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칼럼] 목회자들과 나누고 싶은 나의 목회 시절

류재광 기자  jgryoo@chtoday.co.kr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심부름꾼으로 써 주시옵소서“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지난 2월 “대학생들과 나누고 싶은 나의 대학생 시절의 추억들”이란 제목의 글을 썼고(3월 9일 크리스천투데이에 실림), 지난 3월 “신학생들과 나누고 싶은 나의 신학생 시절의 추억들”이란 제목의 글을 썼는데(3월 16일 뉴스파워에 실림), 지금 4월에 접어들면서 “목회자들과 나누고 싶은 나의 목회 시절의 추억들”이란 제목의 글을 쓴다.

나는 허물과 죄악이 너무 많은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거의 한평생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지니고 목회의 길과 선교의 길로 걸어온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 덕분이고 부모님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님들이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심어주시고 물려주신 믿음, 소망, 사랑, 회개, 기도, 헌신, 전도, 봉사의 영적 씨앗과 유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날의 추억들을 되돌아보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쓴다.

첫째, 왕십리에서 개척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나는 부족하고 부족한 죄인이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와 대학교 1학년 때 왕십리 벌판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며 개척교회를 세운 일이 있었다. 새벽마다 우시면서 회개하시고 2만8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고 호소하시던, 창동교회 김치선 목사님의 영향 때문이었다. 고등학생의 교복을 입고 토요일과 주일마다 왕십리 벌판에 나가서 우물을 파기 위해 전도한 결과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벌판에서, 얼마 후에는 학교의 교실을 빌려서 함께 모였고, 나중에는 천막을 사다가 치고 거기에서 함께 모였다. 그리고 “한양제일교회”라는 간판을 써서 붙였다. 1, 2년이 지나는 동안 80여명의 어린이들과 40여명의 어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비록 초라한 천막 교회였지만 어떤 여성도 한 분은 “우리 한양제일교회가 제일 좋은 교회에요”라고 말해서 기분이 무척 좋았다. 내가 대학생의 교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는 천사의 모습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가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사실 고3 때는 모두 공부에 전념하는데, 나는 전도와 목회에 전념했다. 나는 언제나 공부는 둘째였고 신앙생활과 전도와 목회가 첫째였다. 나는 평생 공부는 둘째였지만 비교적 잘 했다. 좋은 목사가 되려면 역사를 전공하는 것이 좋다는 한경직 목사님의 조언에 따라서 나는 서울 문리대 사학과에 응시했는데 아무 어려움 없이 합격했다. 역사를 전공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른다. 평생 감사하고 있다. 대학교 1학년 때도 열심히 전도와 목회를 하다가,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어느 전도사가 교회를 자기에게 물려 줄 수 없느냐고 해서 나는 쾌히 물려주고 본 교회인 창동교회로 돌아왔다.

둘째, 후암교회에서 교육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12년 동안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1974년 가을에 귀국한 후, 후암교회에서 5년 동안 대학생과 청년들을 지도하며 교육목사로 목회한 일이 있었다. 목회 초년생이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사역에 임했는데, 많은 젊은이들의 삶이 변화되었고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즉 선교의 길과 목회의 길로 가게 된 젊은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안성원, 김동화, 박선규, 최성호, 이진, 양용태, 한옥희, 탁정희 등이 목사 또는 선교사로 헌신해서 지금까지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박선규는 내가 노방전도하다가 길거리에서 만난 청년인데, 나중에 목사가 되어서 목회와 선교를 아주 잘 하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내가 후암교회에서 목회할 때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저들을 찾아다니면서 돌아보았는데, 병중에 있던 어린 아들 철원이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후암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사역할 때 있었던 일 하나를 소개한다. 1976년 여름 대학생들을 데리고 충청북도 괴산군 옥현리에 가서 하기 학교를 하던 중이었다. 그 동네의 청년들 20여명이 교회 근처에 와서 유행가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예정에 없던 전도의 대화를 저녁마다 그들과 나누기 시작했다. 목요일 밤 동네 청년들을 교회당에 모아 놓고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이야기를 했다. 전도 설교를 들은 청년 하나가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며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다. 다른 청년 하나가 또 앞으로 나오더니 자기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다. 청년 하나는 자기는 청주에서 잘 알려진 불량배인데 자기도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했다. 그날 밤, 15-16명의 청년들이 하나하나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거의 한 시간 동안 반복해서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토요일 그들과의 이별은 눈물의 이별이었다. 그들과의 서신 왕래는 그후 1년여간 계속되었다. 그 편지들 중 일부는 다음과 같았다. “김 박사님 읽어주세요. 나에게는 그 기간이 인생 중에 가장 은혜스러웠고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는 바입니다. 박사님이 설교와 기도하실 적에 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박사님을 언제 뵈올 지 몰라도 꼭 한번 뵙고 싶은 것이 제 소원이라면 소원이겠습니다. 또 저희들을 잊지 않으시고 공부할 성경교재를 보내 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8월 7일 박궁래 드림.” “그간 선생님, 안녕하세요? 떠나는 7일날 보천서 우리는 너무나 섭섭했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배운 것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데 왜 그렇게 떨리는지 몰라요. 그런데 끝날 때는 말도 잘 나오고 떨리지도 않았어요. 정말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인가 봐요.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나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어요.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그때서야 똑똑하게 알았어요. 선생님, 가을에 꼭 한번 오세요. 지금부터 부탁입니다. 정말 꼭 오세요. 8월 11일 박정옥 씀.” “죄책감에 눈시울을 적셔야 하는 나의 마음… ‘주여 이 몸을 용서해 주소서’ 하며 나의 발길은 교회로 향한다. 