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21]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요한복음 9장 강해(2)
바리새인들과 눈 뜬 소경의 대화(24-38절)
우리는 이 구절들에서 주님을 만나고 생명을 만난 자들의 특징과, 생명 없는 종교인들의 전형적인 대화를 볼 수 있다. 오늘도 이런 식의 대화들이 도처에서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은 전에 자기가 보지 못하던 소경이었다가 이제 보게 되었으니 할 말이 많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그런 세계에 문외한이다. 그러나 지식과 율법과 형식, 종교관념에는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교만하여 안하무인이다. 예수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볼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에 비해 눈을 뜬 사람은 그 말이 매우 솔직하고 담백하다. 그는 눈만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입 또한 열렸다. 언제나 경험과 실제가 있는 사람의 말은 힘이 있다. 그는 배운 것 없는 걸인이었지만,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정도의 수준 높은 말을 하고 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러나 이런 참된 말은 그 종교조직에서 쫓겨나기에 충분하였다.
종교 vs. 생명
요한복음 9장 말씀에서 우리는 유대 종교가 무엇인지 보게 된다. 한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데 주님이 치료를 해주셔서 눈이 떴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 소경에게는 그 일생에 눈을 뜬 것보다 큰 사건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생명의 변화로 인해서 부딪히게 된 것은 기존 종교 조직이었다. 유대교 사람들은 그 사람이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는 9장에서 유대 종교, 당시의 기성 종교 조직은 병자가 치료받고 또 눈 먼 소경이 주님을 만나서 그 눈을 뜨게 되는 귀한 역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타까운 사실이다. 대신 그들은 예수로 인해 자신들의 종교 조직이 조금이라도 해를 입을까 염려했다. 눈을 뜬 그 사람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리했다. 그런데 이 눈 뜬 소경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밝아졌다. 처음에는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다음에는 ‘선지자’ 같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소경은 눈을 뜨자 기성 종교 조직에 부딪혔고, 그들과 몇 마디 나눈 후 쫓겨났다. 그런데 쫓겨난 다음 예수를 만난 것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나와야, 참되게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다. 영적 원칙이 그렇다. 종교의 타성에 젖어 있으면 인격이신 예수를 만날 수 없다. 대부분은 그 종교생활 자체를 하나님 잘 믿는 것으로 간주한다. 단체 안에서 그 단체의 분위기에 사로잡히면,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해도 만난 것이 되는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단체적인 신앙은 위험성이 존재한다. 내가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오직 주 예수와 나만 있는 상황으로 인도될 때 예수를 나의 개인의 구주로 만나게 된다.
그는 그제서야 예수를 참되게 만났다. 주님은 이 지점으로 인도하시려 여러 과정을 거치게 하셨다. 그는 충분히 예비되어 있었다. 소경은 그분의 다정한 손길을 맛보았다. 사랑과 인자하심과 능력도 맛보았다. 눈을 뜨는 과정이 그러했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 단체에서의 수건이 예수를 만나는 데 방해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거기서도 나왔다. 나올 때 새로운 시야가 열리는 법이다. 과거 눈을 뜬 사건은 중요하지만 이 때 만난 것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육신의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하지만, 영혼의 눈을 뜨는 것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이것은 영생을 얻는 문제이다. 예수님의 그 소경에 대한 최종 목적은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믿고 죄 사함 받고 영생 얻게 하시는 것이었다.
이제 예수님은 그를 만나셔서 한 가지를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이것이 유일한 질문이다. 오늘도 사실은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신다. 오직 한 분 예수이다. 오늘 소위 수많은 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단체의 사상을 믿고 교주를 하고 많은 다른 것으로 예수 한 분의 신앙을 대치한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얼마나 달콤한 음성인가? 이 한 분을 만나는 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그 과정은 길고도 멀었다. 소경의 일생이 걸린 것이다. 주님은 어떻게 해서든 그분 자신을 알리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오직 믿음’만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느냐는 이 한 가지가 여러분이 답변해야 할 유일한 질문이다. 그때 이 눈 뜬 소경은 “주여 그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고, 주님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답하셨다. 그러자 이 소경이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했다. 소경과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다. 주님의 모든 대화의 목적은 이것이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본질이 동일한 말씀이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병이 치료받고 또 가정이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은 덤으로 주어진다. 우리는 그런 많은 혜택도 얻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수가 누군지를 알고, 그분을 진실로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며 영생을 얻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중심에서 이 눈 뜬 소경처럼 주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주를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내가 세상을 심판하러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심판하러 왔다고 하신다. 주님의 말씀은 때로 모순적인 것 같다. 그러나 모순이 아니다. 헬라어로 보면 요한복음 3장의 심판이라는 말은 ‘크리스티스’이지만 여기서는 ‘크리마’로, 이 심판은 어떤 행동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소경인지 아닌지 모른다. 본다고 하고 안다고 하니까 진짜 그런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어떤 심판을 하시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본다고 하더니 알고 보니 소경이었다. 심판이 임하자 구분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보지 못하던 위의 소경 같은 사람은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 9장의 기록목적이 육신적인 소경이 눈을 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눈을 떠서 구원을 받고 영생 얻는 것에 있음을 보게 된다. 6장도 육신의 양식을 먹는 것에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먹는 것에 중점이 있다. 주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그 목적이 영적인 눈을 떠서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데 있었다.
요한복음에 있는 죄 사함의 복음(40-41절)
생명에 중점을 두는 요한복음은 직접적으로 죄 사함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고, 간접적으로 다룬다. 뱀에 물린 자들의 몸에 퍼져가는 뱀의 독소는 결국 죄와 사망을 의미한다. 어떻게 죄 사함을 받는가? 장대에 높이 달린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과 5장 24절 속에 죄 사함이 들어있고, 6장에서 음료로써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신 말씀은 결국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다. 8장에서 주 예수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죄에서 자유케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32-34절). 9장에서도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하신 것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상태를 말한 것이다(9:41).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했다는 증명서이다. 그분은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준 바 되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 하나님은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케 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행 17:31). 따라서 여러분이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다면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이다(롬 10:9). 여러분은 이미 죄 사함을 받았는가? 의롭다 함을 얻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사람이다!
9장을 마치면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결국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데 있었다. 주님은 물질적인 것을 사용해 영적으로 중대한 일을 하신다. ‘오병이어’도 떡 먹는 기적을 이용해 당신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주님의 중점이 언제나 영생에 있음을 깨닫는 것은 요한복음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요한복음 9, 10장에 몇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유대 종교 안에 젖어 철저히 바리새인들이 된 사람들은 시기가 가득하다. 누구라도 예수를 시인하면 다 축출한다고 위협하여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기성 종교 조직은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 청년은 눈 뜬 죄밖에 없다. 그런데 왜 쫓겨나야 하는가? 그들에게 참말을 한 죄밖에 없다. 종교인들은 순수한 형제로부터 훈계를 듣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본다고 확신했지만, 소경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반대로 가장 처참한 환경에 있던 소경이었던 자는 육신의 눈을 뜬 것만이 아니라 영의 눈을 뜨게 되는 구원의 축복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