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칼럼]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72·결론)
참 하나님(vere deus)이요 참 인간(vere homo)이신 그리스도
머리말
나사렛 예수는 영원 전에 감추인 복음이시다. 한때 복음의 박해자였던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의 마지막 글에서 이 복음의 비밀에 대하여 말한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역사적 예수의 복음이란 하나의 시대적 조류에 따라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종교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영원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 복음은 세상과 우주가 시작되기 이전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속에 있다가 역사의 진행 가운데 역사의 카이로스에 나타난 바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케노시스(kenosis) 사건, 성육신의 사건이었다. 이 복음은 구약 선지자의 글에서 이미 예언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의 모든 민족이 믿어 구원을 얻도록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시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유일한 계시다. 하나님이 역사 중에 나사렛 예수 안에서 자신의 구원의 경륜을 드러내셨다는 것은 신비 중에 신비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다. 이 복음은 신자들을 견고하게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리하여 역사는 파멸과 죽음의 시대에서 벗어나 구원과 생명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의 복음은 역사에 나타난 종교들의 실체요, 모든 종교에 대한 보완이요, 모든 종교에 대한 심판이다.
I. 마리아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 : 참 인간(vere homo)
역사적 예수는 참 인간이었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마리아의 아들로서 태어났고 나사렛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그는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 라고 불린다. 그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는 인간 육신의 연약성을 가지시고 인간과 유대하시고, 미움을 받으시고, 올바른 가르침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 때문에 미움과 배척을 받았다. 그는 나사로의 무덤에서 그 죽음을 민망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1.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나시고 자라심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탄생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역사적 예수는 초라한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나사렛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보통 아이와 같이 성장하셨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눅 2:51).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그는 들의 풀과 꽃들을 사랑하시고 공중의 새와 초목 등 자연을 사랑하셨다. 그는 아비지 요셉으로부터 목수의 일을 배우시고 익히시고 생계를 위하여 목공의 일을 하셨다. 그리고 회당에 자주 가셔서 기도하시고,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 등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읽고 묵상하시면서, 자신의 메시아 사명을 준비하셨다.
2. 광야에서 시험 받으심
예수는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에 광야에 나가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에 동참하시고 인간이 당하는 시험(굶주림, 종교적 명예, 세상적 영화)을 당하셨다. 그는 40일간 금식하시면서 인간의 굶주림을 몸소 체험하셨다. 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기적을 연출하는 종교적 명예의 유혹, 그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영화를 주리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으시고 이겨내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성을 입으신 이유 가운데 하나다. 11세기 영국 캔터버리의 대주교 안셀름(Anselm of Kanterbury)은, 그의 명저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나』(Cur Deus Homo)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인간과 동질적인 육신을 쓰시고 인간이 되셨다고 천명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인간의 대속을 위하여 우리의 연약한 인성에 참여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분이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셔서 우리를 대변하시는 중보자의 일을 하신 것이다.
3. 랍비로 간주됨
나사렛 예수는 그의 공생애 가운데서 제자들과 사람들에 의해 “랍비”(rabbi)라고 칭함을 받았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 1:38). “랍비”란 ‘나의 선생님’ ‘나의 주인님’(요한 9:2)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라보니’(rabboni)라고도 한다(요 20:16). 이 용어는 1세기에 이르러 보편화되었고, 이후 유대교의 지도자라는 뜻으로 정착되었다. 랍비가 될 사람은 구약성서와 탈무드에 대한 연구과정을 거쳐야 한다. 랍비 교육 과정에는 다양하고 총체적인, 지도력 배양을 위한 과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기능은 유대교 내의 다양한 분파들에 따라 서로 다르다. 유대인들 사이에도 정통파·보수파·개혁파가 있어, 분파마다 랍비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따로 있다. 일반적인 기능과 역할은 종교행사와 각종 의식을 주재하며, 각종 교육활동에 폭넓게 참여한다. 또한 지역사회를 위한 구제와 봉사활동에도 관여하며, 여러 형태의 공동체 사업을 지원하기도 한다. 일부 랍비는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가지면서, 시간제 봉사직으로 랍비의 업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공식으로 임명받은 랍비가 없는 경우 공동체 내에 의식을 행할 만한 경건함과 인격을 구비한 사람이 랍비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14세기 이후 랍비들에게 봉급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생활에 구애받을 경우 그 직책 수행에 차질을 빚기 때문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랍비 지도자 제도를 거치지 않았으나 랍비로 불렸다. 그가 랍비로 자칭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랍비라는 경칭(敬稱)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참 교사이시며 그들은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이었다(마 23:7~8).