그 동안 인생의 줄달음에 주어도 보고, 당겨도 보고, 후회도 하며, 울어도 보고… 먼젓번 부탁과 동일하게 녹음 테이프 2개를 보내니 녹음해서 보내주세요. 1976년 8월 김재옥 서”.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셋째, 영안교회에서 개척목회 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후암교회 사역을 마치고 1978년 6월 22일부터 1979년 2월 18일까지 8개월 동안 영안교회에서 개척 목회를 한 일이 있었다. 영안교회는 한 가족이 1억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하여 강남 신사동에 새로 건축한 교회였다. 누군가의 소개를 받아 그들이 나에게 전화를 걸고, 와서 개척목회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본래 남의 말을 잘 듣는 터라 가서 그 교회를 섬기기로 했다. 가족과 친척들 10여명이 모여서 시작한 교회였다. 나는 혹시라도 한 개인이나 가족이 드러나는 교회가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원리를 강조하며 목회와 설교를 시작했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하나님 중심적 원리로 일관된 나의 설교가 그들 가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것 같아 마음에 기쁨과 감사를 지니기도 했다. 때로 설교자에 대한 지나친 찬사를 들을 때마다 송구함을 금할 수 없었다. 출석 교인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친척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족 중심 교회로 이끌어가기를 원하는, 인간적인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믿음도 없는 친척들을 교사, 성가대원 또는 집사로 세우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것을 제지했다. 그리고 나는 더욱 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원리를 강조하며 우리 사람들의 모습은 죽어 없어져야 하고 하나님의 모습과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고 설교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 중심적”인 설교가 새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 큰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던 반면, 그들 가족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당회장이었던 최 목사님이 나에게 알려주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결국 교회를 설립하고 시작한 지 8개월이 되던 어느 날, 당회장 최 목사님과 교회 설립자인 이 장로님과 자리를 함께했다. 한 마디로 내가 교회를 그만 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담담하고 조용한 어조로 “돌아오는 주일 설교를 마지막으로 교회를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그 때 이 장로님은 내가 주일 설교와 인사를 하지 말고 그냥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교인들이 동요할까 봐 우려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장로님은 최 목사님에게 내가 그렇게 해 주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최 목사님은 말이 없었다. 나는 심각한 어조로 “당회장이 하지 말라고 명령해도 순종할 수 없습니다.”라고 잘라서 말했다. 8개월 동안 기도와 정성을 쏟으며 받들어 섬긴 교회와 교인들에게 인사 한 마디 없이 갑자기 떠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최 목사님도 나의 말에 동의했고 이 장로님에게 내 말이 옳다고 했다. 이 장로님은 마지못해 “그러면 신학교(총신) 교수 일 때문에 사임하게 되었다”고 인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세 사람은 헤어졌다.
2월 18일 마지막 설교를 하는 주일이었다. 뜻밖에 박윤선 목사님이 아침 일찍 전화를 거시고 영안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하신다고 했다. 순간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주저했으나 오시라고 했다. 주일 아침 예배 드리기 전 성가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마음에 놀라움과 당혹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새 얼굴 5~6명이 함께 성가대원에 끼어 있었고, 태도도 온당하지 못했다. 예배를 시작하려고 하자 앞 자리에 전에 못 보던 얼굴 15~16명이 앉아 있었는데 무슨 시위를 하는 듯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은혜로 나는 마지막 설교를 별다른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침착하고 힘있게 할 수 있었다. 설교 후 장로님의 인사가 있었다. “김 목사가 신학교 일 때문에 교회를 그만 두어야 하겠다고 하므로 당회가 그렇게 하도록 찬성했다”고 거짓 광고를 했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장로님의 말이 거짓이라고 밝히지도 않았고, 나를 변명하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다. 다만 너무 갑자기 떠나게 되어 새로 신앙 생활을 시작한 분들에게 죄송하기 그지 없다는 말과 아울러 두 가지 부탁을 했다. 사실 새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들이 상당수였다. 첫째로 신자들에게 목사나 장로나 어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다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만 의지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라고 당부했고, 둘째로 영안교회는 사람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만을 나타내는 하나님 중심적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110여명의 교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눌 때 교인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고, 그들 가족들과 친지들은 매우 곤란해 하는 표정들을 지으면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박윤선 목사님이 전화를 거시고 “김 목사님, 어제 큰 승리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격려해 주셨다. 박 목사님 사모님도 울먹이면서 분함을 토로했고, 박 목사님의 지난날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를 위로해주셨다.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신앙생활과 봉사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던 한도정 집사님은 전화를 걸고 “아무리 신학교 일이 바쁘시더라도 그렇게 갑자기 버리고 갈 수 있느냐”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분개했다. 화요일 오후에는 교인들 여러 명이 내 집에 찾아와서 줄줄 울면서 “이제 영안교회에 안 나오시면 성경공부라도 계속해서 인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괴로움을 씹으면서 말했다. 그 순간 나는 배척을 받으시되 변명도 변호도 하지 않고 입을 열지 않으셨던 주님을 더욱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아울러 인간의 강퍅함과 거짓됨에 비해 길이 참으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귀중한 경험을 하게 하신 주님께, 그리고 어려운 중에서도 나에게 평안을 주신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돌렸다.

