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명혁 목사(본지 편집고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님께서 2월 23일 글로벌 대한교회에서 전한 메시지입니다. 본지는 김명혁 목사님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창 12:3, 사 19:24, 25)
제가 매년 글로벌 대한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오늘 2014년 2월 23일 주일, 여기 다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고재덕 목사님과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고재덕 목사님에게 오늘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다문화 가정을 돌아보면서 선교하는 것에 대해서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성경에 나타난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성경에 나타난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비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은 본래부터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이었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 19:24, 25).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 10).
성경은 본래부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경계하며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 11).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이방으로 가기를 싫어하던 민족주의자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서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10:15). 결국 베드로는 할 수 없이 가이사랴에 가서 로마 백부장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목격하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인종 차별을 하지 않으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 35).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엡 3:28).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비전입니다. 성경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한국교회에 나타난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비전을 살펴보겠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교회가 조국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그 시각이 민족주의자들의 시각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마산 문창교회에서는 이단 사상에서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했고, 평양 산정현교회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에서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산정현교회에서 설교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은 교회당에서 나가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세 가지 형태의 신앙이 있습니다. 첫째는 민족운동 정치운동 하기 위해서 교회에 들어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고, 둘째는 인격을 높이며 도덕생활을 하기 위하여 믿는 사람이 있고, 셋째는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믿고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온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 산정현교회는 첫번째와 두번째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김인수, “소양 주기철 목사의 신학사상”, 소양 주기철 목사 기념 논문, p.74).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도 3.1 운동의 주역이었던 이승훈 장로님도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과 이승훈 장로님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누가 이승훈 선생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가리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나 역시 한때는 우리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땅에 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류는 결국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본을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절대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만인의 존경을 받던 한경직 목사님도 평생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편협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지니지는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57년 3월 3일에 행한 ‘성서적 애국심’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예수님도 애국자이십니다”라고 말하여 나라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성서적 애국심이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서적 애국심은 혹 우리 사회에서 가끔 듣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는 절대로 아닙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애국심은 민족을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국가가 귀하지만 국가를 우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민족과 국가가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상입니다. 애국심이 잘못되어서 변태적으로 발전되게 되면 독재주의가 생기는 것이고 배타주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1958년 4월 27일에 행한 ‘우주시대와 신앙생활’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우주시대의 신앙생활은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한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우주시대의 종교는 먼저 민족이나 국경을 초월한 세계적인 종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종교는 전 인류를 포섭할 수 있는 사랑의 종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종교이어야 될 것입니다. 셋째는 이와 같은 종교는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속죄, 구령의 종교이어야 될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또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만민의 아버지시요, 사해는 다 동포이며 형제입니다. 연대성이라고 하는 말은 서로 연한 것 같이 우리 사람은 각자 나뉘어 있지 않고 다 서로 연결되어 헤어질 래야 헤어질 수 없는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다 한 배에 타고 항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배 가운데에 어떤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함으로써 잘못 파괴된다면 그 배에 탔던 선객 전원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인간 생활의 연대성을 생각할 때 내 생활을 얼마나 조심하여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신앙을 자기 개인의 울타리 안에 가두거나 목회를 개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지 않고, 이웃과 사회와 민족과 세계의 울타리로 뻗어나가게 했습니다. 그는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폭넓은 연계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셋째로, 저 자신의 생각과 자세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본래 이기적인 사람이었고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비판적인 사람이었고 배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일본도 북한도 중국도 무슬림도 모두 싫어하던, 배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도 비판했고 조용기 목사님도 비판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교회 지도자들을 인정하고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동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하게 되었고, 중국 사람들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 대해서도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과 조용기 목사님을 존경하며 사랑하게도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래적인 저의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어주신 후천적인 마음입니다. 저는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에 가서 가뭄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우물 열 다섯 개를 파 주었고, 방글라데시에 가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 진료소를 지어주었습니다. 저는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어린이들 170여명을 14년 이상 돕는 일을 계속하고, 2005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한국교회가 지어준 학교 준공식에 참여한 일도 있었습니다. 저는 2010년 8월 17일 종교인들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대형트럭 13대에 싣고 개성으로 가서 북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연변 지역의 어린이들이 예쁘고 귀엽게 보였고, 방글라데시의 어린이들이 예쁘고 귀엽게 보였고,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이 예쁘고 귀엽게 보였고, 북한 어린이들이 예쁘고 귀엽게 보였습니다. 저는 1992년 4월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을 때 흑인 학생 대표들 10명을 한국에 초청한 일이 있었습니다. 흑인 청소년 10명이 1992년 10월 23일부터 11월 3일까지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들이 한국교회와 한국의 교육, 문화, 산업 시설 등을 방문하면서 많은 도전과 격려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와 사회에 대한 대단히 긍정적인 홍보를 했고, 한 흑 화해와 협력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국내에 살고 있는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 형제 자매들을 품으며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펴고 있는 김해성 목사님과 이선희 목사님의 사역을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국내에 살고 있는 소외계층의 이웃들을 품으며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펴고 있는 최일도 목사님과 임명희 목사님과 김범곤 목사님의 사역을 매우 귀하게 생각하며, 필리핀 앙헬레스 산지에 버려진 십오만여명의 아이타 원주민들을 찾아가서 저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펴고 있는 양남일 선교사를 비롯한 그 지역 한인 선교사들의 사역을 매우 귀하게 생각하며, 이들 사랑의 봉사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김범곤 목사님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찾아 파키스탄으로 미얀마로 필리핀으로 달려가서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고 있습니다.
