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52] 18장 15-27절 강해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주님께서 안나스에게 심문을 당하셨다. 그 장면은 19절부터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다른 제자,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란 요한복음 저자인 사도 요한일 가능성이 있다(그로솨이데). 주님은 잡히셔서 심문을 받으려 대제사장의 뜰 안으로 깊이 들어가시는데, 문 앞에서 얼쩡거리던 베드로는 문 지키는 여종에게 몇 마디를 들을 때 심하게 위축되었다. 칼을 휘두를 때는 무척이나 용감했던 베드로가 얼마의 시간도 지나지 않은 이 순간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작은 하녀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대제사장 안나스가 예수에게 물었다. 요한은 어떻게 이런 상황을 자세히 알고 기록할 수 있었는가? 15절에 나와 있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요한은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인지라 그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하는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안나스는 예수께 무엇을 물어보았는가? ‘당신을 따르는 자가 누구인가?’ 즉 제자들에 대한 것을 물었다. 또한 ‘무엇을 가르쳤는가?’라고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 물었다.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드러내서 전파하신 주님
주님은 은밀히 하지 않으셨다. 드러내 말씀하셨다. 은밀한 종교 지도자를 따라다니지 말라. 대다수의 이단자들은 신비롭고 은밀한 사람들이다. 주님은 드러내 세상에 말씀하셨다. 드러나게 말하는 사람이 안전한 사람이다. 자기만 옳다면서도 가만히 숨어서 말한다면 그것은 속임수이다. 주님은 대제사장이 무슨 질문을 하는지 그 진의를 간파하셨다. 그가 제자들에 대해 물었고 가르침에 대해 물었는데 왜 주님의 대답은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다’는 것이었을까? 동문서답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 대제사장은 ‘뒤로 살살 다니면서 한 무리를 꾀고 있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너희들만 내 말을 잘 듣고 배워라’ 하면서 자기들의 일을 은밀하게 만든다. 그럴 때 사람들이 욕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셨다.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하셨다.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말을 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한 일이 아니라 드러내 놓고 한 일’이라고 했다. 다 알리지 않기 원하는 사람은 주님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서 드러 내놓고 가르치셨다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공개적인 성품이 안전하며 주님의 성품과도 맞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한다고 했다. 교회는 산 위의 동네 같은 존재이기에, 우리는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방식으로 사역을 해야지, 은밀하게 해서는 안 된다.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많은 사람이 들었으니 들은 자에게 물어 보라는 것이다. 그들이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많은 말을 공개적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이렇게 공개적인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란다.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당시 보통 사람들은 대제사장 앞에서 감히 말도 못했을 것이다. 이 하속은 대제사장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신 거룩한 아들의 얼굴을 쳤다. 그분은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들에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오늘날 소위 십자가를 안다는 사람,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럴 때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왜 말을 하느냐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말씀을 하신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진리라면 말해야 한다. 참된 것은 말해야 한다. 진리는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응당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할 때 진리를 선포하지 않으면 비진리와 어두움이 들어온다. 그리고 비진리를 말하는 자 역시 자신이 말하는 것이 옳은 줄 착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아내가 예수를 믿게 되어 교회생활을 하면서 정말 성실해지고 남편도 잘 섬기는데, 남편이 믿지 않는 사람이라 아내를 계속 핍박한다고 하자. 그럴 때 계속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현명한 아내라면 좋은 시간을 잡아 남편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합당하게 말할 것이다. ‘여보, 생각해 보세요. 내가 과거에 동창들과 놀러 다닌다고 술 먹고 돌아다닐 때가 좋아요? 아니면 지금처럼 교회 가는 시간 외에는 당신에게 잘하고 애들한테 잘하는 성실한 주부로 사는 것이 좋아요? 다시 과거로 돌아갈까요?’ 사람들이란 말을 전혀 하지 않으면 잘 모른다. 참된 것은 말해야 한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기독교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지금처럼 병원이나 학교가 생겨났겠는가? 우리가 개화되는데 기독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의사 한 분이 교회에 오셔서 개화기 기독교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연세대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고종 때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부터이다. 당시 선교사들이 다 죽게 된 사람을 살려 놓음으로써 광혜원이 생기고 세브란스가 생겼던 것이다. 기독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알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33명도 거의 다 기독교인이다. 이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무슨 일만 생기면 예수 믿는 사람이 더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사람들과 따지고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온유하면서도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셨다.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안나스는 예수를 가야바에게 보냈다. 안나스라는 대제사장은 가야바의 장인이다. 요한복음에는 안나스의 집에서 대화한 것을 기록해 놓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에게 데리고 들어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한 그대로 가야바 제사장에게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요한복음은 가야바와의 대화는 기록하지 않았다. 사형 확정 판결은 가야바 제사장의 뜰 안에서 있었다.