▲김명혁 목사(우)가 강변교회에서의 목회를 마치고 물러나던 당시 모습. 후임 허태성 목사(좌) 악수를 나누고 있다. ⓒ고준호 기자
▲김명혁 목사(우)가 강변교회에서의 목회를 마치고 물러나던 당시 모습. 후임 허태성 목사(좌) 악수를 나누고 있다. ⓒ고준호 기자

넷째, 강변교회를 시작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영안교회에서 8개월 동안의 목회 사역을 마친 후 5, 6개월이 지난 다음, 영안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광장동 워커힐에 있는 한도정 집사님 댁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후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25동 505호로 옮겨서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성경공부를 함께하던 사람들의 마음과 뜻이 모여 교회를 시작하기로 하고, 1979년 11월 4일 설립 예배를 드렸다. 그때 김재열 전도사 부부, 한도정 집사, 안흥규 씨 부부, 민홍자 씨, 임수연 씨 등 26명(장년 22명, 유년 2명)이 함께 모여서 교회 설립 예배를 드렸는데 박윤선 목사님 부부도 예배에 참석하셨다. 몇 달 동안 현대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80년 4월 6일 강남구 청담동 41-3 삼익상가 3층으로 이전하여 입당예배를 드렸다. 입당예배 설교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하셨다. 사실 나는 신학교 사역과 목회 사역을 하면서 박윤선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1980년 4월 6일 강변교회를 시작하면서 강변교회의 표어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서로 돌아보고 기쁨으로 섬기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적 신앙생활을 힘쓴다”. “교제”와 “봉사”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서로 돌아보고”는 교제에 힘쓴다는 말이고 “기쁨으로 섬기면서”는 봉사에 힘쓴다는 말이었다. 교회 이름을 강변이라고 정한 것은, 한강변에 세워지기도 했지만 강변에 세워졌던 빌립보 교회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었고, 빌립보 교회가 “교제”와 “봉사”에 치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친밀한 교제와 사랑의 봉사가 부족한 교회는 부끄러운 교회라고 생각한다. 나는 “교제”와 “봉사”를 힘쓰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적 신앙생활을 힘쓰는 것을 교회의 표어로 삼고 30여년 동안 목회를 했다. 성도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손길을 펴는 데 주력하면서 목회했다. 나는 신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데 최선을 다했는데, 특히 새 신자들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어린이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이웃의 동회와 구청과 학교와도 가깝게 지냈고 불우한 사람들이 사는 구룡 마을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다. 나는 다시 목회를 시작한다 해도 여전히 같은 표어를 가지고 같은 방식으로 목회를 할 것이다. 사실 교회는 설교 위주도 아니고, 교육 위주도 아니고, 행사 위주도 아니고, 프로그램 위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성도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힘쓰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성도들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봉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가 주력하여야 할 실천 목표 다섯 가지를 정했다. “예배가 생동하는 교회,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연합운동을 펴 나아가는 교회, 북한동포를 돕고 선교하는 교회, 청소년을 육성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 요사이 한국교회가 행사와 프로그램에 치중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잘못을 범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새 신자들과의 교제를 힘쓰면서 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나의 목회의 첫째 특징은 교제였다. 성경은 물론 교회의 특징은 교제와 소통과 편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힘썼는데, 특히 새 신자들과의 교제에 힘썼다. 주일 예배를 마친 다음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한 후 나는 내 방에서 20여명의 새 신자들과 만나 한 시간 반 정도 대화와 교제를 나누었다. 나는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주로 저들의 말을 들어주면서 친밀한 대화와 교제에 힘썼다. 이 만남과 나눔의 시간들을 통해 새 신자들은 담임목사와 가까워지고 교회에 쉽게 정착하며 신앙이 성장했다. 새 신자들의 고백들을 여기 적어본다. “지난 한 해는 저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한 해였습니다. 강변교회에 오게 된 것이 행복이었고 믿음이 성장하고 가치관이 바뀌게 된 것이 행복이었고 ‘일인 치하’의 가정이 ‘민주적인’ 가정으로 바뀌어 진 것이 행복이었고 직장에서 직원들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진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자기는 50을 바라보는 남자로 ‘행복’이란 단어를 쓰는 것이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떳떳하게 2004년이 가장 행복한 해였다고 다시 말했을 때 참석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함께 앉았던 이모 신자 부부도 공감의 뜻을 표했다. 자기는 교회에 나오기 전에는 주말에 등산이나 골프로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는 주일을 보람차게 보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고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죄책감을 느끼며 죄를 슬퍼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랑을 느낄 줄 알고 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란 사실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자기 부부는 교회와 담임목사를 무척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김모 신자는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의 글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 일부를 여기 적는다. “멋쟁이 김명혁 목사님, 강변교회에서 2004년 한 해 동안 참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강변교회에 대한 그림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감동적인 그림은 예배였습니다. 어머니의 품 속에서부터 물려받은 신앙이었지만, 이토록 가슴 저리며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2004년만큼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1년간 강변교회에서 제가 누린 예배의 감격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또 다른 그림은 성도님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입니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독골공원 앞 횡단보도에서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고 안내하시는 집사님들의 친절한 미소가, 낯설었던 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새 가족반의 권사님과 집사님들의 밝은 인사와 관심, 담임 목사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가는 대화들, 간편하면서도 맛있었던 주일의 점심. 이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목사님, 마음 깊이 존경할 수 있는 목회자가 있다는 것에 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 해 동안 감사 기도 중 하나는 저의 발걸음을 강변교회로 인도하신 것이고, 이곳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느끼고, 말씀과 복음을 향한 재도전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이와 같은 새 신자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한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목회를 계속하는지 모른다.

여섯째, 어린이들과의 교제를 힘쓰면서 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나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어린이들을 아주 많이 좋아했다. 어린이들도 나를 아주 많이 좋아했다. 나는 주일 아침마다 주일 학교 각 부서(유아·유치·유년·초등부)에 들어가곤 했는데 유아부 유치부 어린이들은 나에게 달려들어 안기고 업혔다. 유치부 어린이들 몇 명은 빙빙 돌려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들의 두 손을 붙잡고 빙빙 돌리곤 했다. 은우 라는 3살 난 아이는 주일 날 교회에 오면 꼭 목사님 방에 가자고 했다. 스티커 한 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예배 후 점심 식사를 할 때 거의 매번 예은이와 지원이는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엄마가 스티커 받지 말랬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생글생글 웃는 얼굴 표정은 스티커를 한 장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스티커를 한 장씩 주면 활짝 웃으면서 좋아했다. 나는 지금도 어린이들과 성도들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들을 가지고 다닌다. 이중표 목사님의 편지도 어린이들이 써서 보낸 편지도 가지고 다닌다. 사실 성경은 편지이다. 이레는 아기 때부터 내가 안아주며 예뻐하던 아이였다. 내가 내 방에서 안아주면 내 품에 안겨서 한 시간도 두 시간도 편하게 잠을 자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사를 갔다. 5살 난 이레가 성탄절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목사님께 메리 크리스마스. 목사님 저 어렸을 때 많이 많이 돌봐주시고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항상 챙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목사님 그리고 또 할 말이 있어요. 저 나중에 크면 놀러 갈께요. ♡♡해요. 이레 올림 2004.12.21” 얼마나 예쁜 편진지 모른다.
