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의 ‘선교 모라토리움’ 반작용으로 탄생한 로잔언약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기고] 로잔언약의 신학적 근거(1)

▲이동주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동주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지난 2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는 선교신학연구소 주최 ‘로잔과 에큐메니즘’ 학술세미나가 개최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발표된 이동주 박사(선교신학연구소장)의 ‘로잔 언약의 신학적 근거’를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서론

WCC는 한편으로 이미 1960년대부터 주장하던 과거의 세속화 신학과 종교다원주의 신학 내지 혼합주의 신학을 추호도 달라짐 없이 고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복음주의적 고백을 곁들이고 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이렇게 연합하기 시작한 WCC는 급속도로 최대 종교혼합주의적인 거구로 확대되었다.

신앙의 토대를 떠난 WCC 신학은 ‘혁명신학’과 ‘대화’를 통한 종교다원주의 및 종교혼합주의 인류 연합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1973년 방콕선교대회에서는 WCC에서 최초로 반선교정책인 선교-Moratorium을 실행한 바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WCC가 모든 족속, 온 인류, 모든 피조물 총체의 연합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바와는 달리, 로잔언약의 모든 족속과 온 인류는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전달 대상임을 명백히 표명하고 있다.

제10차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WCC 중앙위원들이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2012년도에 만장일치로 표명한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는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그들의 과거 종교다원주의나 세속주의 신학은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복음주의적 고백을 곁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WCC의 선언문들은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동시에 고백하는 이중진술이라는 독특성을 띄고 있다. 현재 WCC는 종교다원주의, 세속주의, 가톨릭적 신앙, 정교회적 신앙 그리고 복음주의적 고백을 모두 흡수하여 더욱 하나의 초대형 포괄적인 세계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다.

필자는 1989년도 제2차 마닐라 로잔대회와 2010년도 제3차 케이프타운 로잔대회가 조금도 변함없이 고백하고 있는 1974년 ‘로잔언약’의 신학적 선언동기를 연구하고, WCC 신학의 무엇이 문제였기에 세계 로잔운동과 로잔언약이 발생하였는지, 그리고 왜 로잔신학이 오늘날도 굳게 보전되어야 하는지, 또 복음주의자들은 WCC의 신학적 확산을 묵인할 것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예리하게 판단하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로잔언약 15개조의 표명에서 언약문 한 단어 한 단어가 의미심장하게 당시의 WCC 신학을 다루고, 이에 대해 답변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필자는 아래에 로잔언약을 기록해 그 내용을 해설하고, 본문이 고백된 신학적 이유를 파헤쳐 본다.

머리말

로잔언약의 ‘머리말’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찬양으로 시작되는 문구는 20세기 후반부터 하나님 찬양 없이 이웃 사랑에 열중하는 ‘WCC 신앙과 신학’과는 상반된다. 또 이 조항은 1960년대부터 WCC 신학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침묵하고 있는 바와 달리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선시되며, 뒤이어서야 비로소 가능한 상호간의 교제에 관해 진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 상호간의 교제와 그 범위가 광대해질수록, 그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대체하거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라면 하나의 커다란 배역이나 우상이 될 뿐이다.

1971년 설립된 WCC의 ‘대화-프로그램’은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도구가 아니라, 타종교인과 함께 진리를 찾아내는 도구이다. WCC가 선교-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서 반(反)개종주의를 추구하는 목적은 대화를 통해 세계평화 공동체를 달성하자는 데 있다.

이러한 WCC의 대화-프로그램과 반개종주의에 대립하여 로잔언약은 좋은 소식을 온 인류에게 선포하고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할 것을 언약으로 공포하고 있다.

2013년 부산총회를 앞두고 2012년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WCC 중앙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는 ‘새로운 선교성명서’가 공포되었다. 선교 모라토리움과 상반되는 고백처럼 보이는 ‘함께 생명을 향하여: 기독교의 지형변화 속에서 선교와 전도(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eing Landscapes)’라는 제목의 결론부 서두 제121항에서 125항에서 매 항마다 특히 강조되는 선교의 목적은 ‘피조물 전체(whole creation)’ 내지 창조물의 통일성(integrity oif creation)의 자유와 건강과 화해를 통한 ‘생명의 충만(fullness of life)’이다. 이 선교선언문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화해’라는 단어는 모든 피조물을 포괄하는 가시적 초대형 혼합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 그 뜻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때에 로잔언약의 의미와 그 신학적 의의는 더욱 심각하게 중요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WCC와 달리 로잔언약의 ‘온 인류’ 내지 ‘모든 민족’은 오직 구원의 대상이고 복음화의 대상이다. 복음화가 되지 않은 공동체는 아무리 거대할지라도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바벨탑 같이 부스러지기 마련이다. 이 땅의 샬롬-유토피아의 꿈에 도취 되어버린 WCC는 이미 오래 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종말의 완성에 관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다.

