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 (59)
머리말
“하나님의 아들”(huios tou theou) 칭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동의 주변 종교세계가 아니라 유대교의 자료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 먼저 유대교 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개념을 해명해 보기로 한다. 「예수 시락서」, 「솔로몬 지혜서」, 쿰란 제4동굴에서 발견된 문서의 단편, 유대신비주의 텍스트인 「히브리인의 에녹3서」,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철학 등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 내지 “지혜”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분석해보기로 한다. 이 분석을 통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칭호의 독특성을 밝힐 수 있다. 필자는 이 분야에 주도적인 공헌을 한 독일 튀빙엔의 신약학자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의 기념비적 저서 『유대교와 헬레니즘』(Judaism and Hellenism I, 1974) 및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에 자료들을 의존하고 있다.
1. 유대 지혜문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유대 지혜문서에서는 특정한 지혜자들, 그리고 의로운 자에게 “하나님의 아들” 용어를 개인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예수 시락서」는 다윗 왕을 지혜자 내지 의로운 자로 지칭한다: “고아들의 아버지와 같이 되어, 그들의 어머니의 남편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을 그의 아들로 부르셔서,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사 죽음으로부터 당신을 구원하셨다.”(예수 시락서 41:0). 이 구절은 하나님이 다윗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셨다고 지칭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쓴 「솔로몬의 지혜서」는 이상적인 의인의 죽음을 기술하고 있는데 그는 무신론자에 의하여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다. “만약 의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은 그를 도울 것이며, 그의 적들의 손에서 그를 구원할 것이다”(솔로몬 지혜서 2:18). 의인은 그의 죽음 후에, “하나님의 아들들”, 즉 “천사들”(솔로몬의 지혜서 5:5)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I. Rupprecht, Der leidende Gerechte, 1972, 78f., 84, 91, K. Berger, ZTK 71, 1974, 18ff.).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이 쓴 소설 『요셉과 아세나트』에서, 이집트인 사제의 딸인 아제나트와 비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인 미모와 지혜 때문에 요셉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의 형제 레위는 그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만 부른다(Joseph and Asenath 6:2-6).
쿰란 제4동굴에서 발견된 문서의 단편은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 전통을 알려준다. 이 텍스트는 구약성경으로부터 온 메시아적인 인용문들을 가지고 있다.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오는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라는 선지자 나단의 신탁은 “다윗의 새 싹”(shoot of David), 즉 마지막 날에 시온에서 나타날 다윗 혈통의 메시아로 전용되었다(4QFlor I, 11f., Hengel, 『하나님의 아들』, 69 재인용).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는 쿰란 제4동굴에서 나온, 아람어로 된 또다른 텍스트에서도 나타난다. 피츠마이어(J. A. Fitzmyer)의 번역이다: “…(그러나 너희 아들은) 지상에서 위대하게 될 것이다. (오! 왕이여,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모든 사람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요, 그의 이름으로 그는 명명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환영받을 것이며, 그들은 그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부를 것이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70). 이 내용은 종말론적 내용을 지닌 다니엘 외경에서 온 것으로 추정한다. 이 글에서 아들이란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의 통치자”, “인자”, “유대민족” 등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어떻게 해석되든지 간에 이 구절은 누가복음 1장 32-35절: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에 나오는 메시아적인 “하나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와 비슷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용어가 팔레스타인 유대교에 전적으로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Billerbeck, III, 19ff.). 의인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종과 고난 등의 언급은 공관복음서의 고난받는 종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유사성이 있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의 아들 사상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에 대한 기대를 조성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림자요, 선형상에 불과한 것이요, 하나의 형식상의 연관만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 기독론의 핵심이 되고 있는 형식, 즉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선재와 보내심이라는 형식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2. 유대 신비주의의 천사장 “메타트론”
유대 신비주의는 “메타트론”(Metatron)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메타트론은 구약성경, 신약성경, 쿰란문서에는 언급되지 않는 천사이다. 탈무드에서는 간략히 언급되고 있으나, 중세 유대교 신비주의 문헌에서는 1차적으로 나타난다(Metatron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랍비전통에서 메타트론은 천사장으로서 천상의 서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Babylonian Talmud, Hagiga 15a). 또는 그는 하늘의 고위 사제로서 의(義)로운 자들의 영혼을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로서 제공하는 자이다(Num R. 12:12). 유대교의 그림에 의하면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자 “네 아들에 손 대지 말라”고 제지하던 천사가 메타트론이라고 한다.
