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16] 요한복음 7장 강해(2)
우리는 왜 생수를 마셨는데 그것이 배에서 끊임없이 흘러나가지 못하는가? 이는 우리의 깊은 속(영)에 생수가 있지만, 우리의 마음에 다른 많은 것들과 장애물들이 막혀 있어 흐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생명수의 강이 여러분과 우리를 통하여 더욱 흐르기를 소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에서부터 생각 감정 의지 모든 부분이 척량되기 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전체를 통해 생명수의 강은 흐르게 된다. 반석이신 주님은 이미 깨어져서 생수는 흘렀고 우리 영에까지 도달하였다. 기도하자! “주여, 나를 더욱 척량해 주소서!”
요한복음 4장의 생수가 목마른 인생의 해갈을 위한 것이라면, 요한복음 7장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생명수가 강물이 되어 끝없이 흐르는 것임을 말해준다. 우리 속을 적신 생수는 결국 넘치고 넘쳐 창일하여 헤엄치지 못할 강이 될 것이다(겔 47:5). 이것은 결국 오순절 성령강림과 관계가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사도행전 1장 8절에 연결시키는 것이 강화하고 힘을 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생수의 강이 배에서 흘러나 어디까지 갈 것인가? 땅끝까지다.
복음 전도자 바울을 생각해 본다. 그의 배에서도 생수의 강물이 흘러 다메섹으로, 예루살렘으로, 아시아로, 유럽으로, 로마, 서바나(스페인)까지 나아갔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만족할 만한 강물의 흘러감이 없다면, 혹시 자신을 채우고 있는 것이 생명수 아닌 지식이나 교리나 사상이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참된 생수라면 그것은 한 사람 속에 머물지 못하고, 봇물 터지듯 터진다.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그들은 의견이 갈렸다. 어떤 이들은 참으로 그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라 하였다. 이는 적극적 견해이다. 그러나 믿지 않고 시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는가 하며 쟁론하였다. 설왕설래의 분위기였다. 자신들의 기득권익을 위하며 교만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자고로 동일하다. 자기가 무시하고 싶은 대상이 그러한 별 수 없는 못난 사람이라고 확정한 것을 바꾸는 것을 싫어하고, 그 자가 원래부터 낮고 부족하고 미치지 못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따라서 기회가 있는 대로 비하한다. 그러나 순수한 영혼의 사람들,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보고 느낀 그대로 말한다.
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잡아오라고 보냈더니, 주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은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속들은 예수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들은 후 감동이 되었다. 또 매우 새로운 말씀을 듣게 됐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 같은 시기심이나 이해관계가 없는 자들이기에 순수한 부분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들의 반응은 매우 신선하고 좋았다.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오늘날도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자신을 최고로 알고 다른 사람을 깊이 알아보지도 않고 일체 무시하고 경멸한다. 그들은 조사해볼 필요도 느끼지 않고, 한편으로는 알아보는 자체도 두려워한다.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조건 상대를 반대하고 평가절하는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이때 니고데모가 나타나 ‘나도 그분을 믿는다’고는 담대히 답하지 못했지만, 한 마디 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대번에 니고데모를 무시했다. 오늘날도 교만한 단체나 이단들은 깊이 말씀을 연구하거나 묵상하지 않고, 대충 들은 말과 아는 지식을 전부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여러 쟁론 끝에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이 8장 1절에 감람산으로 가신 것으로 이 장면은 끝난다. 7장은 커다란 대비를 보여준다. 예수님의 가족을 비롯한 인간들의 완악함과 구주 예수의 선하심, 지극히 아름다우심을 대비해 보여준다. 그렇게 반대하고 잡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집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으로 가셨다.
