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22] 요한복음 10장 강해(1)
양의 목자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10장에서는 양무리와 목자의 비유를 들어서 주님이 인도하고자 하는 신약의 교회를 그려주고 있다. 성도들은 참되게 하나님을 믿기 위해, 참된 ‘양의 목자’ 뿐 아니라 절도와 강도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양의 목자만이 우리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 양떼들은 목자는 따라야겠지만 절도와 강도는 따르면 안 된다. 이 길을 잘못 가서 망하는 일에 있어, 거짓 목자나 삯군의 책임도 있지만 따르는 양떼의 책임도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10장 내용이다.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첫째, 진정한 양은 구주 되신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과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약의 교회는 이렇게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문으로 들어가신 분이며, 문을 열고 양을 불러낸 목자이시다. 그분만이 보혈로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셨고, 영생의 문을 열어주셨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 절도와 강도가 있기 때문이다. 소위 교주들이다.
여기서 ‘각각’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우리는 ‘단체주의’를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몸을 말하지만, 단체주의와 구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 예수를 믿어줄 수 없다. 예수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대신해줄 수도 없다. 박윤선 박사는 “천국에 가면 모든 사람이 예수를 향하여 개별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기성 종교 조직인 유대교(그저 맹목적으로 단체적 -그 안에서 정한 규율과 체계가 전부임)와, 예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교회와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교회는 신자마다 예수의 불러내는 음성을 각각 들어야 한다. 신약 성도들의 믿음이란 개인적으로 주님을 믿고 영접하고 주님을 만나며 따르는 것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은 각자의 이름을 불러 그 양 우리 안에서 끌어내시는 것이다. 양 우리는 유대교라는 종교 조직을 말한다. 9장에서 눈을 뜬 청년 한 명을 불러내셨는데, 이 한 가지 예를 들어 주님이 어떻게 신약의 교회를, 주님의 양무리를 편성하시는가를 말씀하고 계신다. 여러분이 신약의 교회의 멤버들이 되려면 한두 가지를 점검해 보라. 첫째는 예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나왔는가? 둘째는 앞서 가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발걸음인가, 아니면 스스로 개척하고 연구하고 궁리하여 가는 길인가? 또는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 사람이나 조직의 체계에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신앙인가? 이것을 보면 여러분이 아직도 기존 종교 조직에 포함되어 있는 유대교의 일부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한 양떼, 즉 교회의 일부인가를 점검할 수 있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의 문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지금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가지고 신약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를 형성하고 계신다. 지금 우리는 신약의 교회로 있다. 그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려면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문은 예수이다. 문이 예수요 목자가 예수요 문지기도 예수이시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아닌 다른 것을 문 삼아 들어가려 한다.
오직 예수를 인하여 구원받고 들어온 자는 다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다. 또 그리스도 자신 외에 교회를 위한 다른 어떤 문을 만들 수 없고 또 다른 어떤 것도 문을 삼을 수 없다. 다른 것을 문 삼은 단체는 신약의 교회가 아니다. 문과 목자, 문지기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했다. 요한복음 10장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속임수에 걸려들 뻔했는가?
그렇지만 우리에서 나와서 풍성함을 맛본 양들은 그 안에서 먹지 못하는 양들을 위해 다시 또 들어가는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러했고 많은 사도들이 그렇게 했다. 그들은 먼저 나왔고 다음에는 또 들어가고 나오고 했다. 그들은 언제가 그리스도를 문으로 삼아서 나오고 들어가고 했기에 풍성한 꼴을 얻을 수 있었다.
생명을 얻게 하심
10절은 이 종교 세계에 도적도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죽어 있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했다. 예수 믿지 않는 영혼들은 다 죽은 사람들이다. 그 속에 한 가지 감각이 없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감각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감각이 없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영예스럽고 존귀한 것을 잃어버렸다. 예수님은 이렇듯 죽어버린 인간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다. 살리러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죄 사함만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
풍성한 생명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만 얻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풍성히 얻어야 한다. 육신으로 비유를 해보자. 살긴 살았는데 그저 숨만 간신히 쉬면서 병원에서 링거를 꽂고 살고 있다면 어떠한가? 물론 죽은 것보다는 낫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아서야 되겠는가? 풍성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 생명력 강한 사람들은 운동을 해도 싸움을 해도 이긴다. 간신히 연명만 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영적인 생명도 더 풍성히 얻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원한다. 그러나 생명을 얻는 것에 믿음이 필요하듯이 풍성한 생명을 얻는 것에도 더욱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이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가르침, 곧 음식이 중요하다. 아무 것이나 먹으면 안 된다. 건강한 음식,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잘못된 것, 율법주의, 이단적인 가르침을 먹으면 죽는다. 가려 먹어야 한다. 또 좋은 음식을 한 달에 한 번만 먹어서도 안 된다. 자주 먹을수록 좋다. 갓난아기들은 젖을 어떻게 먹는가? 아주 자주 먹는다. 조금만 배고파도 젖 달라고 필사적으로 보채면서 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젖을 먹어야 할 바, 말씀을 그렇게 먹어야 할 바이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생명은 풍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다양하게 먹어야 한다. 실제로 먹는 음식처럼 다양하게 먹을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하면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고’라고 말씀하신다. 먹는 것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시와 찬미도 할 줄 알고 찬송도 부를 줄 알아야 한다. 기도도 할 줄 알고 말씀을 읽으면서도 기도할 줄도 알아야 한다. 성도들과 영적인 교제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매일 앉아서 책만 읽는 식은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쌀밥이 좋다고 매일 쌀밥만 먹는 사람과 똑같다. 건강하지 않다.
먹기만 하면 안 된다. 운동도 해야 한다. 그래서 전도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봉사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교회 식당에도 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 이것저것 할 줄 알아야 건강한 것이다. 먹기만 하면 곧 입맛이 없어진다. 섬겨야 한다. 헌신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드리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각 방면에서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할 때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얻을 수 있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해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선한 목자
신약의 교회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한 가지가 바로 삯꾼이다. 선한 목자는 선하다. 생명을 주고 양육을 하고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주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문제는 삯꾼이 있다는 것이다. 삯꾼은 돈으로 고용된 사람이다. 그는 대가를 받기 때문에 일한다. 우리는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곳에 좋은 자리가 생겨도 양들을 놓고서 더 좋은 데로 도망간다는 것이다. 운동 선수가 스카웃을 당하면 얼른 좋은 구단으로 가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그는 삯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목자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 주님 같은 사람이다. 주님은 양떼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다.
“양도 나를 아는 것이”. 그런데 양도 또한 주님을 안다고 하셨다. 내 양은 나를 안다. 주님을 참되게 모르는 자들은 진정한 양이 아니다. 성도들 간의 교제란 무엇인가? 목자이신 주님을 아는 사람들끼리의 이야기가 교제인 것이다. 서로 아는 것이 없으면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를 알아야 하는가? 주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아는 사람끼리는 서로 많은 이야기를 안 해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서로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신약의 교회라고 한다. 우리는 참 목자가 주님 자신임을 감사하고 찬미하자!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교회는 푸른 초장 위에 있는 양떼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앞서서 가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그분이 목자이시다. 그 목자를 따라서 그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구분하면서 따라가는 무리, 그 길에는 푸른 초장이 펼쳐져 있고 먹을 것이 많다.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그러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면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렇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 삼아서 함께 따르는 무리, 그들이 바로 신약의 교회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렇게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끝까지 따르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요한은 결국 이기는 자들이 어린 양의 인도를 따라 끝까지 따르는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다(계 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