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41] 요한복음 16장 8-15절 강해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주님이 15장 후반부터 16장에서 강조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내게 보내줄 터인데 이 성령을 여러분이 받으면 세상을 책망할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아직 주님이 이야기하실 때는 보혜사 성령, 약속의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이다. 그렇지만 당시에 그들은 주님을 믿었다. 깨끗케 되었고, 포도나무 가지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신약의 교회란 엄청난 축복을 받은 무리이다. 교회는 바로 이 오순절 성령을 받은 날부터 시작되었다. 교회는 특이한 존재이다. 가장 축복된 존재이다. 아브라함도 주님을 믿었고 다윗도 성도였다. 당시 제자들은 아직 오순절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분명 예수님 말씀을 받았고 깨끗해졌다고 하셨다.
하지만 신약의 교회인 우리는 보혜사 성령을 얻은 자들이다. 약속의 성령을 얻었다(엡 1:13). 믿음으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이 성령을 얻게 되면 교회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물론 보혜사 성령의 기능에 대해서는 16장 이후에 더 많은 내용이 나오지만, 가장 먼저 이 보혜사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죄, 의, 심판에 대해 책망하심
죄에 대한 책망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책망이다. 오순절 성령받은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을 볼 때 뭔가 찔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불신에 대한 찔림이다. ‘아, 저들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성령받은 사람들을 대할 때 이 세상은 그들의 불신의 죄에 대해서 책망을 받는다.
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의에 대해서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저희가 나를 다시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비로소 성령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 나타났을 때 그리스도로 인한, 하늘로 올라가신 분으로 인한 의가 이 땅에 산출되는 것이다. 그럴 때 저들은 그 의를 보고, 성령받은 교회의 의를 보고 책망을 받는다. 속에 찔림이 있게 된다. 오순절 때 이 일이 정확하게 일어났다. 그들이 성령을 받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며 책망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가 승천하셨기에 보지 못하지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보면 의를 대하게 되고 책망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심판에 대한 책망은 우리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사단을 심판한 것을 말한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 성령이 임하고 성령받은 무리가 일어날 때, 모든 사탄 마귀의 궤계, 모든 거짓된 교리들, 거짓된 사상들, 거짓된 이단적인 무리들이 심판을 받게 된다. 오순절 성령받은 교회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들은 심판을 받지 못한다. 그들이 주인 같고 다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오심으로 참된 주의 성령을 누리는 자들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주님으로부터 심판받은 무리들이, 십자가에 정죄받고 심판받은 그 상황이, 책망되고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포도나무를 귀히 여기시는 이유이다. 세상으로부터 분별되어서 하나된 교회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오늘날 이런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이 세상을 책망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셨다 가심으로, 성령을 보내시고 이 세상을 책망하고 심판하시는 일을 하기 원하셨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도리어 어떤 일이 있는가? 이 세상 사람들의 양심이 교회를 책망한다. ‘어떻게 교회가 저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목회자가 저럴 수가 있을까?’ 세상이 교회를 책망하고 있다. 이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깨끗이 씻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포도나무에 견고하게 붙어있지 않고, 오순절 성령으로 충만되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지 않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세상과의 정확한 분별을 갖지 않고 혼동되어 생활할 때, 우리가 어떻게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이 세상을 책망하는 방식의 교회가 될 수 있는가? 가능하지 않다.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더 이를 말씀이 있지만 지금 그들의 상태는 감당할 수 있는 상태임을 아셨다. 그래서 더 일러주어야 할 말씀에 대해서는 보혜사 성령이 오신 이후로 미루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최고의 선생이기 때문에, 그들의 상태가 그것을 받기에 벅찰 때는 가르치시지 않는다. 기다리셨다가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생겼을 때 가르치신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제자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하셨다. 종교인들이 너희를 출회할 것이며 죽이는 자가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과 3년 반 동안 함께 다니셨지만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함께 계셨기에 주님이 제자들을 지키시고 책임을 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나셔야 하기 때문에 할 말씀을 하신 것이다.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주 큰 사건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셔야, 이 성령을 받아야 그때서야 어떤 말은 감당할 수 있다고 하셨다. 이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도 주님이 더 이르시는 말씀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시는 것은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좀 비약적으로 말한다면 당시의 제자들보다 오늘날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역량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오순절 성령 이후의 시대이고 여러분은 그 성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큰 것이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는 성령이다. 모든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인도한다는 말은 그저 뭔가 가르친다는 말이 아니다. 헬라어로는 ‘호데게오’라는 말인데 영어로는 ‘guide’, 즉 안내한다는 뜻이다. 성령께서는 안내하는 일을 하신다. 모든 진리 가운데로 안내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며 함께 먹고 마셨지만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수 없으셨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야 그분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에서 진리는 어떤 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진리는 주님 자신이다. 14,15절에 나오지만 성령께서는 내 영광을 나타내고 성령께서는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신다고 하셨다. ‘내 영광’, ‘내 것’은 주 예수께 속한 것이다. 모든 진리는 아들과 관계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계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진리’라고 하셨다. 그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다. 예수가 진리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기독교가 없다. 성경은 결국 그리스도 때문에 있는 말씀이다. 4복음서는 역사이다. 주님은 이런 일을 하시고, 이렇게 사시다가 이렇게 죽으셨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다는 증언들이다. 복음서 이후의 서신서들에는 그분의 어떠하심, 그분의 역사, 죽으심이 의미하는 것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분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가? 구속을 주셨다. 그와 함께 우리가 죽어서 죄에서 벗어났다.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우리는 예수와 함께 부활했고, 새 생명을 갖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있기에 많은 교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진리이다. 그리고 성령은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여러분을 안내해주시는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인격 안으로 인도해주심으로 그분의 미덕, 덕성들이 여러분의 것이 되게 하신다. 그분의 사랑과 겸손과 인내와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으로써 우리는 죄 용서를 받는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기에 우리는 죄에서 벗어난다. 죽었기 때문에 모든 민족 가운데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이, 간격이 다 허물어졌다.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화목되었다. 하나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진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로 체험하도록 인도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보혜사가 오시지 않으시면 그리스도의 어떠하심, 인격과 역사, 모든 진리를 체험하며 우리 것이 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분이 계시지 않다는 뜻이다. 보혜사가 오셔서 하는 일은 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나는 성도 여러분들이 날마다 주님이 약속하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안내하시고 체험케 하신다는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고, 주님께 심지어 분부하시고, 약속이므로 약속을 붙들고 간구하심으로 이러한 모든 축복을 체험하시기를 바란다.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르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스도는 그분 자체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우리들 가운데서 영광을 나타내신다. 아무리 그분이 고귀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맛보고 체험해서 ‘아, 이런 분이구나, 이런 역사를 하셨구나’라고 느끼지 않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 가운데 영광이 되지 않는다. 성령이 바로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셨다. 하나님은 꽃에 있는 꿀과 같고, 아들은 벌통에 있는 꿀과 같고, 성령은 입 안에 있는 달콤한 꿀과 같다는 것이다. 벌통에 있는 꿀을 그냥 먹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런 꿀을 잘 유리(遊離)해서 달콤한 꿀을 입에 넣어주시는 분과 같은 것이다.
우리 속에 그 꿀이 실제로 달콤하게 느껴져야 ‘이 꿀 맛있네. 진짜 꿀이네’라고 그 꿀에게 영광을 돌릴 것 아닌가? 맛도 안 보고,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영광을 돌리겠는가? 먹어보고 체험하니까 무척 좋은 것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체험하도록 이끄신다. 이는 객관적인 어떤 교리를 이해하도록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관적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진리가 우리 것이 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