그 다음 초등학교 4학년의 성혜진이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아기 때부터 내가 예뻐하고 사랑하는 믿음과 생각이 깊은 어린이였다. “목사님 제 꿈이 커졌어요. 목사님 요번 성탄절을 생각하면서 선물을 먼저 떠올렸지만 설교 말씀을 듣고 나서 깨달았어요. 예수님이 태어 나신 건 좋은 소식이지만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실 분이었기 때문에 슬펐어요. 그래서 요번 성탄절은 선물만 고집할게 아니라 회개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어요. 목사님 추운 날씨에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목사님 뜻 깊은 성탄절 되세요♪” 착하고 예쁘고 생각이 깊은 글이었다. 혜진이의 편지 또 하나를 소개한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제일 먼저 목사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목사님 저는 학교에서 회장이에요. 애들이 말 안 들을 땐 너무 속상해요. 목사님께서도 저희가 말 안 들을 땐 힘드시죠. 그래서 동시 한 편 지었어요. 목사님 힘 내세요. 성혜진 올림. 동시. 목사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우리 목사님 멋진 만큼이나 은혜로운 말씀 전해 주시네 세상에서 제일 가는 우리 목사님 예수님의 따뜻한 손처럼 안아주시네. 목사님 사랑해요.”
어린이들과의 교제와 편지는 은퇴 후에도 계속되었다. 내가 강변교회에서 은퇴한지 10개월 후 추수감사주일에 강변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그 때 초등부 어린이들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들을 써서 주었다. 얼마나 귀엽고 예쁜 편지들인지 모른다. “김명혁 목사님께. 목사님, 벌써 목사님께서 이 교회를 떠나신지 1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탈북하신 목사님께 정이 많았어요. 목사님 정말 사랑해요. 목사님께서 어렸을 적부터 저에게 항상 스티커를 주시곤 하셨죠. 목사님, 저는 2008년 동안 목사님이 때때로 그립곤 했어요. 오늘 다신 만나게 되어서 참 반가웠어요. 지난날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2008년 11월 16일 목사님을 사랑하는 금찬후 올림” “김명혁 목사님께. 목사님 잘 지내셨어요? 목사님 뵈니까 반가워요. 목사님 2년 전에 있었던 여름 성경학교 수련회를 기억해 주시니 기뻐요. 목사님은 은정이를 오래오래 기억해 주세요. 저 은정이도 목사님의 사랑을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자주자주 교회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스티커를 오랜만에 받아서 기뻐요. 자주자주 오셔서 스티커 주세요. 저도 목사님처럼 사랑하면서 감사하면서 기뻐하면서 아름답게 살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2008년 11월 16일 김은정 올림” “김명혁 목사님 저 하림이에용~♥ 목사님이 이제 교회 설교를 안 하셔서 너무 슬퍼하고 있어요. ♥ ㅠ.ㅠ 저는 김명혁 목사님이 2006년 여름 여름 성경학교 때 오신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 목사님이 다시 오셨으면 좋겠어요 ^^ 저 목사님 좋아요. 목사님 사랑♡ & ♡ ^^ 조아 ♥ 스티커 마니마니 주신거 있잖아요~ 한 번도 안쓰고 중요하니까 스티커 앨범에 모두 다 ~~ 모으고 있어요. 목사님 주시는 스티커 정말 예뻐요~ ♥ ♡♡♡♡X1,000,000 다른 나라에서 전도하실 때 건강하고 힘들지 않으시게 제가 매일 기도해드릴게요. 목사님 ~~ 항상 감사하며 살게요 ♡ 사랑해요 ♡ 목사님을 사랑하는 하림이 올림 ♡” “김명혁 목사님께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 예은이에요. 추수감사주일날 와 주셔서 감사해요. 목사님! 몇 달에 한번씩 와 주셔야 해요. 저는 목사님께 감사한 거이 많아요. 저를 기억해주셔서 감사하고 강변교회에 와 주셔서 감사하고 스티커 주셔서 감사하고 저희 동생 예림이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 또 우리 초등부에도 와 주셔서 감사해요. 가끔가다 허태성 목사님께 정이 안 갈 때 목사님이 생각이 나요. 또 그동안 좋은 말씀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 목사님!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 건강하세요 ♡ 2008.11.16 황예은 올림” “김명혁 목사님! 저 솔림이에요. 전 목사님이 정말 좋아요. ♥ 목사님이 계속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이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원로 목사님이 되시다니 … ㅠ ㅠ 그렇다고 허태성 목사님이 싫은 건 아니네요 ~^^ 꼭 오래오래 만수 무강하셔서 우리 교회에서 항상 매주마다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른 나라에 가셔서 다치지 않고 잘 전도하시길 기도할께요! 목사님을 너무 LOVE 하는 솔림 올림 ♥♥ 2008.11.16 Sun 다음에 꼭 뵈요. ♡♡♡”.

일곱째, 주일 성수를 강조하면서 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나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교제”와 “봉사”를 강조했지만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강조한 것은 “새벽기도”와 “주일성수”와 “예배”였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신앙의 스승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바로 “새벽기도”와 “주일성수”와 “예배”였고 “순교신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회의 실천 목표 5가지 중 첫째를 “예배가 생동하는 교회”로 정했다. 교회 설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한도정 집사님이 주일 저녁 예배에 자주 빠진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중하게 “주일 저녁 예배에 자주 빠지면 집사를 그만 두는 게 좋겠다”고 말해서 집사님에게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물론 그 다음부터 주일 저녁 예배에 잘 참석했다. 그리고 저녁 예배에 잘 빠지는 젊은 여집사들보고 “너희도 집사 그만두어야 할지 모른다”고 충고까지 하곤 했다. 사실 요사이는 주일 저녁 예배를 아예 집어치운 교회들이 너무 많다. 방지일 목사님은 그런 현상을 보고 기가 막히는 일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일이 있다. “전에는 주일 아침 예배나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거의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문제야요. 그리고 주일 아침에 예배 보고 교인들이 헌금 낸 돈으로 점심 먹고 오후 예배 보고 집으로 가니 참 문제야요. 우리 영등포교회도 오후 예배로 바꾸자는 말이 나오는데 방 목사 죽은 다음에 바꾸자고 해요, 나 참!”.
