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칼럼]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69)
3. 찬양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는 신자들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가운데 서로 신앙을 화답하는 친교와 찬양 가운데 임재하신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권면한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예배 가운데 합심하여 부르는 찬송 가운데 주님은 임재하신다. 그리스도는 찬양하는 회중 가운데 임재하신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 인용한 그리스도 찬가(Christus Hymnus)는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 가운데 널리 애송됐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그리스도 찬가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그의 낮아지심(Kenosis)을 찬양하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인간과 우주의 구주가 되신 그의 높아지심을 찬양하는, 초대교회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는 케리그마(kerygma)였다.
찬양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에 감동을 주며 신자들 속에 계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찬송 가운데 각 개인에게 임재하시는 예수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영적 고상한 체험이다. 구약의 시편 기자들은 시를 노래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찬송시와 찬양 가운데서 예수의 임재를 경험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찬송을 제사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그런데 오늘날의 경배와 찬양은 너무 열광적인 발성과 집단적인 최면과 분위기에 압도되는 나머지, 케리그마가 갖는 내용을 조용한 가운데 묵상하면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소홀히 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열정적인 찬양은 조용한 묵상과 기도와 항상 병행되어야 한다.
4. 회중 기도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는 합심기도 가운데 임재하신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예수는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다. 합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은 임재하신다. 역사적 예수는 기도의 지침서로 주기도문(the Lord’s Prayer)을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합심기도 내지 대표기도를 주기도문의 전례(典禮)에 따라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합심기도도 반드시 통성으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호렙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엘리야는 지진이나 폭풍 가운데 계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났다. 조용한 묵상기도, 다같이 합심하면서도 조용한 묵상기도도 병행되어야 한다.
(1) 각 개인의 성화와 헌신을 위한 기도에 임재
각 신자들은 각자의 영적 성숙과 이웃에 대한 헌신,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구하지 않고 자신의 영적 성숙과 이웃을 향한 헌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구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인도해 주신다. 그러는 가운데 역사적 예수는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칭의의 신앙에만 머물면 자기는 의롭고 다른 자들은 의롭지 않다는 교만에 빠진다. 그러나 성화에의 신앙으로 나아가면 이웃과의 바른 교제와 섬김의 신앙을 갖도록 한다.
(2) 성도들 서로를 위한 기도에 임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자기의 간구가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권면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바울도 성도들 무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이유는 저들이 복음의 전파와 양육에 참여하기 때문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 1:4-5). 우리는 신앙의 박해 가운데서도 순교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키고 있는 북한 지하교인들과, 기아와 인권 부재 가운데서 고통당하고 있는 북한 주민과 중국이나 동남아 각지에서 도피 중에 있는 탈북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3) 복음 전도자, 예배 인도자와 설교자를 위한 기도에 임재
기도는 개인과 성도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자, 예배 인도자, 설교자를 위하여 해야 한다. 그리하여야 예배에 참석한 모든 신자들이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인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기도를 요청하고 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6:19-20). 복음 전도자들이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도록, 예배 인도자 및 순서 담당자들이 예배의 모든 순서에 은혜롭게 기여하도록, 설교자가 복음의 비밀을 담대하게 드러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합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는 신자들의 예배 가운데 역사하신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요, 이 예배 공동체 안에 역사적 예수는 성령으로 임재하신다.
5. 설교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는 오늘도 예배의 설교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주님은 말씀이시다. 그는 태초의 로고스(logos)이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설교 말씀(rhema)으로 우리 마음에 다가오신다. 바울은 증언한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역사적 예수는 교회가 세워진 후로는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주시는, 살아계시는 주(Kyrios)로 다가오신다.
그리스도는 1세기에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가는 다메섹 도상의 사울에게 인격적으로 찾아 오셨으며, 4세기에는 정념에 고민하는 어거스틴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셨으며, 16세기에는 구원 문제의 고민에 빠진 루터에게 말씀으로 찾아 오셨으며, 18세기에는 구원의 확신 결여로 고민에 빠진 웨슬리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찾아오셔서 구원의 확신을 주셨고, 19세기에는 노예상인 존 뉴톤에게 찾아오셔서 저를 변화시키고 노예의 해방자가 되도록 하셨다. 이들은 단지 교회사에 이름을 올린 유명한 인물들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 얼마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저들의 어려운 문제 상황 속에서 저들에게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사람이 되었는가?
그리스도는 19세기 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를 통하여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20세기 초인 1920년대에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설교를 통하여 주기철·박형룡·김재준 같은 한국교회 신앙의 선각자들을 만나시고 저들을 회개하도록 하신다. 얼마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던가 헤아릴 수 없다. 이것은 설교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그리스도는 천상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전도와 선포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 오신다. 우리의 양심에 선포되는 말씀으로, 인격자로서 다가오신다. 그리하여 믿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십자가에 달리시고 흘리신 대속의 피로 사신 의의 옷, 칭의를 입혀주신다. 예수는 누구나 부르신다. 믿는 자에게는 국적이나 인종이나 남녀노소 구별이 없다. 그는 부요하신 분이시며 칭의를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변화를 주시는 분이시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 10:11-12). 예수는 누구든지 부르시고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그러므로 복음 전도와 설교는 중요하다.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 순서와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메시지 전달에 있어야 한다. 이에 듣는 자들의 믿음이 상응해야 한다. 교회는 1차적으로 믿음의 공동체이지 이성의 공동체는 아니다. 바울은 선언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오늘날 칼 바르트, 폴 틸리히, 존 라빈슨, 위르겐 몰트만 등 만인구원론자들(universalists)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화해는 이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행해졌으니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화해되었다고 설교한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러한 만인구원론은 복음 전도와 선교의 긴급성(예수 믿으면 천당, 불신자는 지옥)을 무효로 만든다. 기독교 종말론에 핵심적인 사상인, 종말론적 엄격한 심판의 성격이 탈락되는 것이다. 이는 복음의 왜곡 내지 변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나, 구원은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이다. 약속하신 구원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다.