유대 신비주의 텍스트인 「히브리인의 에녹3서」(Third Hewbrew Book of Enoch)에 의하면 창세기 5장 24절에 따라 인간 에녹이 지극히 높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 불꽃의 형상을 한 천사로 변화하였다. 「히브리인의 에녹3서」에서는 메타트론이 “세상의 왕자”(에녹3서 30:20, 38:3), “작은 야훼"(에녹3서 12:5)로 호칭되고 있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111). 그러므로 랍비들은 “그의 이름이 그의 주의 이름과 비슷하기 때문에”(Sanh. 38b) 메타트론을 하나님 자신과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112).
메타트론은 하나님은 아니나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존귀한 천사로서, 신약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에 대한 선이해의 지평을 준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심지어는 성도들과 천사들 사이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무덤에서 살아나신 예수요, 성도들은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요, 천사들은 미가엘이나 가브리엘이나 메타트론이든지 간에 택함을 받은 성도들을 위해 섬기는 하나님의 종들에 불과하다.
3. 유대교 외경 「요셉의 기도서」에 나타나는 야곱의 지위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사용한, 유대교 문서인 「요셉의 기도서」(Prayer of Joseph)의 단편이 초대교부의 오리겐의 요한복음주석에서 인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대인의 선조인 “야곱 이스라엘”(Jacob Israel)은 “주의 권세를 가진 천사장과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최고사령관”이 성육신한 것으로 나타난다(Origen, In: Joh.2:31 § 189f. GCS 10, 88f.). 야곱은 다른 족장인 아브라함, 이삭과 함께 “모든 피조물 이전에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을 본 사람”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모든 생물 가운데 맨 먼저 난 자라는 뜻이다. 그는 익명으로 지상에 내려왔다. 서열로 볼 때 야곱의 훨씬 뒤에 위치한 천사 우리엘(Uriel)은 야곱에 대한 시기심이 불타올라 양복강에서 그와 싸웠다(창 32:25). 그는 야곱에게 패했는데 야곱의 높은 신분에 기인한다. 출애굽기 4장 22절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는 말씀은 야곱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야곱은 인간 모양을 취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될, 선재하는 지고의 영적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야곱-이스라엘은 그의 자손들에게 하나님 백성의 모든 미래를 선포할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들은 유대교 문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구약성경에 비추어 보면 전혀 황당한 내용들이다. 단지 구약정경과 일치하는 것은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야곱이 임종 전에 그의 12지파들에게 축복하는 것이다. 야곱이 선재(先在)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에서와 쌍둥이로서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야곱은 거짓말을 하여 장자의 명분을 얻은 자이다. 그는 윤리적으로 흠이 많은 자이다. 야곱은 서열에 있어서 천사와 결코 우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선재(先在)한 자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얍복강에서 형 에서로부터 20년 전 그에게 거짓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은 대가에 대하여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 하나님에게 매달린 연약한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선재하는 지고의 영적 존재자”로 숭앙하는 「요셉의 기도서」는 전혀 창세기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이 유대외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하나의 그림자, 선형상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문서에서 나타나는 호칭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이 증언하는 바 시간 이전의 영원한 선재, 창조의 중재, 보내심을 받음, 그리고 성육신과 수난을 통한 속죄에 대한 설명은 없다.
4. 유대교 문서 「예수 시락서」의 선재하는 지혜
「예수 시락서」(Jesus Ben Sirach)는 지혜를 창조와 계시에 나타나는 중재자로 이해한다. 지혜는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인간에게 이성을 제공한다. “지혜를 모든 그의 피조물에게 쏟아놓았다”(Sir. 1:9). 벤 시락(Ben Sirach)은 지혜의 우주적 성격과 동시에 철저한 배타성을 선언한다. 지혜는 지상과 천상을 다녔지만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였다. “그때 만물의 창조자가 나에게 계명을 주셨고, 나를 만드신 분이 나의 천막을 위하여 한 장소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그 분은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안에서 거처를 정해야 하며, 이스라엘 안에서 상속을 받아야 한다’. 원시로부터, 태초로부터, 나는 창조되었으며, 영원까지 나는 소멸하지 않은 것이다. 거룩한 천막 안에서 나는 그에게 봉사하였고, 그 후에 나는 시온에 정좌하였다. 그가 나와 같이 사랑하던 도성 안에서 나는 안식처를 발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나의 주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영예스러운 백성, 주(Lord)의 분깃, 그의 유산 안에서 자리를 찾았다”(Sir.24:8-12).
이 배타적인 제한은 지혜로 하여금 모세의 율법에 일치하도록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책이요, 모세는 야곱의 회중을 위한 유산으로서 우리에게 율법을 명하셨다”(Sir 24:23). 이러한 사실은 신적 지혜가 하나님에 의하여 지상에 우주적 실재로서 지상의 특정한 장소에 파견되었고, 동시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위탁된 율법의 형태를 취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지혜와 토라(Thora)의 일치성을 믿었고, 동시에 지혜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
1세기의 유대교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는 지혜-토라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할 때 가지신 건축설계도에 비유하였다. 지혜와 토라는 “하나님의 딸”로 불린다. 지혜는 “하나님의 딸이요, 맨 먼저 태어난 우주의 어머니이다”(Philo, Quaestines in Genesin. 4:97).
