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 아닌, 철저히 산 부모에 효도하는 기독교 윤리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기고] 종교간 대화: 유교와 기독교

▲이동주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동주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지난 11월 15일 기독교학술원 주최로 열린 제20회 영성포럼 ‘기독교 영성과 종교간 대화’에서 이동주 박사가 발표한 ‘유교와 기독교’를 게재합니다. 이 글은 종교로서의 유교의 특성과 함께,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민감한 조상 제사와 우상숭배 논란 등에 대해 짚어주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서론

현대 기독교와 유교와의 ‘대화’ 내지 유교권 선교신학은 중세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다루었던 것 이상으로 신중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는 유교에 대해,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인륜이나 정치윤리에 가깝게 여긴다. 그러나 유교는 한국에서 기독교를 가장 많이 핍박한 종교였다. 조선 500년간 국가종교였던 유교는 제사행위와 효의 행위를 동일시함으로 기독교 전래시 1천여명의 가톨릭 순교자를 내게 하였다.

현재도 한국에서는 유교의 유산으로 조상의 기일과 국가적 명절인 중추절 및 구정에 국민 다수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조상제사는 유교적 종교행사일 뿐 아니라 무속 문화권에 토착화된 고등종교들과 사이비 이단 종파들까지 예외없이 시행해 오는 공통적 의례이며, 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과 일부 개신교도까지 이를 허용하는 실정이다.

이렇게 유교 윤리의 중심이 되는 충효사상은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 대변하게 하는 조상숭배와 손을 꽉 잡고 있다. 한국의 무교적인 영성이나 유교는 영들의 충돌을 겪지 않고 영분별이 요청되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의 영을 받은 기독교의 배타적 영성과는 달리, 오히려 한국의 유·불·선교는 샤머니즘과 함께 종교다원적인 형태로 공존해 왔던 것이다. 한국 뿐 아니라 중세 중국에서도 유교권 선교는 오랜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진했고, 유교권 선교를 위한 전략도 변변치 못한 실정이었다.

유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먼저 두 종교의 세계관을 대조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분별할 수 없다. 필자는 지면관계상 유교의 구원관은 따로 정립하지 않으나, 유교의 구원은 역사 내적으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토피아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의 완전한 인간을 통해 이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성인(聖人)’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유교의 인간론을 통해 자력구원관, 중세 ‘신유교’적 영혼 산화론, 조상숭배를 통해 보이는 샤머니즘적 내세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먼저 유교의 세계관을 정의하고, 이어서 유교의 신관과 제사에 관해 서술하고,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접촉점 문제를 연구하고, 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종교혼합주의 운동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교의 종교철학을 통해 유교의 범신론을 간파하고, 유교가 기독교의 유일신론과 창조론을 만나게 될 때 유교의 범신론이 파괴되거나 기독교의 창조론이 파괴될 수밖에 없음을 예측하게 된다. 기독교와 유교의 대화는 한 마디로 창조론과 범신론과의 대화이며, 한 쪽을 포기하지 않고는 통합되지 않는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세계관

유교의 신관과 인간관은 먼저 세계관을 전제해야 비로소 논할 수 있게 된다.

공자의 세계관은 그가 친히 주석하여 후대에 전달한 역경에서 발견하게 된다. 역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관을 간직한 경서로, 그 근본을 고대 최초의 신화적 황제 복희(또는 포희)에 두고 있다. 복희역(伏犧易)은 일월성신과 산천초목 등의 자연현상의 변화하는 이치를 관찰하여 음과 양의 원리로 설명하고, 그 형상을 괘도를 만들어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게 한 것이다. 중국인들은 ‘8괘’가 가장 오래된 신화적인 인물 ‘복희’에게 근거했다고 믿는다. 이 복희 8괘도는 중국 최초의 세계관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복희역은 음(­­)과 양(―)의 3효를 겹쳐놓은 8개의 괘이며, 8괘는 공자의 역경 해설 ‘계사전’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절대자는 태극이고, ‘태극’은 양의(兩儀), 즉 음과 양을 포괄하고 있다. 음과 양의 존재 근거를 공자는 태극이라 본다. 태극에서 음양 즉 양의가 출생(生)되고, 양의에서 4상(四象: 태양(󰁍), 소음(󰁎), 소양(󰁏), 태음(󰁐)이, 4상에서 8괘(乾(☰), 兌(☱), 離(☲), 震(☳), 巽(☴), 坎(☵), 坤(☷), 艮(☶))가 출생했다는 것이다. 복희의 8괘와 후대 주나라의 문왕 8괘의 순서는 서로 바뀌어 세상의 운명적 변화를 표시하고 있다.