오늘날 WCC 운동에 참가하는 적지 않은 신학자들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WCC 운동 자체는 온 지구촌 교회의 연합과 협력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이러한 WCC 참여자들 가운데 있는 급진론자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우리는 비판하고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고 공교회의 대표들이 유치하고 준비하고 있는 세계교회의 행사(세계교회협의회 제10회 부산총회)를 반대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오늘날 한국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 “WCC는 적그리스도”라고 현수막을 붙이고 부산대회 개최 반대운동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WCC에 참가하는 교회에는 기독교 정통을 자처하는 동방정교회, 복음주의 성향의 각 나라(영국, 독일, 미국, 한국 등) 교회(그 중에 특히 한국교회 가운데는 예장통합, 감리교, 하나님의성회 등)들이 있기 때문이다.
6. 성례전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는 예배의 성례전 가운데 임재하신다. 예배는 항상 성례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성례전을 통해서 신자들은 선포된 비가시적인 말씀을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가시적인 말씀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례전은 기념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사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성례전은 모든 예배에 항상 동반되어야 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한국교회는 1년에 4번씩 성만찬을 개최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한다. 칼빈은 자주 성만찬을 여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만찬을 기념해야 한다. 성만찬이 거행되어 떡을 떼면서 “이것은 우리를 위해주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것은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라고 집전자가 제정할 때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는 믿음 가운데 떡과 포도주를 받는 신자들 가운데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이것은 성만찬의 신비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주님의 영적 임재를 경험하였고, 종교개혁 공동체들이 경험하였고, 특히 진젠도르프가 이끈 독일 경건주의 일파인 모라비안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체험했으며, 오늘날 세계 모든 교회(정교회, 가톨릭교회, 모든 개신교회)가 경험하는 신비적 사건이다,
7. 참회와 새로운 결단과 헌신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 영적 예배 속에 계시는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는 예배와 성례전에 참예한 신자들이 부지 중에 지은 죄와 허물에 대한 참회와 게으름에 대한 뉘우침과 새로운 삶에 대한 각오와 헌신에의 새로운 결단 속에 임재하신다. 진정한 예배는 단지 종교적인 의식(儀式)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결단으로 연결된다. 바울은 신자의 삶을 거룩한 산 헌신과 제사(a living sacrifice and worship)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거룩한 산 제물이란 마음의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시시각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히브리서 기자도 선행과 나눔과 섬김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영적 제사를 증언하고 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이러한 우리 삶의 거룩한 헌신(the holy sacrifice of life)이라는 산 제사(living worship) 속에 역사적 예수는 그가 보내신 보혜사 성령으로 임재하신다.
8. 세상으로 보냄의 축도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1) 보냄의 축도에 임재
진정한 예배는 참석자들을 이 세상으로 보내는 축도가 있는 예배다. 목회자들은 신자들을 사명자로서 이 세상으로 보내어야 한다. 멀리는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민족들에게로 가까이는 신앙생활에서 실족한 주변의 친지들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보냄의 축도에서 신자들은 새로운 소명자로 보냄을 받는다. 이러한 보냄의 축도는 부활하신 예수의 보내심의 명령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하). 이 보냄의 축도 가운데 주님은 임재하신다.
2) 보냄을 받는 파송에 임재
살아 있는 예배에는 이러한 목회자의 생동적인 축도에 보냄을 받는 신자들의 파송이 상응한다. 진정한 예배란 무엇을 얻기 위하여 복을 받기 위하여 참가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적인 인격적인 신앙을 가지고 주님에게 먼저 받은 바 은혜에 대하여 감사 찬양하고, 허물과 죄를 고백하며, 그리고 선포된 말씀 가운데서 새로운 영적 결단을 하고 새로운 헌신과 봉사를 위하여 새 힘을 얻는 것이 바른 예배다. 그러므로 참다운 신자는 예배 후에 이 세상으로 파송받는 평신도 선교사로서 교회를 나와야 한다. 기복이나 번영의 안전이 아니라 헌신과 봉사의 새로운 소명이 바로 보냄과 파송을 받는 신자들의 진정한 태도다. 이 파송 가운데 주님은 다음과 같이 그의 임재를 확인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하). 신자들은 보냄과 파송을 받은 자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정과 직장에서 선교를 위하여 열심히 증언활동을 해야 한다.
맺음말: 진리와 영의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그리스도.
역사적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지나간 종교적 교주나 종교사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오늘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 가운데 그리스도로서 임재하신다. 그는 이제 우주의 통치자로서 왕의 왕으로서 앞으로 오실 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역사적 예수는 우리들에게 어떤 특별한 종교적 헌금이나 자기 희생의 제물을 요구하고 자기를 신격화하는 교주가 아니라, 진리와 영의 예배 가운데 임재하신다. 역사적 예수는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고 이웃을 향한 선행과 나눔과 섬김의 삶을 요구하시며, 영적 제사를 요구하시는 인격적인 구주이시다. 이러한 인격적인 내면적인 구주로서 역사적 예수는 우리 각 개인의 찬양과 회중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며, 우리 신자들이 사회와 공동체에 소금과 빛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는 교회의 주일뿐 아니라 사회와 역사와 우주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러한 주로서 신자들의 가정과 교회의 예배 가운데 현재하신다. 그는 과거에 계셨으나 여전히 지금도 살아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