이에 관해 로잔언약은 그리스도의 유언과 같이 타종교와 이데올로기 간의 WCC적 ‘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고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을 것을 결단하며,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일이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이며 우리의 의무라 고백한다. 우리는 어떤 고난이 와도 타협함 없이 이 의무를 실행해야 한다.

제1조 하나님의 목적

로잔언약 1조는 복음적인 ‘신(神) 중심주의’를 표명하고 있다. 20세기 중반부터 에큐메니칼 운동은 극단적으로 인간적이고 횡적인 관심에 집착되고,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영적 문제 및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미래적 천국에 관한 종적 시야는 상실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것보다 육적문제와 땅의 문제 해결을 더 우선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로잔언약은 복음적인 ‘신 중심주의’ 신학으로 특징지워 진다. 로잔의 신 중신주의 신학은 우상과 죄악을 버리고 온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음으로 인해 그를 경외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데 목표를 두는 신학이다.

구약적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생활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샘플로 다가옴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기를 느낄 때마다 주변국의 우상을 받아들여 그것들과 함께 여호와를 섬겼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한 번도 거부한 일이 없었다. 여호와의 이름은 습관적으로 그들에게 있었고 그들은 여호와에 대한 배신감 없이 주변종교들과 합하거나 섞어서 예배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혼합주의나 다원주의 신앙을 결코 허용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의 백성의 가장 큰 악으로 판결하셨다(제1계명). 갈멜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경배를 결코 우상과 나누지 않으신다(왕상 18:21).

로잔언약의 선교 동기와 목적은 인간의 목적이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에 의한 것이라는 신 본위적 신앙 진술로 표명된다. 아울러 로잔언약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는데, 우리의 하나님은 WCC가 ‘대화-프로그램(1971년)’이 추구하는 종교다원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거부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제2조 성경의 권위와 능력

2조는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경전에 관해 고백하고 있다. 믿음의 근거인 경전관이 잘못되면 우리 신앙의 근거와 구원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로잔언약은 이 두 번째 조항에서 우리 믿음의 근거를 확실하고 단호하게 정의하고 있다. 성경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지금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음으로 온 인류는 성경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고백이다.

1971년 WCC 내부에 설치한 ‘대화-프로그램’ 책임자 S. 사마르타는 “경계선이 불안해진다”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제는 교회연합(Ökumene der kirche)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류연합(Ökumene der Menschen)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과거적 교회들간의 대화를 넘어 이제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세계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모든 종교인들의 협력을 구하였다.

그러나 성경적 에큐메니칼 운동은 로잔언약이 제6조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세계복음화 운동이어야 하고,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할 사명이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의 원어인 οἰκουμένη는 눅 4:15에서 ‘천하만국’이며,  마 24:14은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ἔν ὁλη τῆ οἰκουμένῃ)’ 전파돼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사도행전 17장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을 비난하여 ‘온 천하를(τὴν οἰκουμένεν)’ 어지럽힌다고 하였다. 에큐메니란 성경적인 의미로 ‘천국복음’을 받아야 할 온 세상을 의미한다.

온 세상, 즉 타락한 피조물의 공동체인 세상공동체는 모두 성경말씀을 들어야 하고, 교회는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문화권에 선교사들을 파송해 복음을 전하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온 교회가 전적으로 성경으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같이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제3조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

3조에서는 자연계시를 통해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로잔언약은 그리스도의 유일성만이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가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고 전제한 WCC의 대화-프로그램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 WCC는 1961년 제3차 인도 총회에서 영적 혼합주의를 표명한 바 있다. 인도 신학자 P. 데바난단은 ‘증인으로 부르심 받다(Zu Zengen berufen)’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타종교들을 “성령의 창조적인 사역에 대한 응답”이라 주장하였다. 1973년 CWME 방콕대회는 제1분과 회의를 통해 타종교 뿐 아니라 모든 다른 신앙들과 이념들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민감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1971년 인도 신학자 S. 사마르타는 세계 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 힌두교와 같은 범신론 철학체계를 수용하여 기독교 진리의 유일성을 폐지하고, 존재론을 중심으로 한 확장된 진리개념을 제시하며, 기독론과 성령론을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타종교와의 대화 문제는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umus)’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독론을 확대시킴으로서(die Christologie ausweitet), 그리고 이 세상 종교들과 세속적 이념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민감해짐으로서 ‘포괄적인 성령론(umfassende Pneumatologie)’을 만들자는 것이다.