주역적 세계관의 범신론적 특색을 나타내는 개념은 생(生)이라는 동사에 있다. 생(生)이라는 개념은 R. Wilhelm이 Erzeugung이라고 번역한 것처럼, ‘생산한다’ 또는 ‘출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송대(960-1279)에 이르러 중국의 신유교가 생(生)을 ‘출산(production)’의 뜻으로 해석한 바와 같이, 주역의 生은 창조자와 피조물의 본질적인 구별이 되지 않는 진화론적 인간관과 범신론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공자는 귀신숭배나 조상숭배의 전통을 수용하여 윤리·도덕적으로 내면화했다. 주(周)나라의 제후국이었던 노나라는 공자 당대에 군주들이 타락하고 사회적 도덕적 타락과  외적의 침입, 홍수, 질병 등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며, 이때 왕족이며 ‘법무장관’의 위치에 있던 공자는 인륜과 정치윤리 면에 모든 관심을 기울여 그들을 지도하고자 했다. 공자를 통해 전승된 고전 3경(시경·서경·역경)과 함께 유교의 경전으로 확립된 4서는 인간의 윤리적 본성에 관한 연구 및 통치자의 윤리와 덕치주의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진 유가들의 관심 역시 ‘인간 자체’보다는 ‘인간됨’에 있고, 인간은 착한 본성을 타고났음으로 통치자는 백성을 법으로 다스릴 것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재래 종교들에 대해 비판하거나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수용하는 입장에 서 있는 윤리철학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의 효도윤리는 무속신앙과 자연신앙으로 혼합되어 있었다.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며, “능히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 생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 듯하지만 귀신 숭배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제사할 귀신(대상)을 바로 알고 제사할 것과, 제사할 때는 반드시 자신이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인 조상 내지 귀신(神)이 살아 있는 듯이 대할 것을 가르쳤다.

이러한 공자의 불가론적 입장과는 달리, 신유교 학자들은 달리 본래적 유교의 관심사였던 윤리적 범주를 넘어 인간론과 우주생성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역 뿐 아니라 도교의 가르침에도 사상적 근거를 두었다. 신유교를 대표하는 송대(960-1279)의 성리학은 그 창시자 정이천(1033-1108)과 완성자인 주회암(1130-1200)의 이름을 따 정주(程子와 朱子)학이라고도 하고, 주자(朱子)학이라고도 하며, 도교의 영향을 받아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도교의 영향이란 노자에 의해 절대시된 도(道) 개념을 유교의 절대자인 태극과 동일시한 점이다. 중국사상에 가장 깊게 뿌리내린 이 성리학은 이조 500년 동안 한국 사상을 지배한 종교철학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연구하던 송·명대에 발전한 유학은 크게 두 주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으로 유입된 정이천(程子)과 주회암(朱子) 계통을 이은 주자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정이의 형 정호(1032-1085)가 창시하여 육구연(육상산, 1139-1193)과 왕수인(왕양명, 1472-1529)의 계통을 이은 육왕학파-일명 심학(心學)-이다. 이 두 학파의 차이는 전자를 성즉리(性側理)로, 후자를 심즉리(心側理)로 특징 지운다. 중국과 한국에 서 더 번창한 것은 주자학이며, 한국에서는 육왕학을 불교적 색채를 띄고 있다 하여 배척하고 주자학만을 전통유교로 받아들였다. 13세기 안향(1243-1561)에 의해 한국에 전래한 주자학은 16세기에 퇴계(1519-1561)와 율곡(1536-1584)에 의해 대성하게 되었다.

주돈이(周子, 1017-1073)에 의해 명시된 바, 성리학의 세계관은 주역과 노자사상과의 혼합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周子)는 우주의 근원자를 주역적(공자의) 개념으로 ‘태극’이라 하였고 노자의 ‘도(道)’와 동일시하였다. 태극은 음양으로 되어 있고, 태극을 또한 ‘무극’(無極)이라 하였는데, ‘무극’이란 개념이 없는 ‘극’이라는 뜻으로 이율곡은 ‘무극’을 알 수 없는 궁극자로 해석하였다. 또 무극은 태극이 있기 이전의 궁극자를 의미하기도 하나,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고 다만 논리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선후관계이다. 이 태극과 무극을 풍우란은 supreme ultimate와 ultimatless로 알기 쉽게 번역하였다. 주자(周子)가 태극을 무극이라 한 주장과 과거에 노자가 도(道)를 무명(無名)이라 한 것과 병행된다.

춘추전국시대의 도가 장자(莊子, 370-286)는 이미 도(道)와 하나 되어 속세를 초월하여 무극의 저편으로 춤추듯 뛰어 오른다는 신비로운 경지를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장자가 무극을 절대자와 합일되는 황홀한 경지로 설명하는 것과, 주자(周子)가 무극을 태극이라고 보는 점은 절대자로 지칭하는 면에서 동일하다. 태극과 동일시되는 도(道)는 성리학적 궁극자로서 그들의 경전인 역경의 개념보다는 오히려 노자의 도 개념에 부합된다.

이러한 노자의 도 개념은 존재론적인 마지막 의문-대답될 수 없는 제일 원인(prima causa)-을 대체한 임시개념이다. 즉 도교의 도는 인간이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추상적인 종교 철학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도와 태극 또는 무극은 같은 개념으로 호칭되며, 도와 태극 밑에 하늘(天)과 땅(地)가 보충적 이원론(complemental dualism)으로 종속되고, 신(神)과 귀신(鬼神)은 천지, 음양, 기(氣) 등의 개념과 비슷하며 인격화되어 사용된다.