교회의 여집사님들 10여명이 유럽여행을 함께 떠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떠나는 날과 돌아오는 날이 주일 오후로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여행 일자를 바꾸라고 말했다. 여행사에서 만들어 준 일정이라 바꾸기도 어렵고 바꾸면 비용도 훨씬 더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집사님들이 단체로 주일 오후에 여행 떠나는 것을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많은 논의와 갈등 끝에 여집사님들 10여명은 예정된 대로 주일 오후에 떠났다가 두 주 후 주일 오후에 돌아왔다. 나는 여집사님들 10여명을 모두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주일을 범했으니 두 달 동안 모두 근신하시오”. 교사는 교사의 일을 중단하고 성가대원은 성가대원의 일을 중단하고 집사는 집사의 일을 중단하라고 분부했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여집사님들은 야단법석이었다. 근신처분을 받고 창피해서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 있느냐고 야단들을 했다. 차라리 다른 교회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두 달이 다 지나는 동안 다른 교회로 옮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두 달이 지난 다음 여집사님들이 내 방에 찾아왔다. 잘못을 시인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리고 셔츠와 바지를 선물로 가져왔다. 그 일은 당사자들은 물론 다른 교인들에게까지 좋은 교훈을 던져 주었다. 한번은 장로님 한 분이 군에 가 있는 아들을 만나보기 위해 주일날 군부대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나는 비공개적으로 그 장로님도 치리했다. 두 달 동안 장로의 일을 하지 말고 근신하라고 했다. 그 장로님은 그렇게 했다. 사실 나는 한평생 주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에 가지 않고 종일 교회에 머물렀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 나는 주일날 공부나 일이나 여행이나 매식을 하는 일도 없었고 교인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여덟째, 교역자들과 친하게 놀면서 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나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교역자들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자주 놀러가곤 했다. 일년에 두세 번 교역자 수련회를 하면서 산으로 바다로 호숫가로 가서 기도와 교제와 즐거움의 시간을 함께 가졌다. 여름엔 물론 눈이 오는 겨울에도 설악산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산들을 찾아 다녔다. 오색약수로부터 개울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좌우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기도 했다. 동해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행선지를 미리 알려주지 않고 서울을 떠나 태국의 좀티엔에 가서는, 모두들 놀라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설악산 수련회를 다녀온 교역자 한 사람이 자기가 찍은 사진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들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렸다. “갈매기의 꿈: 갈매기들이 무리지어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꿈을 나누듯, 강변교회 14명의 교역자들은 지난 날을 돌아보며 눈물로 감사하며 회개하며 간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새해의 꿈을 나누었습니다. ‘더 높이 날기 위해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었나이다’로 시작된 담임 목사님의 통회하시는 눈물의 회개는 모든 교역자들이 자신의 죄를 토하며 눈물 바다를 이루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번 수련회처럼 눈물로 수건과 휴지를 적시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아침 식사: 아침은 항상 간소합니다. 과일과 성탄절의 케익과 우유. 우유잔을 들고 ‘위하여!’를 외치고 있습니다.” “개도 먹여야 산다: 바다와 산과 강과 호수에 가실 때면 언제나 쓰레기를 줍고, 새를 보면 새에게 개를 보면 개에게 먹을 양식을 나누어 주시는 목사님! 이번에도 어김 없이 점심에 먹고 남은 꽁치를 챙겨 개에게 먹이고 있습니다. 새해에도 풍성한 사랑의 메시지를 기대합니다.” “사랑하는 강변 성도들에게 (비룡폭포 앞에서): 교역자들은 강변교회 성도들을 고마워하고 칭찬하고 축복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가대, 교사, 직원, 새 신자, 어머니 반, 아이들, 학생들, 청년 모두를 위하여 축복하며 하나님께 간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비룡폭포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강변교회의 부흥 발전을 위하여!를 함께 외쳤습니다.” 물론 수련회가 모두 이처럼 엄숙하지는 않았다. 허물 없이 농담도 하고 놀이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강변교회 교역자들은 수련회를 무척 좋아했다. 다른 교회로 간 교역자들도 그 때를 못 잊는다. 다른 교회로 간 교역자 한 사람이 이런 글을 보내왔다. “목사님! 강변교회가 그립다는 사실은 아마도 모든 교역자들이 강변교회를 떠난 뒤에야 철저히 느끼는 일일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잘해주지 마세요! 크크크! ^^(농담입니다). 어제는 교회 봉고차 안에서 단풍을 보고 있는데 집사님 한 분이 ‘참 예쁘죠?’ 하고 물어보았는데 저는 그 말도 못 듣고 있었어요. 왜냐구요? 강변교회에서 목사님이랑 사모님이랑 단풍구경 가며 아! 이쁘다의 감탄사를 맘껏 소리 내었던 분위기들을 생각하느라 못 듣고 있었지 뭐예요. 교역자 수련회를 가든 무엇을 하든 오늘 어땠어요? 느낀점 말해봐요? 말 잘한 사람은 만원 용돈 줄께요? 하시던 말씀들… 모든 것이 그립고 생각이 참 많이 나요. 이 모든 것이 그리움과 동시에 배움이 되어 저희에게 남아있어요”. 목회는 성도들은 물론 교역자들과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기뻐하고 신나게 놀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홉째, 원로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나의 목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원로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듣곤 한 것이었다. 나는 본래 원로 및 선배 목사님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본받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그래서 강변교회에서 은퇴하기 6년 전부터 매년 11월에 주일마다 교파를 초월해서 교계 원로 목사님들을 초청해서 말씀을 들으면서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곤 했다. 주일 아침 예배에 초청한 원로 분들 중에는 방지일 목사님을 비롯해서 김창인, 정진경, 강원용, 김준곤, 림인식, 조향록, 홍순우 목사님 등이 있었다. 교파와 배경이 다른 여러 목사님들의 정제된 보석 같은 말씀들을 들으면서, 강변교회 성도들은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다. 교인들이 무척 좋아했다. 폭이 넓어졌다. 강변교회에 자주 오시던 정진경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했다. “한 달 동안 강단을 원로 목사님들에게 내어주는 일은 다른 교회에서는 없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원로들을 초청하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원로 초청예배는 세대간의 간격을 좁히는 역할을 하고, 원로들이 친밀한 교제를 하고 좋은 이야기들을 나누므로 교회연합운동에 공헌하며, 교인들에게는 선배들의 신앙을 통해 복음을 배우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원로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곤 했다. 교회에서 드리는 소정의 사례와 함께 세 사람의 성도들이 자원해서 준비한 세 가지 선물도 드렸는데, 드리는 성도들이나 받는 원로 분들은 모두 즐거워했다.
