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행 접고 교회 개척으로
일단 성전만 구하면 더 이상 큰 돈 들어갈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인테리어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그래도 교회 문만 열면 금방이라도 성도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기쁘게 교회 개척 준비를 했다.
또 주변의 목회자들과 인사도 하고 안면도 익힐 겸 해서 인근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 문을 열어놓은 곳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교회 게시판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는 곳도 있었고, 주보도 날짜를 볼펜으로 지우고 숫자만 바꿔서 복사해 놓은 곳이 많았다. 사실 그 때 속으로 ‘어떻게 목회를 이처럼 안일하게 한단 말인가. 답답한 노릇이군. 이렇게 하면서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라다니 참으로 한심하군.’ 하며 그들을 한심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개척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들이 왜 그랬는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1998년 11월 드디어 화광교회 개척 예배를 드렸다. 그 후 8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밤낮없이 오직 전도만을 위해 뛰었다. 그런데도 별 변화가 없었다. 몇 명 모이는 성도들도 설교를 하면 전혀 못 알아듣는 것처럼 눈만 깜빡거렸다.
그 때 크나큰 좌절감을 맛보면서, 이곳이 나의 목양지가 아닌 것 같아 교회를 옮길 생각까지 했다. 상암동 근방으로 건물을 보러 다녔는데, 첫째는 돈도 부족했지만 장인 어른의 말씀을 듣고서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
“교회가 무슨 점포나 상점인가? 장사 안 된다고 점포를 옮기고 상점 문 닫듯이 교회가 부흥 안 된다고 옮겨 다니게. 그건 안 될 말일세.”
그 말을 듣자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목사인 나보다 장인어른의 믿음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목사로서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개척 8개월여 후부터 나오기 시작한 한 모자(母子) 때문에 교회를 옮길 수 없었다. 38살 된 청년과 그 어머니는 둘 다 글을 알지 못해 성경도 읽지 못하지만, 공예배는 절대 빠지지 않고 나왔다. 사모와 번갈아 가며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려 노력했지만,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믿음에 깊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직하게 성전을 지켰다. 이 두 사람의 영혼 때문에 더더욱 교회를 옮길 수 없었다.
그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심정으로 파주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다. 사실 파주라는 지역이 그렇게 열악한 곳인 줄 알았다면 절대 그곳에서 개척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척한 지 10년 된 교회조차도 교인 10명이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
나는 부교역자 생활만 오래 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 개척을 해야 좋은지 전혀 몰랐다. 만약 서울에서 개척을 했다면 우리가 원래 기독교 집안이라 식구들만 해도 50~60명은 금방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파주에서 개척을 했으니, 어쩌면 힘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죽기살기로 3년 동안 전도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회는 물론이고 집안 살림과 형편도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반으로 줄었던 전세금마저도 모두 까먹었다. 결국 전셋집을 정리하고 처가로 들어가 살게 됐다. 단돈 3천원이 없어서, 친구가 찾아왔는데 칼국수 한 그릇을 사주지 못할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다.
교회는 생기를 잃었고, 처음 개척할 때 그토록 한심하게 여겼던 인근 지역의 교회들과 똑같이 변해 있었다. 게시판에 거미줄이 쳐졌고, 주보도 지난주 것과 별 다를 게 없었다. 그 때 우리 교회는 죽기 직전에 있었다.
3년쯤 혼신의 힘을 다해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교회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더 이상 교회를 계속했다가는 빚더미 위에 앉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