신유교의 철학적 근원자로는 理와 氣라는 개념이 있다. 물론 氣는 고대부터 연기·수기·풍기·공기·혈기 등으로 사용되던 단어들 속에서, 점차 만물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개념으로 발전했다. 주전 110년경 이미 사마담은 음양가를 6家 중 하나로 칭하게 되었고, 그는 음양을 만물생성의 근원으로 믿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노·장 철학은 음양의 氣가 道에서 나와 만물을 변화 생성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론(氣論)은 특히 11세기에 이르러 북송의 철학가 이구와 왕안석에 의해 만물의 근원자 내지 우주의 본질로 보게 되었고, 氣철학의 집대성가인 장재(1021-1077)에 의해 더욱 절대적인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장재는 태허(太虛)를 무형의 기로, 만물을 유형의 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기가 모여 만물이 되고 만물이 흩어져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고 함으로서, 천지가 기로부터 나옴을 주장했다. 장재는 기와 허를 동일시하여, 이들을 분리할 수 없는 우주만물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장재의 기철학과는 대조적으로 공자의 태극론과 맹자의 호연지기론을 기틀로 삼은 신유교는 정자의 성즉리(性卽理)론에 의하여 이(理)와 태극이 동일시되고, 우주의 근원자가 기(氣)가 아니라 이(理)라는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리학은 이와 기를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함으로서 선후 문제에 관한 논쟁을 일삼게 되었다. 한국의 유자들이 율곡과 퇴계 이래 2세기에 걸쳐 서인·동인·남인·북인, 소북·대북, 노론·소론으로 당파를 짓게 된 것도 바로 理와 氣의 선후에 관한 논쟁과 정치문제로 얽혀 발생한 것이었다.

신유교의 우주관은 주렴계(周子)의 태극도설에서 완성되었다. 주자(周子)는 태극이 무극이라는 것과 태극, 즉 음과 양이 결합함으로 수·화·목·금·토(5행)와 만물이 화생(化生)했다는 논리이다. 성리학은 태극을 理로, 음과 양을 氣로 보았고, 氣는 확장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며, 기가 뭉치면 만물이 生하고, 흩어지면 만물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주자(周子)는 맹자처럼 기가 우주에 충만한 것으로 보고, 장재처럼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모두 이 氣에서 생출한다고 믿었다. 즉 인간은 기의 형체이거나 기의 변형물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주희(朱子)가 만물의 존재근거이며 만물 속에 내재해 있다는 理를 만물의 주재자로 보는 것이 기철학자인 장재와 다른 점이다. 理는 음양(기) 위에 올라 타고 있으나, ‘창조능력(creative power)’은 없고 모습도 그림자도 없는 형이상자일 뿐이라고 한다.

신관

“유교에도 신이 있는가? 유교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 질문은 유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유교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도 않고, 그에 의한 구원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의 세계관이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듯 공자 이래 유자들의 존재론과 세계관은 음양합일(태극)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신들과 우주의 생성과 변화도 바로 이 음양 조화에 의하여 발생한다고 믿고 있다. 공자 시대의 신개념인 ‘상제’ 역시 귀신’과 본질적으로 같으며, 음양 조화로 인해 발생된 존재이다. 이러한 유교적 진화론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의 창조론을 진화론과 혼동하며, 하나님을 귀신과 구별하지 못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주대(BC 1222-247)에 이르러서는 신 중심적 관심으로부터 인간 중심으로 바뀌면서, 인격적이고 최고신으로 숭배했던 ‘상제’와 같은 뜻으로 ‘天’을 사용하고, 점점 군왕들의 통치와 덕목을 중심으로 내면화하게 되었다. 그 후 ‘인간은 신의 주재자’이며, ‘백성은 신(神)의 주인’이라는 사상까지 나타난다.

공자 자신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하여, 道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를 해석할 뿐이라고 설명한 바와 같이, 공자에 의해 내면화된 천(天) 개념은 본래적 上帝의 인격성이 제외되지 않은 채, 윤리도적인 관점에서 발전되었다. 공자의 신관은 그러므로 그의 전통문화 수용이라는 측면과 그 내면화를 통해서 병행되는 두 가지의 신관으로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자의 신(神) 개념은 첫째로 역경 계사전에 표명되는 바와 같이 만물 속에 내재한 미묘한 능력으로 조화의 작용, 즉 음·양 두 기(氣)의 굴신(굽힘과 폄) 또는 헤아려 알 수 없는 음양의 변화를 말한다.

공자에게는 신(神)과 귀신(鬼神)의 개념이 구별되지 않는다. 또 번역가들도 그의 ‘神’ 개념을 귀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다. 전통유교에서 ‘귀신’ 또는 ‘귀’와 ‘신’은 인간론과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귀신이란 첫째로 신적 근원자를 일컬어 천(天), 신, 상제, 기(氣) 등과 동일시되고, 둘째로 만물의 생성(신)과 사멸(귀), 양의 신령(신)과 음의 신령(귀), 펴는 것(신)과 돌아가는 것(귀), 산 사람(신)과 죽은 사람(귀)을 일컫는다.