「예수 시락서」와 필로의 철학에서 나오는 지혜는 구약성경이 말하는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海面)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 8:22-31). 그리고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일치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유대의 지혜문서나 잠언의 지혜문서는 지혜를 창조자와 동일시하나 지혜의 성육신에 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유대 지혜문서의 지혜가 가지는 한계이다. 이에 반하여 신약의 요한복음은 지혜인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요 1:14-15).
5.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하나님 사람”
사도 바울보다 한 세대 이전의 사람인 유대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잠언 8장 22절의 지혜찬가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신의 씨앗(자손)을 잉태하여 그녀의 산고가 끝났을 때, 그녀는 우리가 보는 세계와 감관에 의하여 인지될 수 있는 독생자를 낳았다”(De ebr. 30f.: De fuga. 109). 필로는 플라톤철학을 가져다가 영적인 이데아 세계와 가시적인 세계로 구분한다. 이데아 세계는 장자요 첫 아들이며, “제2의 신”(doiteros theos)이며, 가시적인 세계는 “작은 아들”이며, 시간은 “하나님의 손자”다. 그는 신적 세계 이성으로의 로고스에 일치하며, 지혜는 영원한 하나님과 피조된 가시적 세계 사이의 중재자로서 하나님의 형상(aikon)이시다(F.-W. Eltester, Eikon im Neuen Testament, BZNW 23, 1958, 35ff.). 필로는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인간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그는 신명기 14장 1절, 32장 18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린다고 강조한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79). 이것은 필로에 있어서 전통적인 스토아 철학 형식으로 보충된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기에 적합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로고스, 즉 하나님의 장자(長子)에 복종해야 한다. 로고스는 천사들 가운데서 가장 높으며, 대제사장이며, 많은 이름을 가진 자이다. 그는 동시에 또한 처음 난 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 말씀, 형상화한 인간, 그리고 목격자, 즉 이스라엘로 불린다”(Hengel, 『하나님의 아들』, 79에서 재인용). 필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 대신에 “하나님의 사람”(anthropos tou theou)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이 용어는 ‘천상적 최초의 인간’, ‘로고스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지혜자’를 뜻하기도 한다. 에녹은 참된 사람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모형에 소급된다. 그러나 유대교 사상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 사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유대교 사상과 헬레니즘 사상 사이를 자유분방하게 드나든 필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구속사에 있어서 구체적인 인물(아브라함 등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거의 적용하지 않았고, 철학적인 용어(신으로부터의 출생과 출산)로 주로 사용하였다.
6. 십자가의 도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극형(極刑)을 받아 죽은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세상적인 미련함
신약성경에서는 요한과 바울이 기독론과 관련하여 지혜의 전통을 수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복음에는 이 지혜가 유용하지 못하고 거리낌이 됨을 증언하고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는 지혜는 헬라적인 우주적인 보편적인 지혜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자가 “하나님의 아들”(huios tou theou)이라는, 십자가의 역설과 미련함의 지혜이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바울은 증언하고 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그 이유는 유대인은 메시아에 대한 세속적인 표적을 요구하고, 헬라인은 이성적인 합리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2-23). 바울은 로마시대 극형으로 죽은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십자가의 도(道, the logos of the cross)란, 우주적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련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도는 미련함을 통하여 그의 지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ho logos tou staurou)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십자가 처형은 로마 시대에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형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노예들이나 반역자들에게 주는 형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러한 형벌을 받는 것을 당시에 건전한 양식(지혜)를 지닌 자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맺음말
유대의 지혜문서나 잠언의 지혜문서는 지혜를 창조자와 동일시하나 지혜의 성육신에 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인간을 “선재하는 지고의 영적 존재자”로 숭앙하는 「요셉의 기도서」는 전혀 창세기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구약 외경 문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 용어는 신약의 용어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수난을 통한 속죄에 대한 암시는 없다. 필로의 문서도 구속사에 있어서 구체적인 인물(아브라함 등 이스라엘 족장들)에게 거의 적용하지 않았고 철학적인 용어(신으로부터의 출생과 출산)로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으로 부름을 받는 것은 세상적인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된 것을 증언하고 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4-25). 십자가에 못박혀 수치스럽게 죽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미련하고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세상적으로 지혜나 문벌 있는 자들이 많지 않았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지혜를 미련하게 만들어 인간들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그분의 구속의 섭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기”(고전 1:27)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