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동주 박사의 ‘로잔언약의 신학적 근거(3·끝)’
제11조 교육과 지도력
로잔언약은 교육의 중요성에 관해 진술한다. 교육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적 전통신앙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갈라디아서 1장 6-10절이나 고린도후서 11장 4절 말씀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선교지의 신앙과 신학에서 변질 되기란 매우 쉬운 일이며, 그러한 복음의 변질은 하나님의 저주를 부른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변질되지 않게 보존하고 그대로 전수하려면, 우리가 받은 그 복음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후손들에게 잘 가르쳐야할 것이다(마 28:20). 이 조항에서 로잔언약은 전도만큼이나 교육에도 힘쓰지 못했던 결과로 제대로 된 현지 지도자를 육성하지 못한 바를 반성하고 있다.
앞에서 서술한 인도의 토착화신학에서 우리는 실패한 기독교 교육의 한 면을 볼 수 있다. 인도에서 선교하였던 많은 선교사들이 인도의 전통 깊은 범신론적 세계관을 벗어나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도록 교육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결과, 인도출신 WCC 신학자들이 세계 선교에 미친 혼합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이 전세계로 겉잡을 수 없이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71년 ‘산 신앙인들과의 대화’ 프로그램 책임자 사마르타(S. R. Samartha)는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us)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독론을 확대시키고(die Christologie ausweitet), 포괄적인 성령론(umfassende Pneumatologie)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혼합주의의 도전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범세계적이고, 또 이 혼합주의는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그리스도를 제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통치권에 투쟁한다. 그리고 이 도전과 투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그의 재림과 동시에 깨져 버릴 것이다(살후 2:1-8). WCC의 혼합주의 원인도 교육의 실패로 보인다.
로잔운동은 토착화신학이 올바로 세워져야 함을 잘 알고 있고, 틀에 박힌 방법이 아니라 성경적 표준에 따라 그 지역에 알맞은 바른 신학교육과 훈련계획을 위한 독창성을 요청하면서,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명령을 실행에 옮길 것을 고백하고 있다.
제12조 영적 싸움
이러한 조항은 WCC와 거리가 아주 멀다. WCC는 정치-사회적인 싸움과 투쟁을 위하여 1966년 WCC 내에 ‘교회와사회협의회’를 세웠다. WCC의 ‘교회와사회협의회’는 Richard Shaull에 의하여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 협의회는 창립 후 즉시(1966년) WCC 안에 혁명신학을 주창하였다. 이 ‘교회와사회협의회’ 문서는 기독교인에게 혁명을 위한 동역의 자유를 촉구하고, 기독교인들은 힘의 구조(Machtstruktur)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말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데 있고,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그 역사에 참여하여 행동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무력 사용에 대하여 말하며, 방어 방법으로는 비폭력적인 방법이 합당하지만, 문제는 수백만을 억압하고 희생시키고 불의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불가시적인 무력에 있다며, 무혈의 무력으로 온 백성을 영원히 절망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유혈의 혁명이 더 적은 악(ein geringeres übel)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결국 비무력적인 입장이 기독교인의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절대 비폭력을 고집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으니 특수 상황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 할 수 있다는 것과, 유혈 혁명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세상의 일부, 세상의 완성, 세상을 섬기는 자 등으로 정의하며 1960년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와 손을 잡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이 땅에 하나의 왕국(새 사회)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투쟁하기에 이르렀다.
위와 같이 WCC의 싸움과 투쟁은 역사 속에서 성취하려는 집단적 구원의 도구이며, 이렇게 성취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왕국이다. 그들은 무력 사용에 대하여 무력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력을 자기 교회나 기관을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기희생적인 사용인가를 질문한다. 즉 무력 사용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질문이 아니고, 어떤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WCC는 공중권세 잡은 악의 권세자들과 능력들과의 싸움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고, 이러한 영적 투쟁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혈기와 무력이 아니라 영적으로 싸우는 것은 복음주의자들의 영적 전쟁이다. 로잔언약은 혈과 육에 대항하는 싸움이나 창과 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고, 복음에 대해 항상 적의를 품고 영혼을 노략질하며 죽이는 악한 영적 권세자들에 관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이와 대항하여 싸우는 대상은 에베소서 6장 11-12절에 기록됐듯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라고 확언하고 있다. 그 무기들은 진리와 의와 복음과 믿음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간구이다.
