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감정…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한에는 수십만의 크리스천이 존재했지만, 남북이 갈라지면서 북한에서는 지금 비밀결사처럼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 영화 <신이 보낸 사람>은 자신들만의 지하교회에서 믿음을 키워 나가는 북녘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기회가 되어 세 번을 보게 됐다. 볼 때마다 북한인권과 신앙의 자유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 제목이 <신이 보낸 사람>이라 해서, 굳이 기독교적 신앙과 이해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비(非)기독교인이라 해도 무조건 영화에 대해 반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 영화는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자유인 ‘종교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는 상황을 고발한 영화로, 그 상황은 기독교인 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 대부분에 해당하는 묘사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철호(김인권)’는 기독교 신앙을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가 아내를 잃게 된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겠다는 고백을 하고 풀려났지만, 아내는 모진 고문에서도 자신이 믿는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흔히 말하는 ‘순교자’의 대열에 선다. 사건을 겪은 후, 철호는 자신이 속한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을 모두 이끌고 탈북해 남한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찬찬히 실행시켜 나간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북한 지하교회의 현실과 북한의 인권 상황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악하게 만든다. 영화는 북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북한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때문에 그곳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은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단지 북한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겪는 모진 핍박은, 진한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낸다.
<신이 보낸 사람>은 첫 장면부터 고문 장면이 나온다. ‘과연 저런 고문을 참아가면서 신앙을 지킬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배교자도 많이 나온다. 그만큼 신앙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저런 고문을 끝까지 견디다 못해 죽어야 한다면,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죽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주인공도 “하나님은 우릴 버렸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남은 한 아이를 통하여 신앙은 계승되고 다시 희망은 피어 오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실제 북한의 고문 장면과 처형 모습, 그리고 잘 알려진 북한 어느 할머니의 숨죽인 기도가 등장했다. 그들에게는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켜야 할 신앙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흔하고 값싸고 초라해진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 속에 너무 편해서 나태해지고 있는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도전과 자극을 주고 잠 못 이루게 한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 놓인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추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불과 몇십,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러한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참담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보낸 사람>에는 “이념 문제가 아니라 먹고 사는 문제”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영화는 종교 영화도, 이념 영화도 아니다. ‘인권’이라는 단어조차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든 곳에서,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가, 그 신앙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이기적이게 변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과,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북한 주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무섭고 고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보고 느끼게 한다.
<신이 보낸 사람>에서 “남조선이 가나안 땅이냐”고 질문한다. 현실 고발을 넘어, 한국 사회에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주인공 철호가 한 북한 주민으로부터 들었던 한국 사회가 정말 가나안을 추구하는 건강한 사회인지, 그리고 한국교회가 과연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다. 영화는 이 질문 하나로, 남한의 교회들이 가까운 땅에서 신앙적 순수함을 지키며 ‘목숨 걸고’ 예수를 믿는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려 노력할 것을 주문한다.
북한 주민들의 디테일한 생활상과 북한 내에서 자행되는 인권 유린에 대한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풀어내고 있는 꽤 괜찮은 영화임에도, 영화 자체를 놓고 평가할 때는 커다란 기교도 없고, 세련된 전개도 없다. 하지만 ‘북한인권’과 ‘신앙의 자유’를 다룬 것은 분명히 의미있고 가치있는 시도라 평가할 만하다.
사실 <신이 보낸 사람>은 관객을 끌 만한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 무거운 주제의식과 해피엔딩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암울한 현실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을 옥죄어 온다. 돈을 내고 굳이 이런 불편함을 감내하라고 할 이유도 없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건 ‘우리와 상관없는 일 아닌가’ 하고 외면할 수도 있다.
<신이 보낸 사람>은 영화가 가진 문제의식을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무서울 정도의 뚝심이다. 쉬운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관객을 울리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소재인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게,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게, 심지어 우리와 같은 말을 쓰고 있다는 게 말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희망이 없는 북한 주민들의 현실을 눈물로 가려 버리지 않는다. 빨리 흐르고 쉽게 마르는 눈물 대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감정을 관객에게 오래도록 심어주고자 했다. 그 방법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시사회가 끝난 후,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절망을 정면으로 목도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보낸 사람>이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 영화가 개봉 첫 주에 20만 관객을 돌파하며 극장이 ‘신이 보낸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영화를 본, 또는 볼 관람객들이 불편하기 시작했다면 그 때부터가 성공이다. 그래서 돌풍이 불고 있는 것 아닐까.
/이효상 목사(미래목회포럼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