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51] 18장 1-14절
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울면서 이 시내를 건넜다(삼하 15:23-30). 다윗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이 강을 건넜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강을 건넌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수난의 첫 걸음으로 이 시내를 건넌 것이다. 그분은 수난을 맞이하면서 세상에서 물러나는 본을 보여주셨다. 우리 또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를 수 있도록…. 세상의 도성이 비록 거룩하다 해도 그곳의 많은 무리들과 세력, 거짓된 사랑과 염려, 피상적인 위로 등을 뒤로하고, 우리는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분은 동산으로 들어가셨다. 그분의 고난이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것은 요한의 복음에서 강조된 바이다. 겟세마네란 기름을 짜는 곳이라는 뜻이다(막 14:32). 요한은 겟세마네를 동산(garden)으로 표현했다. 죄가 시작한 곳이 동산이었듯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과 일전을 벌려 첫 사람이 아담이 가져온 죄를 끝내시려 동산으로 가신 것이다.
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이 말씀은 왜 기록했을까? 동산으로 나오시기 전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거기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14-16장에서 매우 중요한 마지막 강론도 하셨다. 그리고 17장에서 그 위대한 기도를 드리신 후 동산으로 가셨는데, 그곳이 겟세마네이다. 거기서 아버지께 세 번 간구를 드리셨는데, 그 내용이 요한복음에는 없지만 다른 복음서에 기록돼 있다. 그런데 그 장소를 유다도 알았다. 예수님은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고 넘겨주려 나간 것을 알고 계셨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13:27)”. 그러므로 주님은 유다가 무슨 생각을 했고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다 아셨음에도, 유다가 알고 있는 그 장소로 가셨다.
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자발적으로 잡히신 주님
그리스도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자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가장 강력한 대적은 바리새인들이었다. 그 하속들은 연대 병력의 로마 군대였다고 한다. 학자들은 5백명이라고도 하고 1천명이라고도 한다. 성도들은 결코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하지 말아야 한다(시 1:1).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주님은 물으셨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미리 다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 잡혀 죽은 것이 아니다. 주님께는 자신을 내어주지 않을 권세도 있지만, 그분은 죄인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분이시기에 지금 자신을 내어주고 계신다.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내로라”. 이는 ‘나를 잡아가라’ 하시는 것과 같다. 그리고 안타까운 말이 나온다.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다른 복음서에서는 유다가 와서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도다”. 주님이 이렇게 평안한 모습으로 ‘내로라’ 할 때, 그 잡으러 왔던 사람들은 땅에 엎드러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힘 없이 처량한 모습으로 붙잡힌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진정 하늘에서 오신 분이고 위엄이 있으신 분이다. 주님이 매우 태연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에, 잡으러 왔던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졌다. 사실 예수를 잡으러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교리도 맞지 않고 대적 관계이다. 그런데 예수를 잡을 때는 하나가 됐다.