7장 말씀을 묵상할 때 나는 감동이 되고 마음이 슬프기도 했다. 예수, 그분은 어떤 분인가? 사람들은 어찌 그렇게 악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어떻게 그리 사랑하실 수 있을까? 그들을 향해 여전히 마음을 여시고, 어떡하면 한 명이라도 구원할까 하여 외치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셔야 하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영광을 받게 되신다.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해 성령은 부어지지 않았지만, 초막절 명절 끝날 무지몽매한 백성들에게 복음의 초대를 하고 계신다.
이래도 주님을 믿지 않고 그분으로부터 마시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멸망할 것 같지 않은가?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시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살면서 어떠한 깊은 목마름이 있을 것이다. 좌절감, 상실감, 비어 있다는 느낌이 다 목마름의 표시이다. 목마른 것은 죄도 잘못도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필요하다는 표시이다.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했다. 그러면 네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다.
오늘날 사람들은 별로 목마른 것 같지 않게 산다. 그들은 천국도 바라지 않고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도 소망하지 않고 장래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저 이 세상의 쾌락, 조금 얻은 성취, 신기루 같은 장래에 대한 막연한 환상 같은 것들로 채워 목마르지 않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은 다 병든 사람이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목마른 것도 모르는 것이다. 참되게 깨어나면 그제서야 목마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이 필요를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것은 주님이시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는 것은 주님의 생수가 흘러나가는 통로이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생명수의 강을 마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아직 당신에게 목마름이 있다면 충분히 마시지 않은 것이다. 충분히 마시면 그것이 없어진다. 만족하게 된다. 바울이 그랬다. 물질이나 명예나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이 주 예수를 충만하게 얻게 되면, 그분에게서 충분하게 마시면, 인생 가운데 목마르게 느껴졌던 모든 것이 다 채워진다. 그리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내가 정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목말랐던 것을 주님이 채우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생수의 마심은 개인적인 마심으로만 해결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알아야 진정한 마심을 실행할 수 있다(고전 12:13). 나는 독자 여러분이 성령을 마시는 것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님을 볼 수 있기 원한다. 오늘날 성도들이 진정한 하나를 누리며 몸 안에서 성령을 마실 때, 그 성령은 땅끝까지 적시며 흘러갈 것이다. 나는 오순절의 120 문도들이 다락방에서 성령을 하나되어 마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예수님께 나와서 마시는 것은 쉬운 것이다. 행위가 아니다. 의지를 조금만 굴복시켜 주님께 맡기고 나와서 마시면, 믿으면, 하나님은 약속대로 성령을 풍성하게 여러분에게 부어주실 것이다.
요한복음 7장을 마치면서
1.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들은 주 예수를 본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외모를 구한다. 하지만 주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하셨다(요 7:24). 주 예수는 그분의 때를 아셨다. 그 때는 결국 십자가로 가시는 때이다. 그분이 움직이시기에 좋은 때가 아니다. 그분의 일은 자신을 사람들을 위해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면 그분을 섬기는 길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는 요한복음 12장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주님을 섬기려면 오해와 비방과 미움과 적대를 당해야 한다. 사람들의 무지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의 주신 진리의 말씀만을 하셨다. 사람들은 그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귀신들렸다고 비난했다. 우리가 진실로 진리를 말하고 주님의 인도에 따라 나아간다면 그분이 받은 오해와 비방이 따라오게 된다. 그런 길을 싫어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없고 섬길 수 없다.
2. 사도 요한은 왜 7장을 자세히 기록했는가? 7장이 없다면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예수에 대한 적대감이 상승했는지 알 수 없다. 주 예수는 갑자기 잡히신 것이 아니다. 조금씩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유대인들 사이에 그분을 죽이려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자세한 경위를 요한이 기록했다. 주로 주 예수를 미워하며 잡아 죽이고자 한 것은 예수의 선한 일로 말미암았으며, 그들의 행위가 악하다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았으며(요 7:7), 사소한 문제로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신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요5:18). 7장에서 유대인들의 주 예수에 대한 시기와 적대의 감정이 고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극대화된다(요 11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