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4] 가나의 혼인 잔치
요한복음은 생명에 관한 말씀이다. 요한복음의 서론과 같은 1장을 간략하게 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만나 그분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2장부터는 자세한 설명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사흘되던 날에”, 영어로는 셋째 날이라는 뜻이다. 언제부터 계산했는지는 모른다. 1장부터 날짜를 하루하루 계산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흘에는 어떤 영적인 뜻이 있다. 사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다. 바로 직전부터 따지자면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 하루를 지낸 날이다. 그리고 벳새다 사람 나다나엘이 예수를 만난 날이 사흘째다. 인생의 참된 시작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난 시점부터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누군지 아셨다. 그분은 영원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사흘’이 아니라도, 죽고 부활한 사건이 없어도 다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지 않고는 사람들에게 주실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특히 ‘부활’이 들어 있다. 부활과 생명은 관련이 있다(요11:25). 부활하지 않고는 인생들에게 포도주를 주실 수 없다는 것이다.
1장에서 초점이 되는 단어는 ‘생명’이다. 이 생명은 2장에서 포도주로 나타난다. 이 일이 일어난 곳은 갈릴리 가나였다. 갈릴리는 당시 이방으로, 순수한 유대 혈통만 사는 곳이 아니라 섞여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갈릴리는 멸시 받는 땅이었다. 가나는 ‘갈대’라는 뜻이다. 갈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연약하고 흔들리는 인간들을 뜻한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 생명 주는 역사는 주로 천대받고 멸시받는 자들 가운데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멸시받는 자를 택하신다. 하나님은 ‘가나’가 뜻하듯 연약하고 불쌍한 인생들, 멸시받는 자들을 찾아오셨다.
11절에서는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라고 하셨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처음 표적이다. ‘표적’(sign)은 헬라어로는 ‘쎄메이온’이다. 이는 기적과 다르다. 기적은 그 역사 자체가 놀라운 일이지만, 표적은 기적에 어떤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혼인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때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아들의 혼인 잔치로 비유해서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율법은 그렇지 않다. ‘와서 일하라, 올바르게 행하라, 금식하라, 열심히 신앙생활해라’는 등 사람을 힘들게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의 생명 주는 일, 참 빛이신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 되는 일은 복음이다. 그래서 이 사건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가 그 자리에 계셨다.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안 계시면 아무 이야깃거리가 없다.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로부터 시작된다. 신약의 시작도, 요한복음의 시작도 말씀(예수)으로 된다. 어쩌면 그 혼인집은 어머니 마리아와 친한 집안이어서, 어머니가 가서 일을 도왔을지 모르겠다. 그러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와서 드시라고 초청을 받은 것 같다.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연약한 인생들은 뭔가 즐거움을 추구한다. 혼인 잔치의 꽃은 술이다. 술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 사람들은 이 달콤한 포도주로 인생의 맛을 내고 싶어 한다. 학문적 성취를 위해 애쓰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권력을 잡으려, 벗들과 우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뛰어다닌다. 그것이 나름대로 인생의 맛을 더하는 포도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포도주가 언제나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떨어진다. 영어로는 ‘run out’,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니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이 즐거워야 하는데, 그 즐겁게 하는 요인인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오늘날 병원에 가보면 소망 없이 누워있는 많은 환자들 얼굴에서 인생의 포도주가 떨어진 모습을 본다. 나이 들어 돈도 없고 버림받은 것 같은 노인들의 얼굴에서 그런 무표정을 읽는다. 그들도 젊었을 때는 달콤한 포도주를 누릴 때가 있었다. 청년 시절이 있었고, 친구들과 보냈던 즐거운 시절이 있었으며, 연애 시절과 혼인 시절이 다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인생의 포도주는 세월이 가면서 떨어진다. 나이가 들어보라.