 정진경 목사님께서 2007년 11월 4일 주일 강변교회에 오셔서 마지막으로 “바르게 사는 길”이란 제목의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한다. 귀한 고백적인 말씀이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도 나이가 많습니다. 방지일 목사님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제가 21년생입니다. 그런데 오래 살다 보니까 지금은 남은 생애를 어떻게 정리를 할까 그런 생각이 2년 전부터 들었습니다. 요새 늘 생각하는 건 그 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러분들의 도우심으로 정말 잘 살았습니다. 고통 없이 살았는데 제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바르게 살았는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라도 바르게 살아감으로 매듭을 짓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이런 제목을 택했습니다. 여러분, 김 목사님이 지금 우리에게 다 고맙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 한국교회에서 한 달 동안을 낮 예배 밤 예배를 원로들과 중진목사들을 청해서 계속 낮 예배 설교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도 없고 아마 세계교회에도 없을 겁니다. 우리 김 목사님의 특별하신 배려고, 김 목사님은 보수적인 신학자요 목회자로 알고 있지만, 그가 하는 일을 보면 이 분처럼 개방적인 분이 없습니다. 우리 원로들이 모이면 고맙게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방지일 목사님과 어딜 갔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 목사, 이번에도 강변교회에 가?’ ‘그럼요. 작년에는 제일 꼬래비로 갔지만 이번에는 첫 주일에 갑니다.’ 그랬더니, ‘그 김명혁 목사 아무리 봐도 이상해. 우리같이 나이 든 사람 왜 이렇게 청하는지 몰라… 참 고맙지…’. 그런 이야기 하는 걸 들었습니다. 참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올 때마다 성가대 은혜 많이 받습니다. 정말 노래를 은혜롭게 잘 부릅니다. 감사하구요.”
“그래서 오늘 잘 사는 길을 말해야 될 텐데… 잘 사는 것보다 바르게 사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왜 꼭 교회야 다녀야 합니까? 왜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서는 바르게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며 또 예수를 믿는다고 대답하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밥 버포드라는 사람이 쓴 ‘하프타임’, 다시 말해서 ‘전환점’이라는 제목의 책이 지금 세계적으로 바르게 살기운동을 선풍적으로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새롭게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인생의 전반부는 누구나 다 성공 추구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지식을 얻기 위해, 재물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열명 중 아홉 명은 잘 살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있는 사람. 현실을 바로 바라보는 사람,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인생의 후반부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즉 생애의 성공추구에서 의미추구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전환점에 선다는 것입니다. 젊으나 늙으나 이러한 ‘turning point’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생애 전반에 대한 아무런 점검도 없이 후반의 삶을 사는 사람은 이웃과 사회, 교회와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목적과 수단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삶은 첫째,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둘째, 수단이 정당해야 하며, 셋째, 목적과 수단이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노력해서 이 만큼 쌓아놓았으면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다가 하나님 부르실 때 기쁨으로 가겠는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삶입니다. 잘 사는 게 바르게 사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바로 벌고 바로 저축하고 바로 쓰는 것이 기독교 경제 윤리의 근간이고 바로 사는 원리입니다. 우리는 한세상 살면서 하프타임이 언제인가 생각해 보세요. 전환점이 언제인가 오늘까지 이렇게 해서 이렇게 쌓아 놓았으면 이걸 가지고 이제부터 무얼 할거냐 어떻게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기쁨으로 가겠느냐, 그게 바로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게 성공 추구에서 의미 추구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니 이제는 이런 것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잘 사시되 그걸 가지고 바르게 사는 여생이 축복된 생활로 나가길 바랍니다.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의 삶이 바르고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선배들로부터 이와 같은 고백적인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복된 일인지 모른다. 나는 부족하고 부족한 죄인이지만 정진경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산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김명혁 목사가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북한에 긴급식량지원을 요구하던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명혁 목사가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북한에 긴급식량지원을 요구하던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열째, 사랑과 봉사를 힘쓰면서 목회하던 때를 되돌아본다. 
내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교제”와 함께 “봉사”에 주력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막 10:45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의 사랑과 봉사의 삶을 흠모하게 되었고,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의 사랑과 봉사의 삶을 흠모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인이지만, 주변 사람들과 먼 데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손길을 펴는 데 최선을 다하면서 목회했다. 이웃의 동회와 구청과 학교와 가깝게 지내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고, 불우한 사람들이 사는 구룡마을과도 가깝게 지내면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다. 매년 12월 말에 구청과 동회가 추천하는 어려운 사람들 50여명을 초청하여 “사랑의 음악회”를 열어 위로하면서 20만원씩 선물을 전달하곤 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나눔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썼다. 1988년 여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라는 나라를 찾아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 10개 이상을 파주기도 했다. 1989년에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 병원을 하나 지어주기도 했고, 노재인이라는 영양사 한 사람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하기도 했다. 1995년부터 홍수와 재난으로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지금도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고 있다. 1999년경부터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고아 어린이들 170여명을 돕는 일을 지난 13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다. 2005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 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지어주고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랑과 봉사 사역에 가장 큰 도움의 손길을 편 사람들은 강변교회 성도들이었다. 아프간의 학교는 전적으로 강변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중국 하르빈 아성의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도 강변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만들어졌다. 감사한 일이었다.
