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20] 눈을 뜬 소경
요한복음 9장 강해(1)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주님은 요한복음 9장의 이 소경에게 그가 소경된 것은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님 죄도 아니며, 그를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와서 눈을 뜨게 해줌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는 그 역사를 체험함으로 그 자신도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어떤 큰 문제는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위한 도구이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문제가 있다면 잘 들으라. ‘나는 이것 때문에 인생이 아주 어렵다. 이것 때문에 고민이다. 이것 때문에 나는 할 일을 못하고 갈 길을 못 간다. 성공할 수 없다’ 하는 것이 하나씩 있다고 하자. 이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역사할 기회를 부여해 드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당신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로 인한 것도 아니다. 만약 그 문제가 없으면 당신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기회가 없는 것이다.
주 예수는 우리 인생에 기적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다. 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은 하신다. 날 때부터 소경인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인가?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며 앉아서 구걸하던 걸인이었다. 그런데 이 소경을 주님이 치료하심으로 인생을 180도 바꿔놓은 것이 아닌가? 결국 주님은 이 일로 엄청난 핍박을 당하며, 그것이 9-10장에 기록된 내용이다. 당시 바리새인,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심하게 핍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조금 희한하다.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낮이란 주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선을 행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능력이 있으시다. 그러나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 특별한 위임을 받으신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분의 밤이란 그분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게 되는 때를 의미한다. 즉 그분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못하면 하실 수 있는 기적의 일에 제한을 받으시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는 그분이 메시아로서 세상의 구주로 오신 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특별한 기적들을 행사하신 것이다.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쉬운 질문 하나를 하겠다. 예수님은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씻어야 치료하실 수 있는가? 물론 말씀만으로도 치료하실 수 있으시다. 그런데 주님은 왜 번거로운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분명히는 알 수 없다. 예수님은 치료하실 때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때로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한 마디면 됐다. 그런데 이 경우 뭔가를 하셨다. 당시에 진흙이나 침을 섞어서 사용하는 민간요법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는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뜻이 있을 것이다.
믿음과 순종
그 소경을 치유할 때 사용된 그 침은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님 입에서 나왔다. 진흙은 땅에서 나왔다. 이 두 가지가 합해졌다. 아마 여기에도 뜻이 있을 것이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다.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명령을 들은 소경이 즉시 가서 씻었더니 눈이 보이게 되었다. 이 말씀은 주 예수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지만, 그가 순종했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믿음과 순종이다. 순종과 믿음은 한 가지이다. ‘예수를 믿으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을 믿는 것이 순종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실 수 있다. 그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여기 있다. 당시에는 주님이 성전에 지나다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치료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로 모인다. 주님이 주일마다 모임 때마다 오셔서 불쌍한 사람들을 만져주시고 눈 먼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라고 모여 있는 것이다. 말씀 가운데, 기도 가운데, 찬양 가운데 만나주시고 고쳐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도와주시라고 우리가 모이는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분을 모든 것을 하실 전능자로 믿지 않는 데 있다. ‘아마 이것은 안 될 거야. 내가 10년, 20년을 그렇게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이 문제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는가’ 하는 불신 자체가 문제다. 내 건강, 부모 때부터 있던 이 문제를 예수님이 어떻게 고치겠어, 그냥 안고 살아야지 하는 불신, 그것이 여러분을 그렇게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이 만일 믿을 수 있다면(믿음도 하나님이 주신다) 여러분의 문제는 오늘 하루에 눈 녹듯 지나갈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바라보고 계신다. 여러분은 기도할 마음이 있는가? 그 마음까지도 바라보고 계신다. 이 시간 기도하기 바란다. ‘주님, 내 눈을 열어주십시오. 나는 이 소경처럼 보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의 이 고질병을 치료해주소서. 나는 건강하게 주님 섬기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그분이 하실 수 있음과 자신이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주님께 기도하기 바란다. 주님은 여러분의 보혜사로서 돕는 자로서 여러분 안에 사신다.
때로는 과정이 필요
주님이 이 소경을 치료하는 방법은 그렇게 고상하지 않았다. 이 소경은 눈을 뜬 후부터 한 단계씩 주님에 대해 알아갔다. 빨리 치료하면 그 과정에서 적절한 깨달음이 없을 수 있다. 본문을 보면 그는 처음에 유대들이 물을 때 예수님이 누군지도 몰랐다가, 나중에 선지자라고 대답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것은 엘리사가 나아만을 치료할 때와 비슷하다. 그러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출교를 당했다. 눈을 뜬 결과가 공동체 축출이었다. 그 후 다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아들’이라 고백했다.
눈을 뜨고 나더니 이 청년의 말이 점점 건방져지고, 가르치려 했다는 것이다. 생명을 얻고 진리에 대해 깨달은 사람들은 전통주의자들, 박사나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거스르는 듯한 소리를 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이 눈뜬 소경을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이 소경은 구원을 받았다. 참되게 예수를 만나고 믿었다. 그러나 단계가 있었다. 예수님이 치유하실 때는 단지 낫게 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로써 치유의 모든 과정 속에도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기적에 대한 이웃 사람들의 반응
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10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13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소경의 이웃들도 유대교의 사람들이었다. 종교 조직의 특성은 각종 규례와 예식을 중히 여기되 사람이 치료받고 잘되는 것에 대하여는 관심이 적다. 그리고 시기심이 많다. 그러므로 많은 오해와 사람에 대한 격하의 말들이 분분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하는 일이 가장 의미있고 최고여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교만이다. 종교는 사람에게 제2의 천성을 만들어준다. 그러기에 이단 종교를 가입하는 일은 위험하고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이다. 즉 인생의 기본적 인정과 사랑까지도 말살되는 것이다. 이웃들도 그가 걸인이고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사실을 기뻐하기보단, 종교 조직에 미칠 영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기적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반응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7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18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소경이 눈을 뜬 사건을 두고 여러 부류의 여러 반응들이 나온다. 요한은 이렇게 당시 유대교의 상황과 상태를 기록하고 있다. 확실히 그들은 사람의 번영과 축복과 건강보다, 규례와 형식을 지킴을 앞세웠다. 따라서 종교 속에는 본래의 목적이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이다. 또 종교 속에는 비교적 객관적이고 평이한 생각을 가진 자들도 존재한다. 그 종교의 주체세력은 언제나 열성분자요, 그 조직을 위한 충성으로 타인이나 타 단체에 대한 멸시와 비판의식이 강한 자들이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교의 열성분자요 중심세력이었다. 그들은 소경이었던 자의 부모와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자를 돌려가면서 취조하듯 문초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주 예수의 선한 역사, 하나님의 역사를 무효화하는 데 있었다. 문초의 최종 목적은 그들 종교 조직에 해가 되는 일이 발견되면 축출하는 데 있었기에, 그 부모는 두려워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