이 세상의 정욕과 즐거움과 모든 것이 떨어져버린다. 그리고 인생의 재미가 별로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재밌는 포도주를 또 만들어보려 애를 쓴다. 동창회를 만들고, 친구들끼리 재미있는 인터넷 카페도 만든다. 실상 종교 생활도 일종의 포도주를 만들려는 생활이다. 만일 그곳에 예수와 십자가 없이 율법만 있다면, 그 종교 생활 역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아, 인생은 별것 아니구나’ ‘교회 생활도 참 힘들구나’ 모두 ‘가나’로구나! 하며 깨닫는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아무 맛 없는 맹물임을 느낀다. 조금 남아 있던 포도주는 떨어져 버리고 만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생명의 역사를 하시러 오신 것이다. 요한복음 2장의 요점이다. 1장에서는 대원칙만 이야기하고 있지만 2장에서는 그 원칙이 어떻게 적용되는 것인가를 하나씩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순종을 했고, 돌이킴이 있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시키든 그대로 하라고 당부한다. 예수를 오래 따른 자와 어린 자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육체적인 어린 성도들은 진리가 도달해도 쉽게 돌이키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6 거기 유대인의 결례에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주님은 물을 채우라고 하셨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라는 대로 했다. 그들은 ‘지금 필요한 것은 포도주입니다. 물을 채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라고 하지 않았다. 하인들은 아무 말 없이 물을 채웠다. 이것은 예수의 방법이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탐욕이 있고 나쁜 기질이 있고 습관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버리는가? 세상 사람들의 생각 같아서는 아주 눈물을 많이 흘리고 고통스럽고 참담한 심정을 느껴야 하고 많은 시간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늘 간단하다. 방법이 다르시다. ‘주 예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는다.’ 그대로 하면 된다.
예수님은 돌 항아리 6개(6은 인간을 표시하는 수)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했고, 그들은 말씀 그대로 아구까지 가득 채웠다. 순종하는 사람들은 온전한 방식으로 해야 한다. 그 돌항아리에는 물이 굉장히 많이 들어갔다. ‘아구까지’ 라는 말은 계속 부어 넘칠만큼 가득 채웠다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요 순종이다. 믿음과 순종이 없는 곳에서 주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땅끝까지 다니면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한두 번 해 보다 안 되면 그만둔다. 한 통 정도 붓고서 ‘기적이 일어나나 보자’고 하지만, 안 된다. 그리고는 아예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전도를 많이 해본 사람은 경험이 있다. ‘오늘 한 사람은 반드시 구원시켜야지’ 하면서 다니다가 5명을 만났는데 한 사람도 못 얻고는 피곤해서 집에 돌아가려다 ‘그래도 한 명만 더 해보자’ 하고 6명째 전했을 때 사람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아구까지 채운다는 것은 무엇을 하든 힘을 다해 ‘말씀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무슨 기적을 행사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편에서 말씀을 순종하여 온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그들이 아구까지 채웠을 때, 예수님은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하셨다. 연회장이란 잔치의 ‘호스트’, 잔치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의 맛을 보고는 ‘어디서 난 포도주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출처를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물 떠온 하인들은 알았다(9절). 연회장은 교회로 말하면, 지위만 갖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이다. 그런데 물을 떠온 사람은 인생의 끝창까지 갔다가,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교회에도 무엇이든 남을 시키고 대우나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성도들 속에 일어나는 기적의 생명의 역사를 모른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먼저 좋은 포도주로 취하게 한 다음 정신이 없을 때 안 좋은 포도주를 낸다. 그런데 여기 있는 이 포도주, 이전에 마셨던 것보다 더 좋은 포도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생명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이리저리 다니면서 나름대로 포도주를 찾고 있다. 이 세상의 행복과 쾌락, 많은 친구들, 성공, 부귀, 물질 등이 혹시 인생에게 포도주를 갖다 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포도주가 다 떨어져 물을 가득 채웠다.