공자의 신관은 둘째로 천생덕(天生德)론과 그의 천명(天命) 사상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天을 도덕의 규범이며 인간 속에 내재한 윤리적인 명령자로 규명한 것이다. 유교의 天命은 인간의 도덕적 자아이며 동시에 본래적 자아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유교의 세계관, 신관, 인간관, 종말관을 간파하게 되며, 이 교리들을 하나로 꿰는 요소는 바로 신인동격사상을 기초하는 범신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천명(天命)은 본래 서경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보고 듣고 명하고 벌하는 인격적인 명령자였다. 이 天은 상제와 같은 개념이었고, 산천의 신, 태산, 천지 4시와 함께 모두 숭배 대상이었다. 그러나 공자가 50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하는 天命은 더 이상 숭배대상이 아니라, 바로 인간의 자아이며 그 도덕적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전대 철학과 송연창 교수는 그의 학술연구 논문에서 공자의 천명을 “자아의 본래적 존재 근거 내지 본래적 자기”라고도 한다. 천명자각이란 바로 자기 본래성 자각을 말하며, 인간은 “창조적 대아(大我)로 향상되어야 할 막중한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송연창 교수가 밝히고 있는 공자의 범신론 사상은 공자의 손자 자사의 ‘중용’에서도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중용 1장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는 천명과 인간의 性을 동일시하고, 인간의 본성대로 행하는 것을 道라고 하는 신인 동격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공자 이래 유교에 흐르고 있는 윤리관의 근저에는, 유·불·선교와 힌두교의 공통분모인 아시아의 범신론 사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이 범신론은 공자의 역경주석 계사편에서 천지인(天地人) “3재의 도”(三才의 道)내지 “3극의 도”(三極의 道)라 하여 공자가 인간을 天과 地와 함께 궁극자의 위치로 신격화한 점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이 범신론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거쳐 송대에 이르러 불교, 도교와 혼합된 신유교에 의해서 더욱 견고해진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 神 내지 上帝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상제는 “음양이 어울려 전개된 후에 그 속에서 주재하는 것”이라고 하고, “개별적 존재”로서의 초월자나 인격적인 창조주는 있을 수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理는 성리학의 거성인 朱子에 의해 태극과 동일시되고, 궁극자로 인식되지만, 사물 속에 내재한 자이며, 인간 속에 내재한 理를 性이라 하고, 모든 개체의 理를 총괄하는 理를 태극이라 하였다. 그런즉 태극은 만물에 내재해 있다. 이러한 태극 사상과 정자의 性卽理 사상은 주렴계와 이퇴계에 의해 인극론(人極論)으로 진술되었다. 즉 유교에서 인간의 본질은 절대자이며 인간 신격화를 확고하게 한다.

3. 제사

중국 고전 <예기(禮記)>는 토착종교인 샤머니즘의 숭배대상인 백신(百神)을 대상으로 붉은 송아지를 잡아 희생제를 드리는 제의를 기록하고 있다. 백신 중에는 일월성신, 사방신, 천지산천, 죽은 사람들의 혼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또 괴상한 일을 하는 모든 것을 신(神)이라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은 상제(上帝)를 최고신으로 숭배했으며, 모든 자연신들은 상제의 군신 내지는 하늘의 현현으로서 숭배했던 것이다. 공자 시대의 중국 종교로는 샤머니즘밖에 없었다.

공자 자신은 귀신에게 제사할 때 반드시 재계하고(몸과 마음을 깨끗이 함), 의복과 음식, 거처지까지 구별하였다. 논어에는 공자가 식사 전엔 반드시 고수레(음식을 조금 떼어 바침)를 하였다는 것과, 마을 사람들이 푸닥거리를 할 때는 조복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는 것, 붉고 뿔이 반듯한 송아지를 산천의 신이 받지 않겠느냐는 희생제에 대한 관심, 그의 자연신앙 등이 서술되어 있다. 공자의 자연신앙은 맹자에게로 전승돼, 그는 깨끗한 희생제를 사직(흙 귀신과 곡식 귀신)에게 드려도 가뭄과 홍수가 나면 사직을 바꾸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토신제는 이조 시대에도 주자와 율곡의 주장대로 사시제를 지낸 다음에 행했고 토신에게 복을 구하기도 했다.

유교문화 속에서 중국과 한국 초기의 가톨릭 선교를 통하여 크게 문제시된 조상숭배에 대해서 유교와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대조·연구함으로써 선교 연구에 공을 세운,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원 가톨릭신학대 최기복 신부는 “고대 조상들이 사후에도 하늘에서 상제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 그들이 후손들에게 복과 화를 내린다고 믿었다”고 한다.

성리학자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반은 신이며 반은 귀라고 하는데, 사람이 살았을 때는 신(神)이 주(主)가 되고, 죽은 후에는 귀(鬼)가 된다고 한다.<예기>에는 사람의 몸에 기(氣)와 백(魄)이 있어, 전자를 神의 신기한 작용으로, 후자를 鬼의 신기한 작용으로 보면서, 사람이 죽으면 기가 하늘로 떠올라서 영원한 신령의 무리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 후대에 성리학자들은<예기>의 기(氣)와  백(魄) 대신에 혼(魂)과 백(魄)의 개념을 사용하며, 혼은 신(神)이고 백은 귀(鬼)라고 생각하고, 이 혼과 백은 사람이 죽음으로써 갈라진다고 본다.