4. 인간적인 육체의 연약성을 지니심, 인간과 유대
예수는 참다운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므로 여행할 때 피곤을 느끼셨고(요 4:6), 대낮의 무더위와 따가운 햋빛에는 갈증을 느끼셨다(요 4:7; 요 19:28). 배를 타시고는 광풍이 이는 바다 가운데서도 피곤하여 깊은 잠이 들기까지 하셨다. 그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것을 보고 흐느끼는 그의 누이, 마르다·마리아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는 목수 출신으로 그가 진 십자가를 지기가 무거워 연달아 쓰러지셨다. 그는 가시관을 쓰셨고, 이마에 피를 흘리셨고, 두 손과 두 발에 못 박혀 달리신 십자가에서 많은 피를 흘리셨고, 별세하기까지 엄청한 고통과 갈증을 느끼셨고, 체력이 다하여 운명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가현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역사적 증거다. 그가 인간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인간성이요 하나님의 인간 유대성을 증시하는 것이다.
5. 미움을 받으셨다(요 7:44; 10:31; 11:57)
예수는 당시 사랑과 신뢰를 상실하고 단지 종교의 법으로서 무거운 짐으로 부과된 율법의 규례를 비판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새 계명을 가르쳤다. 그러는 가운데 전통적 규례와 유전(遺傳)을 중요시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였다. 모세의 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가르친 예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 형제들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종교지도자들은 그가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는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가르침을 설교하는 예수를 심지어 죽이고자 하였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요 7:25). 그리하여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요 7:44). 성경은 말하기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인간이 세상의 권세를 장악하나, 때와 기한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6. 나사로의 무덤에서 민망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1-33)
예수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 무리인 마리아·마르다의 동생 나사로가 죽어 누이들과 아는 동네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셨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3-35). 하나님은 그 마음이 슬프실 수는 있으나 영(靈)이시므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을 지닌 인간 예수의 육신 안에서 인간의 한계상황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죽음에 동참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7. 다가오는 죽음 앞에 번민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보여주신다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 후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대속의 죽음을 준비하시면서 인성의 차원에서 마음이 민망하셨다. 그의 인성은 죽음을 면(免)하고 싶었다. 그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요 12:27a). 그러나 예수의 신성은 인성을 극복한다. 예수의 신성은 하나님의 본성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이다. 예수의 인성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아버지로부터의 결별, 버림받는 두려움을 경험한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은 인성을 이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신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b).
예수는 별세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요 13:4-5). 하나님은 직접 손으로 인간의 발을 씻으실 수 없으나, 인간 되신 하나님은 그의 제자들의 발을 물로 씻어주신다. 이것은 섬김의 본이다. 목자는 양들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하고, 스승은 제자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사제의 도다.
8. 십자가에서 참혹한 죽음을 죽으셨고 다시 살아 나셨다.
인간 예수는 만능이 아니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못박히심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으셨다. 그리고 많은 피를 흘리셨다. 피 흘림으로 오는 갈증 때문에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말씀하셨다. 그는 신 포도주를 마신 후에 대속의 사명을 다하신 줄을 확인하시고 죽으셨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인간 죄책을 대신 짊어지시고 형벌을 받으신 예수는 그의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을 경험하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예수는 독배를 마시고 조용히 숨을 거둔 소크라데스와는 달리, 참혹하게 운명하셨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죽음이 인간에게는 끝이나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이다. 공자나 붓다나 소크라데스나 마호메트는 죽고 그것으로 끝났다. 이들의 무덤은 오늘날에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무덤은 비었다. 기독교는 이 빈 무덤의 사건에서 출발한다. 그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유령이 아니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이들은 유령을 보는 것처럼 놀라고 무서워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부활하신 예수는 그가 몸을 가지신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숯불에 생선을 구우시고 떡으로 식사를 하셨다. 누가는 기록하였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40-43). 요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요 21:9-13).