물은 생명을 뜻하기도 하고, 반대로 사망을 뜻하기도 한다. 물이 좋은 것이면 왜 포도주로 바꾸겠는가? 따라서 여기서 물은 사망의 물, 침례의 물로 해석함이 옳다. 이는 요한복음 3장의 물도 같다. 이 아구까지 물을 채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때 물이 생명으로 화하는가? 바로 사람의 상태가 극도로 사망에 이르렀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라고 하면 ‘아직 멀었어. 좀 더 즐기다…’ 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아직 아구까지 차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할 것 다 해보고, 맛볼 것 다 맛보고 나니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다. 사망이 아구까지 찬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생명의 역사는 바로 그때 일어난다.
교회생활이든 사역이든 마찬가지이다. 누가 나에게 사역의 경험을 말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한 마디로 할 수 있다. ‘실패’이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잘 한 것이 별로 없고 온통 실수와 실패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원칙은 기묘하다. 마지막의 그 순간이, 그분의 일의 시작이다. 내가 사역의 실패로 인하여 절망과 좌절 속에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 주 예수는 사망의 물을 생기와 활력의 포도주로 바꾸셨다.
이처럼 2장에서는 1장의 생명의 역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원칙으로 일어나야 하는지 알려준다. 귀한 생명의 역사를 물과 포도주로 비교했다.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던 것은 물이다. 포도주는 새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좋은 포도주를 얻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도 되묻는다. ‘예수를 안 믿으면 무슨 맛으로 사는가?’ 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여러분이 절망스럽고 이제 끝이다 할 바로 그때, 주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실 수 있다. 절망스러운가? 잠시만 기다려보라! 순종과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움직여보라!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마시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다. 물을 술(포도주)로 변케 하신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전문가들은 포도의 생산과 포도주를 만드는 많은 과정에서, 좋은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과학과 미생물학이 이렇게 발전된 현실에서도, 포도주가 어떻게 숙성되고 발효하는지 그 매커니즘조차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최상의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었는가? 우리는 요한복음 2장에서부터 인간이 도무지 이를 수 없는 경지의 일을 해내시는 한 분을 대하게 된다. 아! 이분이 누구신가? 모든 사람이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처음 표적
이는 또한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표적’으로, 주님이 행하신 처음 표적이었다. 요한복음에서 1장에서 21장까지 주의깊게 읽어보면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이라는 단어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 우리 인간에게는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 없다. 예수님은 물을 돌항아리 6개에 담으라고 하셨다. 6은 사람의 숫자, 인간의 숫자이다. 물은 사망도 뜻한다. 물이 포도주가 되어야 뭔가 내용이 있게 된다. 돌항아리에 가득 부은 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다. 그런 우리가 주 예수를 믿었다. 주님이 기적을 베푸는 순간 믿은 사람은 그 내용물이 변한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 과거에 우리가 갖지 못했던 생명을 얻는다. 이것을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일은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표적’으로서 주님이 행하신 처음 표적이었다. 이것은 기적일 뿐 아니라 표적이다. 헬라어로 기적은 ‘두나미스’라는 말을, 표적은 ‘쎄메이온’, 사인(sign)으로 거기에는 어떤 뜻이 포함되어 있다. 물은 마시면 그냥 우리를 살게 한다. 생명을 유지하게 한다. 그런데 포도주는 마셨을 때 뭔가 들뜨게 하고, 일깨우며, 재미있고 활력 있게 만든다. 인생이 예수를 안 믿으면 생명이 없다. 포도주가 없다. 그 사람은 그냥 아무 맛도 없이 그냥 살아간다. 그래서 술이라도 마셔야 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성령이 곧 술이다. 세상의 술은 한 번 마실 때는 좋지만, 깰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 그런데 성령의 포도주는 즐거움이 그치지 않는다.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용기와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주며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이 생명의 누림이 없고 이 생명의 체험이 없다면 그 사람은 점검해봐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래 술보다 나중에 예수님이 만들어주신 그 포도주가 더 맛있다고 했다. 원래 인간이 추구했던 쾌락이나 즐거움 같은 세상 술보다 예수 믿어서 얻은 그 생명의 술이 훨씬 좋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고향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