혼은 천(天)으로 돌아가고 백은 지(地)로 돌아가, 혼백은 산화되어 일원기(一元氣)로 돌아감으로써 고유성이나 개체성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유교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 영혼 산화론은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완전소멸이 아니라 제사를 통한 감흥으로 죽은 자의 현재를 경험하는 강신술(spiritism)과 혼합되었다. 유자들은 원한이 맺혀 죽거나 흉사의 경우엔 혼이 산화되지 않고 한동안 요괴가 되어 ‘신적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위와 같이 성리학은 사령이 근원자로 돌아가 원기(元氣)가 되고, 기가 산화될지라도 오히려 그 理는 없어지지 않으므로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그 제물을 흠향할 수 있다는 무속적 강신신앙(spiritism)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유교의 범신론적 사상체계 속에서 조상신은 천신(天神)과 본질적으로 동일시되고, 조상숭배가 바로 천(天) 숭배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 조상은 유교에서 유일한 숭배 대상이 되고 있다.

유교의 상제례에서 절대적인 요소는 성(誠)이다. 보통 지성 또는 정성으로 이해되는 성자(誠字)는 중용에 만물의 마침이며 시작이라 하고, 성실(誠實)하지 않으면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실(誠)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고 만물을 이룬다고도 하고, 지극한 정성(誠)은 신과 같은 것 내지 귀신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神, 謂, 鬼神).

성(誠)이란 위와 같이 만물 실존의 근거일 뿐 아니라 도덕 실천의 근거로써, 중용 20장에서는 道를 아는 지식(도란 여기서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의 5륜을 말함), 도를 체득하는 인(仁), 도를 실천하는 용기, 즉 지, 인, 용(知, 仁, 男)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유교의 개념 중의 하나이다.

또 18세기 한국 천주교도 이벽(1754-1786)에 의하여 설명된 유교의 精誠이란, 제사 지낼 때 귀신(내지 신)을 파악할 수 있고 귀신을 접할 수도 있게 되는 개념으로, ‘음, 양’ 귀신은 본래 초감각적이지만 그것이 가감각적(可感覺的)이 된다고 설명한다. 조상을 제사지낼 때, 음․양의 기(氣)가 여러 가지로 결합함으로써 가감적인 형태를 지닌 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같이 제사드릴 때는 성(誠)에 의하여 귀신의 존재 여부가 결정되고, 제물의 흠향 여부가 결정된다. 율곡도 산 사람이 성경(誠敬)하면 귀신도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조상이 거처하신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하던 것, 즐거워하던 것,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여 사고가 완연히 목전에 계심을 보게 될 때 ‘산화된 기(氣)’가 이에 격감한다는 것이고 기(氣)가 소멸되었더라도 이(理)가 역시 격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기(禮記)>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성(誠)은 제사를 준비하는 재계의 과정에서 실현된다. 10일간 욕망을 끊고, 마음을 가다듬고, 심신을 깨끗이 하며, 음식과 행동을 삼가며, 음악을 듣지 않고 부정을 피하며, 재계함으로써 신령을 맞을 준비를 하면, 고인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앞에 떠오르고, 제삿날엔 고인의 영혼이 그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고인의 음성을 듣는 느낌이 든다. 효애(孝愛)의 마음이 골몰하면 부모의 영혼이 눈 앞에 떠오르고, 효경(孝敬)의 정성을 다하면 영혼이 그에 감흥한다. 그러므로 향을 피워 혼기(魂氣)를 모시고 술을 부어 백(魄氣) 기를 모셔서 합일시키고 신령을 감흥케 한다는 것이다.

영혼의 감흥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자 속에 내재화하는 것으로 상제례는 완성이 된다. 신령이 내 안에 있다는 느낌은 슬픔과 공허감을 안정시켜 주고, 사자와 일체감과 통교를 느끼는 것이다. <예기>는 귀신의 실재에 대하여 사람이 죽으면 그 정기가 뭉쳐 강한 향기를 뿜어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고, 신령이 강림하면 곧 사라져 버릴 때가 가까워지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이 같이 유교는 전통적인 무속적 강신신앙을 그대로 수용하여 귀신을 섬기고, 이를 효행으로 못박아 절대시하였다. 예기는 예(禮)의 가장 중요한 것을 제사라 하고, 제사의 10가지 윤리 중에 그 첫번 것을 ‘귀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바와 같다.

제의의 목적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귀신과 통하게 하는 것과, 도의를 흥하게 하는 것으로, 제사를 통해서 효가 시행되고, 효자가 아니면 부모를 제사할 수도 없다고 한다. 효성을 측정할 때는 첫째 생시에 부모를 봉양하며 그 효순(孝順)으로서 효를 측정하며, 둘째 부모가 죽으며 상례를 시행하되 그 비애의 강도로써 효를 측정하고, 셋째 상례 후에는 제사를 지내며 그 경애함과 정기적인 제사로써 효를 측정한다.