제13조 자유와 핍박
로잔언약은 잃은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핍박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하여 우리 주 예수께로 돌이키게 하는 사역을 잠시도 중단해서는 안될 것으로 알고 있다. 개종은 모든 우상을 버리고 잘못 믿던 신앙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선교와 복음전도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개종을 강요하는 전도자들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 오히려 오해와 멸시와 핍박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천국과 지옥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잃은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열심히 권면하는 모습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WCC가 1960년대 후반부터 기독교인을 줄기차게 개종 강요자로 표현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로잔언약은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 고난을 받으며 부당하게 투옥되고 핍박을 받는 형제들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 그러나 “핍박이 없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어떤 대가를 치러더라도 복음전도에 충성할 희생적인 각오를 다짐한다.
로잔언약은 이 조항에서 정부의 본래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정부의 사명은 교회가 간섭받지 않고 주 그리스도를 섬기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평화와 정의와 자유를 보장해야할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음을 표명하고, 또 유엔인권선언에 규정한 바와 같이 정부가 사랑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종교를 믿으며 전파할 자유를 보장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우리가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천명하고 있다.
WCC는 복음전도자들을 개종 강요자로 이해하고, 로잔운동은 복음전도자들을 핍박으로 양심의 자유와 인권조차 누리지 못하는 입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제14조 성령의 능력
로잔언약의 이 조항은 WCC의 잘못된 성령관과 크게 대조되는 조목이다. 전술된 바와 같이 P. 데바난단은 1961년 제3차 WCC 인도 총회에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다(Zu Zengen berufen)’는 제목으로 강연하면서 타종교들을 “성령의 창조적인 사역에 대한 응답”이라 주장하였다. 비츠케(J. Wietzke)는 데바난단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신힌두교(현대 힌두교) 속에서 보았다고 하며, 힌두교와 타종교들의 재부흥 발전을 바로 성령의 사역에 의한 응답이라고 주장한 바를 확언하고 있다.
Devananden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과 타종교들의 다양한 종교체험을 혼돈함으로서 영적 혼합주의적 종교다원주의를 수립하려고 한 것이다. WCC ‘대화-프로그램’의 대부 사마르타에게는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영들을 오순절에 강림하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의 영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Mächte)이 구별되지 않는다. 사마르타가 창조자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자신의 영을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공중권세 잡은 악한 피조물의 영들과 혼돈한 것은 매우 심각한 신학적 문제이다.
우리는 이미 1991년 제7차 WCC총회의 혼합주의 영성에 관해 잘 알고 있다. ‘성령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총회 주제로 강연하였던 강사 정현경은 예수의 영과 더불어 한 맺혀 죽은 영혼들을 초청하고 사령과 혼돈한 ‘성령’을 초혼하기도 하였다. 정현경의 신학에는 샤머니즘과 범신론이 다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정현경은 창조주 자신의 영과 죽은 사람의 혼의 질적 차이를 전혀 구별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한국 재래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신학교수가 되었고, 기독교 세계관을 소유하지 못한 채 WCC총회의 강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을 氣와도 동일시하고, 성령을 여성 신이라고도 하고, 성령의 사상이 관음으로부터 왔다고도 하며 “그녀를 맞으라”고도 하였다. 이렇게 그는 성령을 모든 피조물, 사령, 동물 영, 자연 영, 기, 여신, 보살과 동일시함으로서 복음적인 신앙을 버리고 모든 종교혼합주의 영에 굴복한 것이다.
WCC의 성령관과는 대조적으로 로잔언약은 성령을 세상의 영도 아니고, 인간의 영도 아니고, 타종교들의 영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대속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부터 하나님이 새로 부어 주신 약속된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의 영으로 설명한다(행 1:8, 2:38). 로잔언약은 이 조항에서 ‘성령의 능력’에 대한 고백을 아들에 관한 증거능력 내지 세계복음화를 가능하게 하는 교회의 능력으로 설명한다(행 1:8).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은 하나님 자신의 영이며, 또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심을 고백한다.
로잔언약에서 하나님이 새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영’은 이미 온 우주에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죄 사함 받은 영혼에게 오셔서 내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영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 영은 창조 때부터 모든 피조물에게 임재해 계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안에 계시고 또 이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을 말씀함이다(요 14:16f). 이 영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거듭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역사를 한다.