유다는 예수님이 14-16장에서 가르치신 말씀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최후의 만찬 도중에 나갔다. 그리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거래를 했던 것이다. 은 30냥을 받은 후 작전이 시작되었다. 로마 군단에 가서 병력도 지원받고 대제사장과 성전을 지키는 하속들을 다 모아서 병기까지 갖추었다.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잡으러 왔다고 했다. 그들은 이번에는 차질 없이 반드시 잡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그 나사렛 예수가 나다’ 말씀하셨고, 잡으러 온 사람들은 엎드러졌다. 그리고 주님은 누구를 찾느냐고 다시 물으셨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했다.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이 사람들’이란 제자들이다. 만일 주님이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이 제자들 몇 명도 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 사람들은 보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사랑, 보살핌, 배려, 동정이 충만하신 분이다. 오늘날 주님께 헌신하고 자신을 드리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님을 따르다 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망설이는 것이다. 이들은 주님을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면, 주님께서는 세심하신 인정과 사랑으로 자신의 사람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는 또한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다 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베드로라는 제자가 사고를 일으키는 모습이 10절에 나온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다른 복음서에 보면 베드로가 다른 한 사람을 쳤고 칼을 한 번 휘둘렀다. 베드로는 이런 일이 주님께 도움이 된다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베드로는 열정과 혈기가 있었지만, 주님이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 왜 한 발자국씩 나가시는지 전혀 인식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겨우 한 일이란 흥분한 상태에서의 커다란 실수였다. 어디를 치려고 칼을 휘둘렀는지 모르지만, 대제사장 종의 오른쪽 귀가 떨어져 나갔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주님이 친히 그 귀를 주워다 낫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의 무지 때문에 얼마나 불필요한 일이 생겨나는가? 원수 맺고 시기하고 분쟁하고 분을 낸다. 베드로는 분을 낸 것이다. 이런 것은 다 육체의 일이며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성도들은 절대 무지한 열정으로 분을 내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온유함으로 행해야 한다. 화를 내면서 주님을 위해 그렇게 한다고 말하지 말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4-5)”. 어떤 경우든 성질을 내는 것은 좋지 않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약 1:19)”.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내는 것을 좋게 기록하지 않았다. 주님을 믿으면서 혈기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건강에도 좋다. 혈기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전혀 유용하지 않다. 주님만 불편하게 하고 주님의 일만 더디게 하고 방해하며 어렵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신다. 그분이 이 잔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구원과 축복과 위로의 잔을 주시기 위해 받으신 것이다.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늘 이를 기억해야 한다. 그 분이 저주의 잔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과 축복의 잔을 주신 것이다.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이제 그들은 예수를 결박했다. 하늘로부터 오셔서 죄를 모르는 분이신 주님, 이 땅에 오셔서 한 사람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으신 그리스도를 왜 사람들은 악하게 대하고 잡아 죽이려 하는가? 주님은 그럴 만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시고, 오히려 선한 일만 하신 분이다. 병자를 고치시고 어려운 사람을 동정하셨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은 주님을 죽이려 결박하는가? 주님은 우리의 구속주로 오셔서 우리 대신 그분이 결박을 당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쌌나이다(시 22:12)”의 말씀이 응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중 그분이 결박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은 요한 사도 뿐이다. 그들은 죄목도 정하지 않고 심판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날로 말하면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었다.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이하 구절들에서 요한은 당시 대제사장에게 심문당하시는 그리스도와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사실들을 수록하고 있다.
대신 결박 당하심
주님은 이렇게 붙잡히시고 포승줄로 결박 당하신 후 먼저 그 해의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셨다. 누가복음 22장 52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포승으로 주님을 묶었지만, 사실상 진짜 주님을 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밧줄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의 사랑이었다. 그분은 그 사랑의 줄로 묶이셨던 것이다. 이 어떤 사랑인가! 그분은 우리의 대속물이고 대치물이시다. 우리가 묶일 것을 대신해 그분이 묶이셨다.
주님은 우리가 죄의 사슬에 묶여 있다는 것을 다 아셨다. 쓸데없는 이론과 사상에 묶여 있음을 아셨다. 여러분은 무엇인가에 묶이고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아는가? 아마 자신이 묶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이 세상의 무익한 관념과 사상들에 사로잡혀 있다. 종교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 주님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왜 결박당했는가? 여러분이 사로잡힌 그 사상, 사단의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여러분을 풀어주시기 위함이다. 여러분을 꽁꽁 묶은 사슬을 풀어주시기 위해 대신 결박당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여러분들은 자유를 느끼게 된다. ‘옛날에는 이렇게 자유롭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자유로워졌을까?’라고 고백하게 된다. 주님이 자유롭게 하셨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다. 우리는 사단에 매여 죄와 사상과 지식과 관념으로 자유롭지 못하게 태어났다. 주님이 우리의 대속자로 우리를 대신해 묶이신 것은 죄에 매인 우리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해방된 사람들이다. 해방과 자유를 못 누리는 사람들은 아직 주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런 찬송이 있다.
예수 결박 푸셨도다 모든 결박 푸셨도다 나의 결박 푸셨도다
나는 자유해 소리높여 할렐루야 소리 높여 할렐루야 나는 자유해
그분은 이렇게 결박당하시고 묶이심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