그러므로 제사와 성(誠)은 부모 사별을 막는 효행으로 인정되고, 효도의 실행 이유가 된다.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악덕으로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교 제의의 이러한 효와 우상숭배의 양면적 의미는 기독교 선교에 엇갈린 견해를 낳았고, 그 대표적인 본보기를 중국 가톨릭 선교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4. 선교접촉점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제시된 토착화 신학은 지금까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조상숭배를 단순한 윤리적인 의례로 보아 허용하자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조상제사를 종교적인 의례로 보아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조상숭배와의 타협과 충돌을 가장 심하게 번복해 왔던 천주교회의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입장이 서로 다른 쪽을 무시함으로써 현지 선교의 심각한 문제 해결을 기피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해답을 제시해야 할 과제가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상숭배를 찬양하는 크리스천은 하나도 없고, 또 부모님을 공경해야 된다는 것을 찬동하지 않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차례가 윤리적인 것이냐, 아니면 종교적인 것이냐에 대하여 해석에 관한 것이다. ‘윤리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제사를 지내고, 이것이 ‘귀신 숭배와 연결돼 있다’고 하는 사람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왜정 시대 신사참배 때도 역시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다만 황실이 선조와 그 덕을 찬양할 뿐이라고 하여 기독교인을 참여시켰다. 예수회도 조상 제사를 숭배가 아니라 추모와 효성이라 하여 허용하고, 신주를 귀신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자손의 사모지심의 의지처라고 하여 허용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제사가 효도냐 아니면 우상 숭배냐 하는 분명한 신학적인 제시가 필요하다.

박근원 박사는 유교의 제례에 관하여 진술하면서 “현대는 제사를 지내며 절할 때 자기 조상을 우상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축하였다. 현대 천주교와 일부 개신교 역시 같은 입장에서 이를 허용하고, 조상 제사도 지내고 주일 예배도 드리는 방법을 택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면 이들은 제사 대상 없이 제사를 지내는가? 무속시대로부터 유자들을 통해 지금까지 숭배해 왔던 불멸의 영혼(氣 내지 理)에 대한 신앙이 현대에 와서 파괴되었는가?

사실상 제사 행위와 숭배 행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제물을 바치는 것이 혹 숭배행위가 아니라고 고집할지라도 귀신(죽은 조상)과의 친교행위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죽은 자에게 기도는 하지 아니할지라도, 사자(死者)와 분리되는 것은 거부하고 있다. 현대의 유자들도 세속 시대에 살면서 불가지론 적이거나 불성실해질 수는 있으나, 영혼불멸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고, 고 연령층이 될수록 조상숭배는 더욱 실제적이 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조상숭배에 개방적인 입장인 박근원 박사도 “제사가 조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예식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에 위배되는 행위이다”라는 것이다. 천주교가 마리아 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성도들의 통공(通功)의 신앙을 가졌을지라도, 조상숭배의 맥락에서 선교에 큰 거침돌이 된다.

문제는 유교의 효와 조상숭배가 뗄 수 없이 연합돼 있어, 둘 중에 하나만을 기호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위에서 고찰한 것과 같이 유교 제례의 숭배 대상은 영혼 불멸론과 관련된 사령임을 논란할 필요가 없다. 현재도 우리나라의 샤머니즘과 혼합된 유교식 상례 및 제사는 불멸의 영혼을 위해 초혼(혼을 불러 회복시킴)과, 삼헌제(혼의 방황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와, 위령제(시체 매장 후 무덤 앞에서 드림) 등을 드리며, 상제례를 거행하고, 사당에 죽은 조상의 이름을 새긴 신주를 모시고 제물을 드리며 사건을 고하면서 죽은 자와의 교통을 꾀하고 있다.

이러한 강신신앙과의 혼합주의 문화권에서 만나는 조상숭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선교사가 배척을 받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중국의 예수회 선교의 경우처럼 제사를 용납하면서 관용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루스드라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처럼 강력하게 우상숭배를 저지하고,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주께 돌아오라(행 14:14-18)는 충돌을 겪을 것인가?

갈라디아서 1장 6-9절과는 대조적으로, 고린도전서 9장 19-23절의 바울서신이 나타내는 복음과 문화의 긴장관계는 오늘날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복음의 유일성과 문화의 다양성 사이의 갈등관계와 대조된다.

이미 16세기에 중국 유교문화권에서 선교를 시작했던 예수회는 유자들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때 승복을 벗고 유복을 입어 한문을 연구하며 스스로를 서유(西儒)라고 칭하고, 서양인의 발달된 과학지식과 기술을 소개하면서 중국인의 호의를 얻어 점진적으로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

예수회(Jesuit)도 중국 전통 유교에 호의를 가지고 조상제사와 공자숭배 의례에 대해서 수용적인 자세로 접근한, 유교를 인간 본성에 따라 조물주를 경외하고 천리에 순응하는 종교로서 천주교의 기본교리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유교의 제의를 종교의식이라기 보다는 단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의례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조상숭배와 공자 공경 의례를 허용하고, 신주를 산 사람들 마음의 의지처라고 재해석하여 신주를 모시도록 허용하였다. 이러한 선교 전략은 보통 문화순응설(accomodation)이라고 한다.