2004년 12월 열한 번째로 열린 “사랑의 음악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정성껏 준비한 수준 높은 음악과 정성껏 준비한 사랑의 선물을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우리의 이웃들과 나그네들에게 전달했을 때, 우리 모두는 “사랑 나눔”의 감동과 감격을 느꼈다. 강남구청이 추천한 강남구민 40명, 탈북동포 10명, 노숙자 15명, 외국인 노동자 7명에게 강변교회 성도들이 지난 여름 바자회를 통해 정성껏 마련한 사랑의 선물 봉투(20만원이 든)를 전달했을 때 우리 모두는 뿌듯한 감동을 나누었다. 노숙자 한 사람이 순서에 없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감동적인 보고를 했다. 수 년 전에 받은 사랑의 선물 20만원이 고맙고 귀하게 여겨져서 술 마시는 데 쓰지 않고 아끼고 아끼면서 수세미 장사를 해서 1년 동안에 1천만원을 벌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영등포의 쪽방에서 나와서 목동 아파트에 살게 되었고, 광야교회의 집사까지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전해준 조그만 사랑의 선물이 그렇게 큰 열매를 맺을 줄은 몰랐다. 초청받은 사람들도 우리도 모두 큰 격려를 받으며 보람을 느꼈다. 마침 한국을 방문한 중국 도문의 안성길 부시장이 그동안 강변교회와 한국교회가 사랑의 선물을 매달 보내며 돌아보고 있는 도문의 고아 학생들 30명을 대신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현장감 넘치는 보고를 들으며 우리는 모두 큰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도문의 고아 학생 30명에게 보내는 성탄 카드와 사랑의 선물(3만원씩)을 안 부시장에게 전달했다. 권문용 구청장은 친히 관악기를 연주한 후 강남 구민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강변교회에 감사의 말씀과 참석자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했다. 강변교회 성가대가 연주한 크리스마스 캐롤은 모두를 신나고 즐겁게 만들었고 마지막에 부른 축복송은 모두를 사랑의 줄로 묶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 가수 신형원 씨가 부른 “서울에서 평양까지”와 “더 좋은 날”은 모든 사람들을 큰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사랑의 음악회에 참석했던 강변교회 성도들은 모두 흐믓한 감동과 기쁨에 사로잡혔다. 초등부 어린이는 나에게 이런 메일을 올렸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성혜진이에요. 목사님 제 꿈이 커졌어요. 요번에 사랑의 음악회 때 목사님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셨을 때 그것을 보면서 나도 커서 목사님이 되어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도와줘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회는 사랑을 주고 받으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 2005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학교를 세워주고 준공식을 거행한 이야기를 한다. 2003년 7월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을 때 나는 50도의 뜨거운 열기와 먼지투성이 속을 걷고 달리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한국교회가 세워준 3개 학교의 개교행사에 참여하면서, 내가 가지고 간 학용품 선물 가방들을 받아 들고 기뻐하는 수많은 아프간 어린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학교 하나만 더 지어줄 수 없느냐고 나에게 다가와서 간청하는 압둘라우 장군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프간을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9.11 사건 이후 모슬렘에 대한 나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탓도 있다. 결국 나는 2년 동안 강변교회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쿤두스지역 무라취흐 마을에 학교를 하나 세울 수가 있었고, 이 학교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아프간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타직에 본거지를 두고 아프간 사역에 전력하고 있는 이미정 선교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프간에 있다가 타직에 가면 타직이 천국 같고, 타직에 있다가 우즈벡에 가면 우즈벡이 천국 같고, 우즈벡에 있다가 한국에 가면 한국이 천국 같아요”. 나는 황폐한 땅 아프간에 사는 어린이들을 잊을 수 없어서 1,400만원 상당의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2005년 12월 15일 밤 국경을 넘어 ‘지옥’과 같은 아프간에 간 것이었다. 타직 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우즈벡에서 15일 새벽 3시에 떠나 자동차로 23시간을 달려서, 우여곡절 끝에 아프간 국경을 넘은 후 또 달리고 달려서 16일 새벽 2시경 아프간 쿤두스에 도착했다. 사실 아프간 국경이 폐쇄되어 있어서 나는 밤에 혼자서 국경을 넘다가 아프간 군인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국경수비대장 들라워 장군과 20여분동안 대화하면서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있었다. 결국 들라워 장군은 “대우 넘버 원, 현대 넘버 원, 코리아 넘버 원, 노 프라블럼, 오케이” 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미국을 극히 싫어하면서도 한국은 좋아하고 있었다. 타직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도 무사히 아프간 국경을 넘도록 허락했다. 우리 일행은 모두 16일 아침 10시 무라취흐 학교 준공식에 참석했다. 400여명의 어린이들과 100여명의 지역 지도자들이 학교로 들어가는 길 좌우편에 길게 서서 우리 일행을 열렬하게 환호했다. 10여 미터를 지날 때 마다 10여명의 어린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종이로 만든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면서 우리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할렐루야’를 외치기도 했다. 감동적인 순간들이었다. 이윽고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모슬렘 지도자들리 많이 참석했고 주지사와 교육감 등의 환영사가 있었다.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내용의 환영사였다. 어린이들이 나와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 발음이 정확한 한국말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400여명 학생들에게 Korean Church 라는 글이 인쇄된 가방과 티셔츠와 학용품 선물을 나눠주었을 때 저들은 너무너무 좋아했다. 가난의 빛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귀엽고 예쁜 얼굴들에 행복한 웃음들이 꽃 피어나고 있었다. 1억원을 들여 새로 지어진 학교는 16여개의 교실을 갖춘 아담한 학교였다. 운동장 부지도 갖추고 있었다. 학교 팻말에는 KFH라는 글과 함께 ‘Kangbyun’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의 의도와 요청과는 어긋나는 글자였다. ‘강변’이라는 말 대신 ‘Korean Church’ 후원이라는 말을 넣으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런데 아직은 학교 팻말에 ‘Church’ 라는 말을 넣으면 적대와 테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강변’이라는 글자만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할 수 없었다. 다음 번에 짓는 학교 팻말에는 버젓이 “한국교회 후원”이라는 말이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라는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학교를 짓는 데 그리고 사랑의 선물을 보내는 데 기도와 헌금으로 참여한 강변교회 성도들에게 눈물겨운 감사를 드렸다.