이상의 증거로 인하여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가현설(하늘의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와 동일한 사람으로 보였을 뿐이다 라는 주장)은 영지주의적이며, 결코 성경의 증거에 맞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현설은 하늘의 그리스도와 인간 예수를 분리시키고 하늘의 그리스도만을 인정하고 인간 예수를 무시하였다(거쓰리, 230). 아니다. 사도 요한은 가장 명료하게 영지주의 가현설을 적그리스도의 주장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2-3). 이 영지주의 이단의 후예들이 오늘날 나타나 교회와 사회에 미혹을 퍼뜨린 『예수는 신화다』, 『다빈치코드』 등의 저자들이다.
II. 하나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 : 참 하나님
나사렛 예수는 참 하나님이셨다. 그는 하나님을 유일하게 아버지라고 불렀다.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는 세례자 요한, 공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의 증거가 있다.
1. 마태의 증거
예수는 회개하지 않는 도시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하여 책망하시면서, 인간으로는 하나님에게로 올 수 없고 오로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만이 하나님에게로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성자인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로마의 만신전에 있는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여러 신들을 보이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물었다. 이에 베드로는 후에 세워질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신앙고백을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신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가셔서 변형되시어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 주신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 17:1-5). 이 변화산에서 예수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본래의 모습, 삼위일체 2위 되시는 성자(聖子), 곧 그의 신성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역사적 예수의 원천이다.
2. 마가의 증거
마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의 근거에서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예수를 알아보는 자는 유대종교 고위층이 아니라 귀신 들린 자 속에 있는 악령이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3. 누가의 증거
의사요 역사가인 누가도 그의 복음서 서두에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있었던 신비로운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마리아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을 알려주고 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
누가는 예수의 어린 시절에 예수에게 있었던 특별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12살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였을 때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그의 부모가 아들을 잃어 며칠을 찾다가 성전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어린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이 구절에서 예수는 자신을 마리아의 아들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다.
4. 세례자 요한의 증거
세례자 요한은 역사적 예수를 구세주요 대속자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그리고 그는 예수를 영원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요 1:30).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예수가 영원 전에 말씀으로 계셨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영원 전 예수는 창조의 말씀인 로고스로서 삼위일체의 제2위인 성자로서 계셨다는 것이다.
5. 사도 요한의 증거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유대인들과 논쟁하면서 그의 선재성(先在性)을 드러낸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나의 때”(예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였는데 예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
역사적 예수는 제자들과의 대화에서도 이제 그가 작별해야 할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자신이 온 곳 즉,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는 하늘에서 세상으로 왔으니 다시 자기의 본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요 16:28).
요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를 기록함으로써, 로고스였다가 육신을 입고 오신 역사적 예수의 신성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1-5). 역사적 예수는 여기서는 성자의 신분(身分)으로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다. 성부께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실 때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때란 ‘인류 구속의 시간’을 말한다. 이 구속을 통하여 성자는 속죄의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시며, 이 시간을 통하여 성부께서도 사랑과 구속의 하나님으로 영광을 받으신다. 성부는 성자에게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을 다스리고 영생을 주는 권세를 부여하셨다.
6. 사도행전의 증거
오순절 설교에서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가 행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증언하였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행 2:22). 베드로는 구약의 다윗이 그리스도가 오실 것과 그가 죽음에서 부활할 것을 예언하였다(행 2:30-31)고 해석한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누가는 병 고치는 기적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졌다”(행 3:6)고 증언하고 있다. 누가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복음의 핍박자에서 복음의 증언자로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