예수회는 조상제사에 대하여 “생시와 같이 계속 애정과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요, 사자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제물을 먹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사자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게 무엇을 구하지도 않는다”고 변호한다. 공자 숭배 의례도 “공자를 신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선사(先師)로 생각하여 감사드릴 뿐이요, 그에게 기도문을 염하거나 어떤 청원을 드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식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예수회는 그렇게 함으로서 유교를 천주교와 접목시켜 천주의 존재론과, 영혼 불멸론, 사후 천당 지옥설, 애주애인(愛主愛人)의 도를 설명하려고 하였으며, 전통 유교가 天主를 섬겼다는 것을 유교 경전을 통해서 입증하려는 것이었다.

도미니코회(Dominikaner)는 예수회의 위와 같은 적응정책에 대하여 교황청에 여러 차례에 걸쳐 이의를 제기하였다. 교황청은 1656년에 내린 관용 결정이 1645년의 금지 결정의 무효화가 아니라는 것이고, 훈령에 언급한 모든 것을 지켜야 하며, 제기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킬 것을 선언하면서 1669년 두 개의 서로 모순된 훈령을 종합하였다.

이와 같은 제의 논쟁은 유교권에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면서 효성이나 우상숭배의 그 한쪽만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쪽을 무시하려는 경향이었다. 선교는 충돌과 배척으로 인하여 차단되어도 안 될 것이고, 관용과 타협으로 진리의 절대성이 파괴돼도 안 될 것이다.

한국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는 한국의 3대 제일(祭日)인 기일(忌日)과 추석과 정월 초하루의 절기를 접촉점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한국에는 기일에 귀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변조한 특유의 토착 예배가 있다. 이것이 추도회이다. 추도회는 선교적 측면에서 비기독교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교회 담을 넘어 봉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추도회는 복음의 수용도가 비교적 높은 감정 상태와 접하게 되고 인간의 한계성, 죽음, 사후 세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관한 메세지를 진지하게 전달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죄의식이 살아 있는 상례의 경우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더욱 긴박하게 요청된다.

그러나 추도회가 종래의 제례와 잘 구별되지도 않은 채, 어떤 변이된 형태의 조상숭배로 오해하는 비신자들이 참여한다. 이때 집례자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포용하고 메시지를 통해서 계몽한다. 일부 신자 중에서도 이런 혼돈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추도회에 관한 철저한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 추도회 진행 중에 재래 우상숭배의 잔재가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실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추도식 집행자와, 그렇지 못하고 귀신과 연합하고자 하는 추도식 동참자들이 섞여 있다. 이러한 혼합주의 예배는 추모예배 때, 음식을 차려 놓고 예배를 드리려는 고집과, 그것을 거절당했을 때의 섭섭함을 숨기지 못하는 갈등에 부딪힌다.

추도회는 귀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며, 그 공경과 추모의 대상이 귀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유교의 차례의식 절차에 초혼과 강신과, 신이 강림하면 무릎을 꿇고 축문을 읽는 것(독축), 음식을 들도록 귀신에게 권하는 것(첨작), 밥뚜껑을 열고 수저 바닥이 동쪽으로 가게 꼽아서 왼손잡이 귀신이 먹도록 돕는 것(제반삽시), 식사할 동안에 방문을 열고 나와서 2, 3분 기다리는 것, 또는 뜰에 나가서 몇 분 있다가 기침하고 들어오는 것(합문), 숭늉 그릇에 놓인 수저를 다시 거두고 뚜껑을 덮는 것 등의 의식이 있다. 이런 의식들이 바로 죽은 영혼들을 대상으로 치른다. 차례 의식은 성경적으로 귀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경배 대상이 어떤 피조물이나 천사여서도 안 되고, 오직 모든 피조물의 근원자이신 창조자이며,  그분께만 예배를 드리고 영광을 돌리며 어떤 산 피조물이나 죽은 피조물에게도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전통문화의 아름다운 유산인 효행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조상숭배와 효행을 다 거부하는 문화 파괴자로 나타날 것이다. 유교 문화권 선교가 기독교가 도덕의 근본을 허물어 버린다는 유자들의 비난에 대답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길은, 십계명에 기록된 바와 같은 효행 뿐이다. 죽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산 사람에게의 효행이다. 효행을 통해 전통적인 고부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가정은 화목하게 될 것이며, 유자들은 예수 믿는 며느리를 구할 것이 아니겠는가? 효를 이어나가는 것이 제사의 중요한 목적이 되기에 추도회를 통해서 역시 가족 공동체의 화목을 꾀하며 전통적인 대가족 문화 유산에 충돌을 빚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상숭배를 중심으로 모였던 과거 유교적인 명절이 변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명절이 되며, 아름다운 문화적 덕목인 효행을 기독교에서 실행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은 종교성이 약하고 형식화한 유교 윤리에 접목되어 그 활기를 찾게 될 것이다.

제사 및 추도회 문제에 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우리의 참 예배 대상을 똑바로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을 창조해 주시고, 우리 좋은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면서, 우리의 깊음 속에서부터 찾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로 제시해야 될 것이다.