로잔언약은 성령을 선교의 영이라 고백한다.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은 특별한 소명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것이다(고전 12:3, 요일 2:22f). 이 증거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로잔언약은 이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모든 열매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도록 기도할 것을 요청한다. 이는 교회가 온 땅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기 위함이다.
제15조 그리스도의 재림론
이는 WCC와 관계 없이 로잔언약에만 있는 성경적 종말론이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완성될 미래적 종말에 관해서는 전혀 잊어버린 듯 하다. WCC의 ‘하나님 나라’는 샬롬을 온 피조물 위에 수립하는 것이다. WCC는 시종 샬롬왕국이라는 역사 내적 유토피아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는 이유로 오직 현재적인 하나님의 통치(schon jetzt)와, 옛 질서는 사라지고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낙관적인 역사관에 심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같이 WCC의 시야는 극단적으로 인간적이고 횡적인 관심에 집착되고, 일반적으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질 미래적 천국(행 1:8-11)에 관한 종적 시야는 상실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잔언약은 성경과 같이 미래적 종말관을 조장한다.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 기간’을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선교사역 시대로 확언한다(마 24:14). 그러나 종말이 오기 전에 세계복음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선지자들의 출현에 대해 경고했다. 이러한 종말개념은 WCC에서 오래 전 사라졌다. 그러므로 로잔언약은 미래적인(noch nicht)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고. 이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WCC 사상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로잔운동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 그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과 통치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한다고 고백한다. 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그의 재림 시에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확언한다. 그리고 이 천국이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 나라는 재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된다. 로잔언약은 성경의 약속과 같이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면서 구원과 심판이 완성될 것을 믿는다.그 때 까지 로잔운동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일할 것을 위해 엄숙히 언약한 것이다.
결론
현대의 대표적인 WCC의 신학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원론적 역사관으로서 구속사와 세속사 내지 교회와 세상의 이중 역사를 부정한다. WCC신학의 공통성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하나도 제외될 수 없는 온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한 점이다. 교회는 세상의 일부일 뿐이다. 주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 또는 최후의 심판 같은 것은 놓쳐 버렸다.
둘째로 이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대신 이웃을 만나고, 하나님께로의 회심 대신에 이웃에게로 회심하며,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화해 대신에 인류 공동체를 위한 화해만을 추구한다.
셋째로 복음의 절대성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거부되고, 그 대신 보편주의 및 상대주의 시대적인 유행을 따라서, 다른 종교들 속에도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 그리고 구원’까지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와 종교 혼합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넷째로 위와 같은 신학적인 변화를 토대로 WCC는 반선교정책인 모라토라움(Moratorium)을 주장하고, 종래의 선교는 평화운동, 해방운동, 생명운동, 개발, 정의 및 인권운동 등으로 바뀌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로의 회개도 성령의 역사도 없는(행2:28) 구원의 상실을 초래하게 되었다(눅12:4,5).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들 내지 WCC 신학은 한편으로 만인의 평화와 인권 옹호, 그리고 경제 사회 정치적인 샬롬운동과 같은 실천을 강조하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잔신학의 특징은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성경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둘째 개인적인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 셋째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는 성령에 대한 신앙, 넷째 모든 민족과 나라를 위한 선교와 복음화 및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지,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다.
로잔언약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한다는 세계 복음화라는 포괄성을 선교 목표로 알고 있다. 이 포괄성에는 형식적인 말이나 글로가 아니라 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전제가 확고하게 깔려 있다(요 1:12). 반면 WCC의 세계연합적 포괄주의는 로잔운동과 같이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과 다른 것이다. WCC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일체 믿음을 요청하지 않는다. 로마서 3장 19-22절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선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됨을 명시하고 있다.
로잔언약은 WCC의 비복음적인 세계연합운동의 신학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모든 잃은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소원하여 세계복음화를 촉구하며, 어떤 환경에서라도 세계복음화를 실행해야 할 의무를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잔(Lausanne) 참가자들은 복음주의에 헌신적이어야 하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하고, 복음전도, 구원, 그리고 회심에 대해 성경적 견해를 고수해야 하며, 온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계획하고 일할 것을 언약하였다.
/이동주 소장(선교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