▲김명혁 목사는 은퇴 후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며 격려하고 있다. 사진은 중국동포교회 교인들을 격려하는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명혁 목사는 은퇴 후 여러 교회들을 순회하며 격려하고 있다. 사진은 중국동포교회 교인들을 격려하는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열한째, 은퇴 후 “순회 목회”를 하고 있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지난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그 다음 주일부터 지난 5년 동안 매주일 전국의 작은 교회들 한두 곳을 방문하여 교제하고 설교하는 “순회 목회”를 하고 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평균 3, 40여명 내외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때로는 8, 90여명의 교회도) 방문하고 있는데 피차간 반가움과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며 양무리들을 정성껏 돌아보는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사모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다. 만약 내가 강변교회에 계속해서 머물고 있었다면 나의 시야가 좁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교파와 교단에 속한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교파 의식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개교회 의식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합동이나 고신이나 합신이나 통합 교단만이 옳은 교단이란 생각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내가 개척해서 목회하던 강변교회만이 제일 귀중한 교회라는 생각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모든 교단의 모든 교회들이 비록 아주 작은 교회들이라도 모두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하나님의 귀중한 교회라는 사실을 점점 실감하게 되었다. 오히려 작은 교회들이 더 귀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을 귀중하게 여기며 사랑하게 되었다. 부족하고 부족한 죄인인 내가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그렇게도 좋아하고 고마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놀라고 또 놀라면서 하나님께서는 의인보다는 죄인을 사용하시는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시라는 사실도 실감하고 또 실감하게 되었다. 작은 교회들을 섬기는 사역자들이 귀한 사역자들임을 발견하고 또 발견했다. 사실 주님께서는 크게 성장한, 그래서 부족한 것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보다는 환난과 궁핍 중에 있던 서머나 교회를 더 귀하게 보시며 칭찬하셨다. 나는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건강하게 자라가려면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도시와 시골이 서로 돌아보고 서로 격려하고 협력하면서 균형 있게 자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세상의 유행에 따라서 크고 부요한 것을 너무 좋아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도시에서는 큰 교회들과 작은 교회들이 전쟁을 하는 것 같다는 말까지 들었다. 기가 막히는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크고 부요한 것을 칭찬하시는 대신 오히려 가난하고 궁핍한 것을 칭찬하시고 격려하셨는데 말이다.

열두째, “순회 목회”를 하면서 독일의 작은 교회들을 돌아본 이야기를 한다.
내가 은퇴 후 작은 교회들을 돌아보는 “순회 목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독일의 한인교회 목회자들이 “독일에도 작은 교회들이 있으니 와 달라”고 했다. 나는 2008년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독일 슐란트하임 산 속에서 모인 한인연합수양회로 달려갔다. 40여명의 신자들을 가진 5개의 작은 교회들로부터 100여명 이상의 신자들이 함께 모였다. 절반 이상은 유학생들이었다. 다섯 분의 목사님들과 다섯 분의 사모님들도 함께 모였다. 15명 정도의 어린이들도 함께 모였다. 나는 3일 동안 1시간 30분 가량의 긴 설교를 다섯 번 했다. 감성보다 흥분보다 프로그램보다 음악보다 이적보다 체험보다 주님 닮으려고 하는 진실하고 소박한 삶이 가장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주님 닮으려고 하는 진실하고 소박한 삶은 버리는 삶이고 찾아가는 삶이고 항복하는 삶이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고 제물 되는 삶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런 삶을 프랜시스, 길선주,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들이 살았다고 지적했다. 말씀을 경청하는 참석자들의 마음 가짐이 순수하고 간절하고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의 설교를 크게 축복하셨다. 집회 시간마다 젊은이들은 눈물과 아멘으로 화답했다. 금요일 저녁 세 번째 집회를 인도하며 세 번째 설교를 마쳤다. 내가 축도로 예배를 마치자 연합수양회의 준비위원장의 일을 맡은 김익진 목사님이 나와서 간단한 광고를 했다. “혹 강사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라도 좋으니 남아 주시오”. 몇 명이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었다. 나는 마이크를 붙잡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도를 해주고 또 해주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20명, 30명, 40명, 50명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기도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흐느끼며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는 별 생각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자기들 형편에 꼭 맞는 기도를 해주었다고 고백했고, 자기들이 기도 부탁을 하려고 했던 기도를 해주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기도를 받은 젊은이들이 자기들의 삶에 대한 예언과 같은 기도들을 해 주어서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으면서 그 기도들을 가슴에 깊이 간직했다고 말했다. 안수기도는 결국 1시간 20여분 동안 계속되었다고 했다. 90여명의 신자들이 모두 나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받았다고 했다. 모두들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받으며 기뻐하며 감사했다고 했다. 사실 나는 30여분 정도 기도해준 느낌이었는데 1시간20여분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 아이들도 기도를 받으며 좋아했다. 모두가 망극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 때문이었다. 나는 안수기도를 해주면서 나에게 그렇게도 여러 번 안수기도를 해주시던 이성봉 목사님을 생각하며, 이성봉 목사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새롭게 지니게 되었다. 수양회 동안 15명 정도의 어린 아이들과 아주 친하고 즐겁게 지냈는데, 몇몇 아이들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스티커를 두 개씩 또는 세 개씩 받아 들고 좋아했다. 나와 함께 탁구를 치면서 너무 좋아하는 어린이도 있었다. 토요일 오후 마지막 다섯 번째 집회를 인도하며 마지막 설교를 했다. 예배 후 젊은이들이 떠나지 않고 줄을 서서 내가 안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이 젊은 여자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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