또 사랑의 가족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꼭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혈연 공동체가 모여서 서로 사랑하고, 산사람에게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효성과 우상숭배의 혼합문화권에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선교학적 문제는 이것이다. 기독교가 유교의 효행을 능가하는 행위를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효도해야 한다. 유교권 선교의 심각한 문제는 바로 불효이다. 그런데 안일하고 세속적이며 이기주의적인 현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참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효행 없는 유교권 선교는 생각하기 어렵다. 효행 없는 복음전도, 선행 없는 기도생활···, 이것은 오히려 유교권 선교를 가로막을 것이다. 우리는 천주교에 대한 유자들의 비판을 명심해야 한다. 은총과 속죄를 전하는 기독교가 칭의를 믿으면서 덕행을 무시한다면, 자기를 완성하여 천인합일을 꾀하려는 유자들에게 결코 설득력 있는 복음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현지인 신자들은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 공동체 속에 머물러 더욱 사랑을 실천하고 효행으로 본이 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착한 사람들이고 전통문화의 파괴자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져야 한다. 유교 문화권 선교사들은 사랑의 실천으로 현지인들의 오해와 불신앙을 극복해 나가야 하고, 사역할 때마다 부딪치고 복음과 함께 배척을 당할 것이 아니라, 속히 충실한 현지인 제자들을 양육하여, 그들 자신이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전달자와의 이질감을 좁혀야 할 것이다.

선교사는 배척을 받을지라도 복음은 살아 남아야 한다. 주의 말씀이 흥황하던 두란노서원에서는 현지인들이 와서 자복하고, 마술사들이 스스로 그 책을 불사르니 은 오만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행 19:18 이하).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들 스스로가 악습을 폐지할 것이다.

문제는 조상제사를 포기함으로써 불효자로 낙인찍힐 때,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천주교는 오히려 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는 비난까지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가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 뿐 아니라, 제사 때에 우러나오는 지성과 효를 능가할 만한 실제적인 해답을 주지 못하면, 유교권 선교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하기에 큰 어려움이 될 것이다.

세속화 시대의 개인적·사회윤리적인 부패와 타협, 이것이 교회 안에 있을 때 어떻게 교회가 효를 실행하겠는가? 우리는 우상숭배와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십계명대로 살아 있는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 한다. 산 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진정한 사랑의 아버지를 경외하도록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조상숭배 문화권에서의 선교의 길이다.

효도를 하지 못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말로만 효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행실로써 살아있는 부모님께 효도를 하면, 기독교가 문화 파괴자도 아니고, 배역의 종교도 아니고, 공동체 파괴자도 아니고, 정말 공동체를 사랑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종교라는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어

공자가 가르친 효행, 이것은 유교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효, 효도, 효행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유교 문화권에서 효도하지 못한다면, 복음 전도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제사와 효도는 아주 밀접하게 하나로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면서 효도를 해야 하나, 제사를 지내지 않고도 효도를 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유교는 본래 토착화하는 데 문제가 없는 종교다. 왜냐하면 유교는 강령술을 가지고 있는 샤머니즘, 애니미즘 이런 것과도 결합이 잘 되고, 불교나, 도교와 같은 창조론이 없는 범신론 사상을 공통점으로서 서로 결합할 수가 있다.

특히 유교와 샤머니즘이 잘 결합될 수 있는 것은 특히 창설자가 윤리인으로서 영성이 메마른 종교를 창시한 이래, 그 본토에서 샤머니즘의 영성을 얻을 수 있었다. 공자의 경우에는 조상을 숭배하고 경배하는 재래의 샤머니즘을 효도 윤리로써 뒷받침을 해준 것이다. 그래서 효와 조상숭배가 하나로 동전의 양면과 같이 묶여 있는 것이다.

‘효’는 둘째 돌비의 첫 계명인 바와 같이, 기독교와 유교가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보충적인 관계이지만,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상충적인 관계이다. 왜냐하면 신앙 대상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유교의 종교 대상은 제례에서만 나타나는데 “하늘”, 또는 하늘에서 유출된 그 어떤 본질로 이해될 수 있는 조상의 영들, 또는 理와 氣로 다시 돌아가는 조상의 영들로서 이해된다.

유교의 효는 산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도 시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 효성은 세 가지로 수행되는데, 하나는 산 사람에게, 또 하나는 방금 돌아가신 사람의 상례시에, 그리고 해마다 돌아오는 제례에 의해서 측정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죽은 사람에게 효도하는 것이 아니고 철저히 산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윤리이다.

우리는 기독교와 유교의 차이가 세계관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 차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 창조라는 개념도 없는 범신론과의 차이이다. 기독교와 유교와의 사이에서 종교 다원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실하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영은 유교의 귀신과 결코 동일시될 수도 없고, 서로 비슷한 영으로 오해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늘날 세계교회 협의회가 영적으로 혼미하여 영적인 혼합주의로 돌진하는 모습은 실로 통탄스럽다.

우리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반역했던 우상숭배를 버리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와야 구원을 받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우상숭배죄악에서 용서를 믿으며, 어떤 피조물과도 동일시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영인 성령을 선물로 받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순교적인 신앙과 사랑으로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이 크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구원을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해야 할 것이다.

/이동주 박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은퇴
현 선교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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