는 후기 영지주의 문서이다(C. Colpe, Die religiongeschichtliche Schule, FRLANT 78, 1961.) 2008년 6월 말 7월 초 SBS가 방영한 “신의 길, 인간의 길”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근거된 디모디 프리크(Demothy Freke)와 피터 갠디(Peter Gandy)의 『예수는 신화』(The Jesus Mysteries)라는 저서는 이러한 낙 함마디 영지주의 문서에 근거하고 있다. 영지주의 자체는 영적 신비주의 운동으로 1세기 말경에 나타나며 2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발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성단계에 있던 영지주의가 1세기의 기독교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의 지혜문서, 쿰란문서, 그리고 필로문서에서도 영지주의적 경향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 세상이 오셨다는 기독교의 신앙이, 당시에 유포되었던 영지주의에 촉매 역할을 하였다: “예수의 출현과 또한 그는 지상에 나타난 초자연적 존재라는 믿음은 이전에 액체로 용해되어 떠다니던 요소들(영지주의)을 나타나게 했다”(A. D. Nock, 'Gnoticism." Essay 2, 940-59, HTR 57, 1964, 255-79). 고대 헬라세계에서는 오르피우스 신화에서 보는 것처럼 영혼이 방랑하는 표상이 있었다. 이것의 영향을 받아서 모든 인간의 영혼들이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와서 다시 거기로 되돌아간다는 영지주의적 표상이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지주의적 영혼 방랑의 신화와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와 보내심의 사상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들의 선재와 보내심은 역사의 완성이요 유일회적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증거한다: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이러한 초대교회 나사렛 예수에게 주어진 하나님 아들 칭호는 영지주의적 신화를 전혀 전제하지 않고 있다.
4. 세상에 보냄받은 구속자
나사렛 예수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huios tou theou)이라는 칭호는 당시의 헬라신과는 다르다. 헬레니즘의 유사형과도 다르다. 스토아주의자 고르누투스(Cornutus)는 헤르메스에 관하여 신화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제우스(Zeus)와 마야(Maia)의 아들 헤르메스는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보냄받은 로고스이다.” 인간 속에 심긴 이성의 원리를 통해서 신의 뜻을 아는 한, 헤르메스는 신의 선포자요 그의 사자이다.
역사 속으로 보냄받은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로 보냄받은 헤르메스(Hermes)는 역사 속에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와 다르다. 헤르메스는 단지 이성의 원리이며 인격적 특성을 상실하고 추상적 상징에 불과한 존재이나, 나사렛 예수는 인격적 로고스이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체적인 인간이며 인격체이며 그 속에 인격과 진리가 하나로 계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서두에 나오는 로고스는 스토아주의가 말하는 추상적인 세계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창조적인 말씀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 사상은 스토아주의가 아니라 유대교 지혜문학전승에 의존하고 있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74ff., 136ff.).
노크(A. D. Nock)는 다음 세 가지 점에서 신의 보냄 사상과 관련하여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차이를 구분하고 있다.
첫째, 오시리스와 이시스는 신에 의하여 이 세상에 도덕적인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보냄을 받는다. 이들은 “문화를 가져온 자”로서 지상에 문명의 질서를 수립한 후에 다시 하늘로 부름을 받는다. 나사렛 예수는 문화를 가져온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져온 자이다.
둘째,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인간들에게 철학의 축복을 가져다 주는 자였다. 그의 경우에는 신의 성육신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영혼들의 이주(移住) 개념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 신비종교의 창설자인 아보누데이쿠스의 알렉산더(Alexander von Abonuteichus)는 자기 자신을 피타고라스 영혼의 성육신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종교에서 피타고라스의 보냄 사상이 나온다. 피타고라스의 두 추종자가 글리콘 신에게 “그가 피타고라스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 혹은 그와 비슷한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신탁(神託)의 신인 글리콘(Glykon)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피타고라스의 영혼은 어떤 때는 커지고, 다른 때는 작아진다. 예언의 선물을 가진 그것(즉 그 자신의 영혼)은 신적인 영혼의 일부이며, (신적인) 아버지는 그것을 선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보내셨다. 그 다음 그것은 제우스의 벼락을 맞아 제우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Iamlichus, Vit. Pyth. 30f). 이에 반하여 나사렛 예수는 철학의 축복을 가져다 준 분이 아니라 복음, 즉 “하나님 나라”(basileia tou theou)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셨고, 그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었다.
셋째, 호레이스(Horace)의 종교시에는 율리우스 시이저 (Julius Caeser)를 살해하는 전과(前科)를 속죄하기 위하여 주피터(Jupiter, 고대 로마의 수호신)가 옥타비아누스를 선택하고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헤르메스- 메르쿠르(Merkury)의 성육신으로 나타나 시이저를 위하여 복수를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Carmina 1, 2, 29ff., F. Targer, Charisma II, 166f, E. Fraenkel, Horaz, 1963, 287ff.).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원수를 복수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자기 자신을 많은 자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므로 불트만을 비롯한 종교사학파들이 헬라세계에서 신적 사람(divine-men), 즉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받고 초자연적 주장을 하는 자에 대한 관념이 초대교회가 나사렛 예수에게 이 칭호를 사용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있는 증거가 될 수 없다(Carl Holladay, Theos-Anèr in Hellenistic Judaism: A Critique of the Use of the Category in New Testament Christology, Missoula, 1977).
5. 나사렛 예수의 독특성: 십자가의 죽음과 수치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
헬레니즘이나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신적 형상의 성육신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huios tou theou) 나사렛 예수와 접촉점이 되지 않고 거리낌과 장애물이 있을 뿐이다. 당시 헬라인들에게는 제우스가 올림푸스 신들 가운데 뛰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는 데 반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고대 세계의 지식인들에게나 귀족들에게 단지 어리석음, 부끄러움, 증오의 표현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헬라인들에게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절제하고, 도착적인(superstitio prava immodica) 미신을 믿는 것”이며 이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만한 사실이었다(Clem. Al, Protr, 10,96,8).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방법을 통해서 그의 오묘한 지혜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통찰한 십자가의 지혜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맺음말: 무능함과 약함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강함과 구원
십자가의 비밀이란 하나님이 세상적으로는 미련한 것으로 간주된 십자가의 수치와 무능함과 미련함을 통해서 헬라인들의 자랑과 강함과 지혜를 물리치고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아들” (huios tou theou) 칭호는 종교사적인 헬라적인 신비종교의 “신의 아들들”(paides dios, huios dios)이라는 표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계시는 자연종교적 계시표상을 뛰어 넘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자랑과 강함과 지혜가 되기보다는, 수치와 무능함과 미련함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증거해야 한다. 신자의 삶, 기독교의 모습도 이 세상에서 강하고 정복하는 세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섬기고 헌신하는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