넷째로, 지금 한국교회가 힘써서 할 일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의식적으로 힘써서 하여야 할 일은 유교적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의 지역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사고와 관점을 성경적 가르침과 비전에 따른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적 사고와 관점으로 바꾸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점점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통로로, 즉 새로운 선교의 도구로 쓰시려는 계획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에 다가가고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리를 유창하게 설파하는 설교나 강의보다는 저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품으려는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존경과 사랑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쳐야 할 것입니다. 작은 예수로 살다가 죽은 장기려 박사님이 한 말을 귀 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이데올로기도 한낱 쓰레기일 뿐이다.”
오늘날의 선교야말로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 강의보다는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를 따뜻하게 품고 사랑하고 섬기려는 온유 겸손의 낮은 자세로 수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현지인들을 접촉할 때, 저들의 마음과 자세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아프리카에서도 방글라데시에서도 중국 연변 지역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북한에서도 생생하게 발견하며 체험했습니다. 선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선교적 삶과 행적의 모습을 본받아 지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선교적 삶과 행적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곤 합니다. 첫째는 ‘버리고’ ‘떠나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넷째는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함께 살면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함께 살면서 ‘함께 놀아주는’ 것입니다. 일곱째는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긍휼과 사랑에 바탕을 둔 선교적 삶과 죽음은 사도 바울을 탄생시켰고 안디옥과 마게도냐와 로마의 선교를 이루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긍휼과 사랑에 바탕을 선교적 삶과 죽음은 조선의 구원과 복음화를 이루었습니다.
유교적 전통의 영향을 받아 이기주의와 지역주의와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이 다인종 다민족 다문화주의를 품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신경림 시인이 지은 “달라서 좋은 내 짝꿍”이란 제목의 소박하고 따뜻한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내 짝꿍은 나와 피부 색깔이 다르다 나는 그의 커다란 눈이 좋다 내 짝꿍 엄마는 우리 엄마와 말소리가 다르다 나는 그 애 엄마의 서투른 우리 말이 좋다 내 외가는 서울이지만 내 짝꿍 외가는 먼 베트남이다 마당에서 남십자성이 보인다는 나는 그 애 외가가 부럽다 고기를 잘 잡는다는 그 애 외삼촌이 부럽고 놓아 기른다는 물소가 부럽다”
제가 작년 11월 “Black Gospel”이란 제목의 영화를 보고 관람 소감을 쓴 일이 있는데 그 소감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어제 저녁에 “Black Gospel”이란 다큐 영화를 관람했다. 나는 “Black Gospel”이란 다큐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감동을 받으면서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종류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면서 받아들이는 데 인색한데, 이 영화는 그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간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붙잡혀 노예선을 타고 미국이란 대륙으로 끌려와서 평생 노예 생활을 하던 흑인들이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 중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어 신앙생활을 하면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미국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찬양하는 흑인들의 찬양은 머리로 목소리로 하는 찬양이 아니었다. 온 몸으로 가슴과 영혼을 쏟아 바치면서 부르는 “영혼(soul)”의 노래였다. 그래서 저들의 찬양을 “흑인 영가” 즉 “Negro Spiritual”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젊은 배우들과 가수들 10여명이, 흑인들이 부르는 “Negro Spiritual” 즉 “Black Gospel”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서, 흑인들이 생활하고 있는 뉴욕의 할렘가를 찾아가서 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려고 한 자세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Black Gospel”을 부르면서 가르치는 “Black Gospel” 지도자들이, 한국의 젊은이들이 배워서 부르는 “Black Gospel”을 듣고서 그것은 좋은 노래이기는 하지만 “Black Gospel”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온 몸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Black Gospel”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결국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은 흑인들의 고난의 역사와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려고,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잡혀와서 미국에 상륙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까지 14시간 동안 운전하며 달려가서 저들의 고난의 흔적을 살피기까지 했다. 결국 한국의 젊은이들은 뉴욕의 흑인들과 친밀하게 함께 어울리게 되었고, “흑인 영가”를 온 몸과 영혼을 쏟으면서 함께 부르게 되었다. 한인들과 흑인들이 온 몸과 영혼을 쏟으면서 부르는 “Amazing Grace”는 매우매우 감동적이었다.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온 몸으로 “Amazing Grace”를 불렀다. 나중에는 흑인들이 한국의 고난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우리들의 고난의 역사와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아리랑”을 온 몸으로 함께 부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아름다운 감동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들이 나와 다른 종류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면서 받아들이는 데 좀 더 너그러워진다면, 이와 같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날 것이다. “Black Gospel”은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였다. 한 가지 첨부할 말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모두 흑인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온 몸을 흔들면서 찬양을 하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자기 문화와 정서에 맞게 불러야 할 것이다. 나는 흑인들이 사는 남아공에 가서 “소리를 지르고 온 몸을 흔들면서 찬양을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을 때, 현지인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본 일도 있다. 요사이 교회에서 찬송을 북을 치면서 몸을 흔들면서 너무 시끄럽게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유행을 따르는, 그래서 순수한 영성을 해치는 잘못된 경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Black Gospel”을 관람하고 나와 다른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너그럽게 되기를 바란다. (2013.11.15).』
그리고 제가 2007년 1월 3일 차를 타고 교회로 가면서 쓴 글을 읽어드림으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무척이나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무척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무슬림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무슬림이나 공산주의라는 불행한 유산에 싸여 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사람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이방으로 이방으로 달려 가면서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가슴과 몸에 지니고 우리 주변과 세상 곳곳에 흩어져서 사는 다민족 다인종 다문화 인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화해의 손길을 펴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심부름꾼들로 사용하시는 귀하고 아름다운 십자가 복음의 사역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