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35] 요한복음 14장 26-27절 강해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고 계신다. 첫번째는 ‘나를 믿으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면 내 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 할 때 여러분 스스로는 어렵고 능력이 부족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보혜사를 보내 우리를 도와주리라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
요한복음 14장은 매우 심오한 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밀을 조금 볼 수 있다. 분명히 예수는 아버지를 하나님이라 말하고 자신은 ‘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가 따로 계신 것 같지 않은가? 보혜사도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삼위’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처럼 각각 세 명으로 나뉜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다. 두 분으로 나눌 수 없다. 어느 구절에서는 따로 계신 것처럼 말하고, 어느 구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눌 수 없는 분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세 분이신가, 한 분이신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삼위 사이에 분명히 구분은 있다. 아버지는 분명 아버지이시다. 그러므로 아들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고 했다. 성령 또한 성령이시다. 그럼에도 삼위는 또한 분리되지 않으신다. ‘not separated, but distinct’, 구분은 있지만 분리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co-inhere’, 즉 삼위가 서로 안에 거하신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물질세계에서 이런 수학은 있을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셋이자 하나이고, 하나이지만 동시에 셋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Triune God’이라고 부른다. triune이란 three in one, 즉 셋이자 동시에 하나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다.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유언 같은 말씀을 하신다. 이 때 아버지에 대해,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고 자신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면서, 이제 두려워하고 외롭게 될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다. 창조시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렇게 분명하게 나타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십자가로 가시기 직전, 곧 성령과 교회의 시대를 앞두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계신다.
가르치시는 분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게 되고 성령을 얻게 되는데, 성령을 얻은 사람들은 다 가장 탁월한 튜터(tutor)를 하나씩 얻게 된 것이다. 그 성령께서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신다.
나는 과거 20, 30년 동안 가장 귀한 교사로부터 배웠다. 그는 바로 내 안에 계신 주님이시다. 그분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하나 있다면, 교사이신 성령께 잘 배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직 부족한 이유는 그만큼 성실하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배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집중하지 않는 것이다. 곤충학자들이 숲속을 지나갈 때 듣는 곤충 소리는 일반 사람들이 듣는 소리와 다르다. 하나하나 아주 귀 기울여 들으면서 모든 소리를 구분한다. 우리의 배움은 성령의 내적인 가르침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는가, 집중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받기를 얼마나 사모하는가에 있다.
그분은 언제나 가르쳐 주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울 마음만 있으면 언제나 배울 수 있다. 그러려면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천연적인 지혜를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든 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것이든 이제껏 스스로 아는 방식으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지능과 지혜를 신뢰하는 사람은 성령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과 성령께서 우리로 알도록 도와주시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좋은 성도들이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읽고 들어야 하며, 그 다음에는 성령께서 여러분을 가르쳐주실 때마다 그것을 잘 배워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로 가시기 전에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하시며 저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어려분이 성령의 가르침을 잘 받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어떤 사람의 판단력보다 가장 탁월한 판단력을 갖게 될 것이다. 빨리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주님을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어 보라. 그러면 어느 날 주님이 가르쳐주신다. 그때 가르쳐 주시는 지식은 그 누구도 덮을 수 없다. 가장 올바른 지식이기 때문이다.
생각나게 하시는 분
둘째는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다. 기억력도 성령을 의지해 보라. 어떤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려 할 때 입을 열어보라. 그러면 다 잊어버렸던 말들이 입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랄 것이다. 그것이 성령의 생각나게 하시는 역사이다.
나는 여러분이 성령의 가르침을 하나도 못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령이 생각나게 하시는 것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은 여러분이 더욱 성령께 가르침받고 더욱 생각나게 하시는 역사를 늘 체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입만 열면 생각이 나고 말할 시간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내적인 평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이것은 굉장히 위대한 선포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평안은 ‘peace’, 즉 화평 혹은 평강과 같은 말이다. 이 때 주님은 ‘나의 평안’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이것을 유산처럼 돌아가시기 전에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성도들은 다 이 한 가지를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평안’이라는 말로 인사한다.
여러분은 이 평안을 체험해 보았는가? 이 평안은 하나님의 평안, 예수의 평안이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이 세상의 평안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천국의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평강이, 희락이 있다. 이 세상에 있는 평화를 조금 증가시켜 주신 정도가 아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하늘에서 가지고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신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 평강의 성질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에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이것을 사라지게 할 수가 없다. 빼앗아 갈 수가 없다. 특별히 불안해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이 평안은 핍박으로도 질병으로도 사망으로도 어려운 일로도 혼란시키는 일로도 없앨 수 없다. 주님은 하늘에서 온 기묘한 이 평안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이다.
성경에서는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는 말로 인사한다. 이는 무척이나 중요한 말씀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갖는 일시적인 평화는 풍랑이 닥치면 금방 다시 불안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 평안, 그리스도의 평안, 하나님의 평안, 천국의 평안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없앨 수 없고 사라지게 할 수 없고 깨뜨릴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값 없이 누리는 이 평안을 많은 사람들에게 누리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복음을 평안의 복음이라고 말했다.
예수를 믿은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평화를 얻게 된다. 우리 사람은 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타락하여 죄인이 됨으로 우리는 이 평화를 잃어버렸다. 평화 대신에 불안과 사망과 저주가 임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불화의 요인을 십자가에서 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보혈을 흘린 후에 하늘 보좌로부터 온 우주를 향해 평화가 선포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양심 속에서도 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 속에 평강이 오는 것이다. 이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신 것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평안을 흔들 자가 없다. 더 이상 죄 의식도 느낄 필요가 없을 만큼 주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한 죄 사함을 이루셨기 때문에(히 10:1), 우리는 양심 가운데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질병도 이 평안을 빼앗을 수 없으며 원수들이 힘을 다해서 공격을 해도 이 평안을 빼앗을 수 없고, 박해도, 죽음의 공포도 이 평안을 빼앗을 수 없다. 이는 하늘의 평안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럽의 순교자가 자신의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손을 내 가슴에 대어 보십시오.’ 사형 집행인은 그렇게 했다. ‘이번에는 당신 가슴에 손을 얹어 보십시오. 누구의 심장이 더 두근거리며 고통스러운가요?’ 사형 당하는 순교자는 마음이 평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악독한 짓을 하려고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그 심령이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순교하는 성도는 마치 결혼잔치에 가는 사람처럼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형 집행자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 평강에 대해서 빌립보서에서는 ‘지각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평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깊이와 그 넓이를 알 수 없으며 사람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평강이기에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달콤한 평안’이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은 ‘완전한 평강’, 혹은 ‘위대한 평강’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평화는 그저 있다가 잠시 사라지는 아슬아슬한 것이 아니다. 천국의 평강, 주님 자신의 평강을 우리에게 주셨기에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깨뜨릴 수 없는, 그런 안전하고 위대하고 놀랍고 달콤한 평화가 우리 마음 속에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 평강은 기쁨과 함께 있기에 평강도 누리고 기쁨도 누린다. 이 평강으로 우리는 여유가 있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 이 평강 가운데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고 하나님 얼굴을 볼 수 있고 하나님 보좌 앞에 늘 나아가서 담대하게 주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다만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죄를 조심하고 불신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믿음 가운데 거하고 말씀 안에 거하고 성도들과의 교제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평강은 늘 성도들을 지켜주시고 그날까지 이끌어주실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평강의 복을 한없이 내리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