1968년부터 1975년까지 WCC 중앙위원회 의장이었던 인도 신학자 M. M. Thomas는 혼합주의를 확고하게 세웠다. 이미 1973년 방콕 대회에서, 힌두는 ‘대화’를 통해 종교를 바꾸거나 새로운 종교 공동체로 이동해 갈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문화 공동체에 그대로 속해 있으면서 ‘기독교적 힌두(Christlicher Hindu)’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던 그는 2년 후 이 총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혼합주의(Christozentrischen Syntretismus)’를 주장했다. 이 혼합주의 공동체는 교리적 차이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WCC의 이러한 종교혼합주의적 주장은 현재까지도 굽히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1990년 정초 WCC, 정교회, 가톨릭교회가 공동으로 선언한 ‘바아르 선언문(Baar Statement)’은 “종교다원성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이해는, 태초부터 만물가운데 임재하여 활동하시는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에서 출발한다. … 인간들은 언제 어디서나 그들 가운데 임재하여 활동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해 왔으며, 그 만남을 그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증언해오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활동영역을 제한 할 수 없다. … 타종교인들의 삶과 전통 속에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활동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나 당연하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신비를 다각도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WCC에서 고백한 위 선언문들의 종교다원주의는 아직까지 부정되거나 거부된 일이 없다.

WCC가 1971년 이래 대화-프로그램을 통해 위와 같이 종교혼합주의와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쏟아낼 때, 로잔언약은 성경의 증언대로 구세주도 한 분, 복음도 오직 하나 뿐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로잔언약은 “대화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손상시킴으로 이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WCC가 하나님을 만나는 대신 이웃을 만나고, 하나님께로의 회심 대신 이웃에게로 회심하고, 하나님과의 화해 대신 인류 공동체의 화해만을 촉구할 때, 로잔언약은 구조악을 파괴함으로 구원을 달성하려는 WCC의 혁명신학이나 인류 평화공동체라는 WCC의 유토피아적 목표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적 결단에 의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으며,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의 멸망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는 정죄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 로잔이 언약하는 세계선교의 이유가 바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초청하자는데 있다.

제4조 전도의 본질

로잔언약은 전도를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이라 규명하고 WCC 개념의 ‘대화’를 거부하였으나, 4조에서 전도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대화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타종교를 수용하면서 우상숭배에 관한 개념을 분실해가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화가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라면, 로잔운동의 대화는 오직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1967년 WCC 본부 보고서 내용은 전통적인 복음전도의 ‘회심’이 세상으로부터 전환하는 운동이며, 교회 출석을 강조하고 밖에 있는 사람을 안으로 초청하는 하나님께로의 회심과 개종을 proselytism이라는 거부감 나는 단어로 격하시켰다. 이미 1963년 J. C. Hoekendijk은 이 proselytism에 대해 비판하며 “개종선교를 하는 교회가(die proselytierende Kirche) 자기를 구원의 중심으로 보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방콕대회에서 선언한 ‘선교 모라토리움’은 현대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WCC는 또한 과거의 선교가 중심으로부터 변두리로 향하고, 선교는 빈번히 포교(propaganda)로 왜곡됐으며, 사람을 기독교인의 이미지로 만들거나 교회의 탈(likeness)을 쓰도록 시도한 것인데, 이것은 선교를 변질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미 알려진 1982년도 WCC 공식문서 ‘에큐메니컬적 확언(EA, Ecumenical Affirmation)’ 제 38항에서도 전도와 선교를 “개종 강요”라고 번역하고, 선교를 중단해달라는 모라토리움(moratorium), 즉 ‘반개종주의를 선언한 것이다. 이 반개종주의 주장은 1997년 WCC가 발표한 주요 선교문서인 ‘공동의 증언을 위한 소명: 신뢰 관계의 선교와 개종주의(Proselytism) 중단’ 선언문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 선언문 내용은 단순히 개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전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은 WCC는 가톨릭, 정교회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선교와 전도에 있어 동역 관계에 함께 서 있으니 개신교인들이 가톨릭권인 남미나 정교회권인 구소련 등으로 가서 개종전도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즉 개신교회는 가톨릭권과 정교회권에서 하는 개종전도를 금지하라는 선언문이다.

