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란 말은 라틴어의 ‘마러스’라는 말에서 왔으며 그 뜻은 ‘놀랍다’, ‘희한하다’다. ‘파스칼’(Pascal)은 “기적이 없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현대인에게는 수많은 질병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목표가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예측불허의 시대에서 럭비공처럼 이리저리 튀고 있다. 기준과 공식이 무시되고 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자고 깨어나면 새로운 기술이 생긴다. 유행도 금방 변한다. TV채널은 수십 개가 넘는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혼돈스러운 시대다.
오늘날 육체는 멀쩡하지만 영적 나병에 걸린 사람이 많다. 죄를 지어도 죄의식이 사라지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대표적인 영적 나병이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변화가 없는 것도 아주 심각한 영적 나병이다. 어쩌면 모두 그런 영적 나병의 보균자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병으로부터 치유 받을 수 있을까? 성경에는 나병환자가 주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통해 병을 치유받고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몇 가지 원리를 깨달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
기적의 주인공은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이다. 마가복음 1장 40절 첫 부분을 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라고 나온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왔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나병은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하는데, 이는 고통을 감지하는 기능이 상실된 병이다. 그래서 뜨거운 것에 손을 대거나 어떤 상처가 생겨도 고통이 없고, 시간이 지나면 몸의 말단 부분이나 연한 부분의 신경이 없어져서 그 부분이 함몰되고 문드러지게 된다.
그런 한센병을 생각하면 사람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으면 반드시 영적인 나병에 걸리게 된다.
구약시대에는 이 병에 걸린 사람은 길을 다닐 때 얼굴 아랫부분을 가린 채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고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당시에는 나병환자와 인사만 해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나병환자가 사람들에게 접근하면 돌아 맞아 죽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나병환자는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께 다가왔다. 그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께 나오는 것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가장 기초 원리다.
겸손하게 기도하는 사람
기적의 주인공은 겸손하게 기도하는 사람이다.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나와서 어떻게 했는가? 마가복음 1장 40절을 보면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 나온다.
이 장면을 마음속으로 한번 그려 보자. 태도와 언어가 얼마나 겸손한 모습인가? 이 말씀에서‘꿇어 엎드렸다’는 것은 주님을 최대한 높이고 감히 주님을 쳐다보지도 못하겠다는 자세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마다 나병환자처럼 먼저 무릎부터 잘 꿇어야 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주세요’라는 표시다. 아무리 잘못해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은 용서해주시고 들었던 매를 내려놓으시고 사랑으로 안아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가장 기초 원리는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태도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반드시 흘러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한 겸손한 사람에게 반드시 있는 삶의 특징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순종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장 4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자.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나와서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할 수 있나이다”고 했다. 이 고백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째, 주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둘째,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철저한 복종의 자세가 담겨 있다. 그처럼 항상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예’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님의 사랑
또한 기적의 주인공은 주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이다. 마가복음 1장 41-42절 말씀은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고 되어 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아픈 마음을 가지고 크게 불쌍히 여기셨다’는 뜻이다. 그처럼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으로 치유해주셨다. 왜 주님은 그냥 말씀만으로 치유하시지 않고, 이 나병환자에게 특별히 손을 대셨을까?
아마 사람들이 접촉을 꺼리는 나병환자였기에 의도적으로 손을 대셨을 것이다. 그 행위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를 귀하게 보고 있다. 너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 주님의 손길은 몇 년 만에 처음 대하는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었을지 모른다. 이에 나병환자는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며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치유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 사랑이 기적의 원천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말로만 사랑을 말하지 말고 나병환자같이 낮고 비천한 사람에게도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와 구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와 구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과 기도와 물질로 동참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여기시고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을 붙잡아주는 이런 사랑의 손길이 되어주어야 한다. 작은 예수의 손이 되어서 절망하고 힘들어하고 소외되고 냄새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만져줄 때, 하나님은 당신의 몸과 마음도 치유해 주실 것이다. 또한 당신을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다.
행복한교회 최명일 담임목사
기적, 그 놀라운 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