그들이 주님을 판결한 죄목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여러 거짓 증거를 찾았다.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다는 말은 증거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메시아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내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을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올 그 자다’라 대답하셨고, 이에 대제사장 가야바가 옷을 찢으며 오늘 참람한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 자는 사형 판결이 합당하지 않느냐고 해 다 찬성하고 죽이기로 확정한 것이 가야바의 법정이었다.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
이미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이제 두 번을 더 부인함으로 세 번을 채웠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었다. 여러분은 베드로와 유다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유다는 예수님을 한 번 배반했다. 그렇다면 그 죄질과 사악함, 잘못에 있어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에는 베드로의 부인 장면이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간단히 다루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란 어쨌든 사람이고 관계성도 있는 것이다.
유다는 배신했고, 베드로는 약해서 넘어졌다. 배신이란 자신을 위해 남을 해하고 팔고 욕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렇지 않았다. 베드로가 한 일도 물론 잘못된 일이지만, 육신이 연약함으로 스스로 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용서받기 쉽다. 연약하기에 두렵고 겁이 나 넘어졌던 것이다. 자기의 갈 길을 위해 남을 해치는 배신과는 다르다. 배신은 자기의 성공과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밟고 해하는 것으로, 정말 좋지 않은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 평생 이런 유다의 길을 걸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유다보다 더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 일생 주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또 부인하지도 않고 충성스럽게 섬기는 귀한 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마지막 한 주간
요한복음은 12장에서 21장까지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주님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마지막 한 주간을 위해 할애하고 있다. 11장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나사로의 가정으로서는 커다란 축복이지만 그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하나의 사건이 되었고, 12장에서 베다니의 마리아에게서 향유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것도 사실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다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만 4일 동안 여러 사람들로부터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여러 시험과 공격을 당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기의 유월절 행사로, 어린 양이 흠이 없는지 점검하는 것에 그대로 적용된다. 만 4일이면 앞뒤로 6일이다. 즉 유월절 엿새 전에 어린 양을 하나 끌고 와서 흠이 있나 없나 점검한 후, 유월절 날 잡았던 것이다. 우리 주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그런 점검을 다 마치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마지막 자리를 함께한 것이 13장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유다가 사단에게 붙잡혀 예수를 팔 마음을 갖게 된 시점이 바로 13장이다. 또한 떡과 잔으로 만찬을 설립하시고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고 잔을 마시게 하시고 축복하셨다. 14장부터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강론하신 내용이다. 떠나시기 전에 위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15-16장에서 말씀을 하시고 17장에서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셨다. 하나님 백성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리고 18장에서 겟세마네로 가서 기도하셨다. 제자들과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큼의 거리에서 주님 홀로 씨름하듯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셨다. 그곳에서 잠든 제자들을 깨워 데리고 나오시던 그때, 배반자 유다가 데려온 자들에 의해서 주님은 체포되고 결박당하셨다.
성경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죽으러 이 땅에 오셨다. 사복음서는 그 마지막 고난과 죽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요한복음은 주님이 고난받고 돌아가신 마지막 한 주간에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읽을 때마다 주를 사랑하는 자들의 마음이 아픈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