WCC는 개종강요에 대해 “정통적인 기독교 증거를 왜곡시키며, 따라서 복음을 위태롭게 만드는 ‘역증거(counterwitness)’이다. 공동체를 세우기보다는 오히려 파괴하고, 긴장, 추문, 분열을 불러 일으키며,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교회의 증거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언제나 건전한 교제를 방해하고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고 비판하였다.

WCC는 비난받아야 할 ‘개종주의’를 9개 항목으로 명시하였는데, 그 중 첫째 항목에서 “성상을 받드는 모습을 우상숭배라 비난하는 행위, 마리아와 성인을 향해 우상이라고 비웃거나 죽은 자에 대한 기도를 비난하는 행위”를 지적했고, 다섯째 항목에서 “기존 교인을 다른 교회로 우인하기 위해 물질적 도움과 교육적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 일곱째 “현재 소속되어 활동하는 교회를 바꾸도록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을 유혹하거나 다른 형태의 가르침을 제공하는 행위”, 아홉째 “개종을 목적으로 외롭고 병들고 우울한 사람들, 혹은 자신이 속한 교회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을 이용하는 행위”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가톨릭권이나 정교회권에서 전도한 결실로 인한 개종은 종파나 교회집단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하는 것임을 필히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잃은 영혼을 사랑하고 돕는 일을 WCC가 사악하고 반역적인 행사로 정죄한 사실이야말로 성령을 거스르는 행위로 보인다. 진정한 회개와 개종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힘과 수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특징이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이 WCC는 복음적인 개종선교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선교사들이 엄청난 희생적인 사랑을 부으면서 자기를 헌신하고 잃은 영혼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복음적 개종 선교를 ‘회심 선교’라 칭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회심 선교(마 4:17)는 제자들에게 명하신 마지막 유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헌신적으로 회심 선교를 수행하여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얻도록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막 16:15f).

로잔언약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언약문은 선교를 ‘개종강요’가 아니라 ‘기쁜 소식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라 고백한다. 사실로 오늘날에도 선교사들이나 전도자들은 무슬림이나 힌두들에게서 큰 핍박이나 고난을 당하면서도 잃은 영혼을 사랑하는 간절함과 희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던가?

제5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로잔언약이 선포되기 한 해 전인 1973년 방콕 선교대회에서, 남미의 해방신학과 병행하여 J. 몰트만(Moltmann)이 주장하였던 구원론은 성경적 구원관과 관계없는, 현세적이고 집단적인 정치-사회적 해방을 구원으로 이해하였다. 그 내용은 구원이 ①착취를 항거한 경제적 정의를 위한 투쟁에 있고 ②억압을 항거한 인권을 위한 투쟁에 있으며 ③인간 사회의 소외를 항거한 단결을 위한 투쟁에 있고 ④절망을 항거한 희망에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러한 현세적이고 총체적인(holistic) 구원 개념은 1980년 제3차 멜버른(Melbourne) ‘세계 선교와 복음화 대회(CWME)’에서 ‘나라가 임하옵시고’ 라는 대회 제목으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멜버른 대회에서 천국이라는 단어는 ‘왕국(Reich)’으로 교체됐고, 이 왕국은 죽은 후 가는 천국이나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되는 미래적 천국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인 억압에서의 해방과 집단적 평화가 실현된 현세적인 이 땅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잔언약을 초안한 존 스토트(J. Stott)는 성경적인 구원을 신체적 건강이나 사회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개인적인 해방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며, 자유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악으로부터의 구원은 미래적인 구원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임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업적과 부분적 정치적 승리가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까지는 아직도 멸절되지 않은 죄와 죽음과 악마의 세력이 군림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선교적 봉사가 사회적 봉사보다 우선적이라는 것을 명시했다

로잔언약 5조는 에큐메니칼 학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종류의 ‘억압’, ‘해방’, ‘참여’ 등의 용어를 빌어 복음주의자들의 사회 참여에 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또 ‘구원’의 총체적(totality)인 의미, 즉 개인적·사회적으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이 두 가지가 우리의 두 가지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에큐메니칼적 구원관과의 차이점을 명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간 사이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사회적 행동이 곧 전도는 아니고,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니라”고 명시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잔언약은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기독교인의 두 가지 의무라 고백하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긴박하고 최우선적인 일은 전도라고 천명하였다<계속>.

/이동주 소장(선교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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