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7]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요 3:22-36절 강해
22 이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예수께서 이제 사역을 시작하신다. 그런데 사역을 시작하실 때 주님보다 먼저 와서 길을 닦은 세례 요한의 일을 연속해서 좀 하신다. 물론 요한의 위임은 물세례였지만,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맡은 바가 다르다. 그러나 주님은 전에 사역했던 선(先)주자를 조금 이어나가시는 것이다.
나는 여러 권의 책을 썼다. 내가 쓴 책을 조금 깊이 읽으신 분들은, 그 내용이 전에 있던 내용의 연속이며 이전 많은 학자들의 사역과 오버래핑되어 있음을 느낄 것이다. 물론 거기에만 머물지 않고 뭔가 더 나아가는 것이 있어야 좋은 사역이다. 그러나 완전히 별도로 하는 것은 위험한 사역이다. 주님은 사역을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요한이 하던대로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이어서 하셨다.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세레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물들이 많은 곳에서 세례를 주었던 것으로 봐서 세례는 사실 물 속에 잠기는 ‘침례’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처럼 약세를 하는 것이라면 물이 많을 필요가 없다. 이때는 요단강이든 이곳에 기록된 에논이든 세례를 줄 때는 다 물이 많은 곳에서 잠기는 식의 침례를 주었다.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새로 시작하시면, 이제 요한은 길을 닦았기 때문에 그만 하고 마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뭔가 경쟁이 되는 식이 된다면 보기에 좋지 않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24절을 추가한 것 같다.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같다는 것이다.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다가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로 가서 세례를 받는 것을 보자 시기가 생긴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의 어린 양 등의 표현을 쓰지 않고 요단 강 저 편에 있던 자,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요한이 2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말을 한다. 이것은 요한의 마지막 증언으로, 우리가 잘 들어볼 필요가 있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늘에서 주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에서 주신 바 되었기에 그분이 그렇게 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잘 알았다. 제자들에게 시기가 있었고 경쟁이 있었고 혼돈이 있었지만, 주 예수님을 천거하기 위해 먼저 보내심 받았던 요한은 그의 사명을 다했다. 그의 말이 아주 온전함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거듭난 문제를 말한다.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영생을 얻고 거듭난 사람들의 목표가 무엇인가?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들의 목표이다. 요한복음 3장에는 거듭남의 목표가 들어 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다.
그렇다면 사역자들은 무엇인가?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라고 지칭했다. 요한의 제자들이 ‘사람들이 다 그에게 간다’고 했을 때 요한은 ‘나는 그들이 그렇게 갈 때 기쁨이 충만하다’고 한 것이다. ‘나는 신랑이 아니고 신랑의 친구이다.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것을 보니 나는 기쁨이 충만하다. 그런데 너희는 왜 나를 위해 시기하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요한 이후 모든 사역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한복음 2장은 물로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것도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그것도 옛 생명이 새 생명으로. 그렇게 생명이 바뀐 결과는 후반부에서 성전이 건축되는 것이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일으켜진 것이 무엇인가? 교회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잘못될 수 있는 점을 2장에서 지적하고 넘어가는데, 그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비둘기 팔고 돈 바꾸고 소나 양을 파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이것은 다 쫓아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다 기도하고 다 경배하고 다 섬기는 곳이다. 누군가 편의를 보고 돈을 버는 곳이 아니다. 이제 3장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 가르치고 있다. 다 그리스도께 가야 한다. 사역자들은 다 쇠해야 한다. 그리스도만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한다.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그는 증가해야 하고 나는 감소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갈수록 감소해야 한다.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나는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는 말이 요한을 포함한 선지자들의 말이라 믿는다. 그럼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누구인가? 예수이다. 예수는 만물 위에 계신다.
12절에서는 “…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했다.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이 나온다. 이것은 주님이 하신 말씀이고, 지금 이것은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다. 주 예수는 이 땅에서 니고데모 앞에 말씀하시고 여기서 세례를 주시지만, 그분은 사실 하늘에서 오신 분이고 하늘에 계신 분이고 만물 위에 계신 분이기에 하늘의 말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서 보내심 받아 인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믿는 자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받는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골고다에 올라가신 예수, 우리 죄를 사하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 예수를 그저 바라보고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하늘의 음성이다.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누가 보고 들었다는 것인가? 예수이시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보고 듣는 것이 이런 복음의 이야기밖에 없다. 그것을 증거하실 때에 이 땅에 그 증거를 받는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이런 것이었던 것 같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항상 대답하는 말도 이런 말이었을 것 같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냥 그렇게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새벽기도라도, 헌금이라도, 교회 봉사라도 해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면서 율법의 관념이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그분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증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참되시다 인치는 것이라고 하신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을 참되다고 인치는 것이다. 안 받으면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증거이고 하늘의 음성인데, 이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없이 주심이니라
이는 예수에 대해 하는 말이다. 하늘에는 그런 말이 없다는 것이다. 요한은 얼마나 자신을 낮추어 그 길을 잘 따르는가! 자신을 예수와 구분하고 있다. 주님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 분이라 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을 기름 붓듯, 물 붓듯 부으셨다. 그분은 어디든 다니시며 능력을 행하실 만큼 풍성하셨다. 그분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요한도 날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되어 선지자 노릇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실제로 요한이 감옥에 갔을 때 그는 실족할 뻔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라면 왜 나는 안 꺼내주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이야말로 한 마디도 하늘의 말씀이 아닌 것을 말하신 적이 없다. 우리도 사실 그렇게 되도록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말을 하다가 집에서는 아무렇게나 말한다. 그러다 보니 아내들도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성령이 충만하려면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모든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우리 마음에 차 있는 많은 것들을 비우고 정말로 주의 성령으로만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말과 행함이 언제나 올바르고 하늘에 속한 말을 하게 될 줄로 믿는다.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만물은 다 아들의 것이다. 왜 성부는 아들에게 만물을 주셨는가? 그분 안에서 사랑하심으로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모든 만물과 결합해서 영생 얻는 역사를 하는 것이다. 아들은 만물을 이용해 우리 택한 백성들이 영생 얻는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하고 싶다. 하나님은 세상을 극도로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그런데 ‘아들을 믿는 사람 손을 들어보라’면 다 들다가도, ‘영생 얻은 사람 손 들라’면 절반도 안 드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기 때문에, 만약 믿었는데도 영생이 없다면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여러분이 믿었다면 영생이 있는 줄로 확신하기 바란다.
영생이 없는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이다. 잠을 잘 때도 불안하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을 때도 불안하다. 일할 때도 불안하다. 일어나도 앉아도 불안하다. 그러나 진실로 믿었고 구원을 얻었다면 평안하고 담대하며 불안함이 없다. 진노와 심판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난다(요 3:18). 이렇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를 믿는 것이다.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의 자격은 다만 죄인이면 된다. ‘참회하는’ 죄인이나 ‘깨달은’ 죄인 같은 형용사를 따로 붙이지 않았다. 죄인이 예수께 나오면 하나님은 무조건 다 받아주신다고 했다. 이렇게 기도하라. ‘주여 내 손에 가진 것은 아무 것이 없어도 다만 주님의 십자가만 붙듭니다. 벌거벗은 이 몸, 옷 입혀 주실 당신만을 의지합니다. 아무 도움 없이, 갈 데 올 데 없는 이 죄인이 더러운 상태 그대로 오직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당신께 나아갑니다. 보혈의 샘으로 나아가오니 구세주여, 나를 씻겨 주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멸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