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 요한복음 강해 59] 요한복음 20장 19-31절 강해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살펴보자. 첫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나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말씀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 그 시체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안장했고, 빌라도와 군병들은 혹시 시체를 훔쳐갈까 봐 돌을 막아놓고 인봉하고 파수꾼을 세워놓았다. 그것이 금요일 저녁이다. 토요일을 지나 주일 새벽 이른 아침, 마리아가 무덤에 갔는데 돌이 굴려져 있고 시체가 없어진 사건이 일어났다. 베드로와 요한도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했다. 그리고 동산에서 울고 서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대화를 나누셨다. 이 모두가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20장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분명히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은 주일 새벽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저녁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을까 봐 두려워서 문을 잠근 채 한 곳에 모여 서로 위로하고 있었는데,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들어오셨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들은 이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 의심 많은 도마를 빼고 열 명의 제자가 다 모여 있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열 명이 둘러 앉아 주님을 보았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분인데, 그 주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0장에는 주님이 나타나신 시점이 세 번이다. 첫 번째는 안식 후 첫날 새벽 마리아가 동산에서 만난 장면이고, 두 번째는 저녁에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을 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며 말씀하신 것이고, 세 번째는 8일 후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였다. 그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고 문들도 닫혔는데 주님이 오사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예수의 부활을 한두 사람만 언뜻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 차례에 걸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타나셨고, 인수로 보아도 많은 사람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 고린도전서 15장 6절에는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는 AD 56년경으로 주님이 돌아가신 후 20여년 지난 때였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 글을 쓰면서 ‘지금도 예수의 부활을 본 증인들이 대부분 살아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 얼마든지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당시에 수없이 많은 증인들이 증거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지 한두 사람이 헛것을 보고 퍼뜨린 이야기라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들이 기록한 성경을 볼 때 매우 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쓴 글은 지금도 신학자들이 다 연구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꾸며낸 이야기나 허위 사실을 맹목적으로 믿을 만한 순진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도 구별하지 못하고 헛것을 보고 헛되이 믿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도 하고 의심도 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중에 그들이 가진 부활의 믿음 때문에 혹독한 고난도 당했고, 죽음의 문턱까지 가야만 했다.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붙잡아 놓고 다음날 죽이려 했던 상황을 생각해보라.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그가 만일 보고 들었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쓸데없는 죽음의 고난을 당했겠는가? 사람들한테 그렇게 매맞음을 당했겠는가? 거짓을 위해 순교당했겠는가?
부활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증거가 매우 많았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셨고, 심지어 도마처럼 의심 많은 사람에게는 직접 만져 보라고 하셨다. 그때 도마는 의심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가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때서야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었고, ‘당신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주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부활은 사실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나도 그때 거기에 살았었더라면 더 잘 믿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지만 직접 보았던 제자들이 증거한 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것이 여러분이 듣고 있는 복음이다. 직접 보지 않았더라도 증인들이 증거할 때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들보다 더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요즘은 무엇이든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가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단도 수없이 많다. 물론 안 믿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안 믿으면 큰일나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뭐든 의심하고 안 믿으면 영리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복음을 믿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 수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증거했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불가지론자이고 저널리스트였던 프랭크 보리스라는 사람은 예수의 부활을 부정하려는 책을 쓰려 했던 사람이다. 예수의 부활은 너무 모호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많은 조사를 했는데, 결국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활 후 달라지신 주님
예수님은 부활 후 그 모습이 변하셨다. 무언가 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는 말이다. 19절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가 놓았는데 예수님이 들어오셨다. 26절에서도 문이 닫혔는데 예수님이 들어오셨다. 이를 기록한 의도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방에 들어오려면 문을 열고 들어오셔야 했는데, 부활 후에는 문을 열지 않고도 들어오실 수 있게 된 것을 말하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우리의 제한된 생각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기묘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사람들은 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요 20:4). 제자들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요 21:4). 주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즉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그런데 부활 후에는 누가복음 24장에서 보듯 그분을 잘 아는 사람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옛날에 알던 방식으로 알아서는 안 되는 부분이 생긴 것이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자 주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중에 도마에게는 만져 보라고 하셨다. 그러면 마리아에게는 왜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마리아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역을 바꾸셨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물질적인 곳에서 영적 세계의 영역으로 바뀐 것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예전 방식 그대로, 육체대로 주님을 대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할 수 있다.
부활의 삶
부활이란 오늘도 체험할 수 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안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육체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교회 생활이 맞지 않다. 부활이란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자기를 죽은 자로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이다(갈 2:20).
그러나 여전히 자기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부활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가진 천연적 총명을 더 내세우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성도들의 상황도 참되게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죽은 자로 두어야 한다. 어두운 밤이 지난 후, 아침에 꽃이 피고 싹이 났다. 우리의 영적 체험이 바로 이렇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미련하게 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만의 것이 아니다. 믿는 우리도 부활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셨다. 교회란 부활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 주님만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함께 죽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분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부활한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생각해 보라. 머리는 부활해서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 있는데 몸은 부활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라면 머리와 몸의 본질이 맞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항상 우리 곁에 계셨으면 좋겠는데 어떤 때는 나타나셨다가 어떤 때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우리를 혼동시키시는 것 같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육체적 방식으로는 아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영적인 인식이 깨어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이렇게 변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부활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을 접촉할 수 있어야 하고 성도들도 그렇게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 내야 그것을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성도들은 부활의 영역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사람과의 대화, 문화의 교류가 있을 때에야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해줄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는 사역자나 전도자에게 사면권이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는 자의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먼저 주님이 내어쉬신 성령의 호흡을 받은 자들은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받을 때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는다.
24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에게 나타나심
주님은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마가 빠졌다. 도마는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관계로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는 순간을 놓쳐버렸다. 결과적으로 한 주간 동안 다른 제자들은 ‘예수는 부활하셨다’면서 기쁨으로 충만했지만, 도마는 그 복을 누리지 못했다. 제자들이 도마에게도 주님이 살아나셨음을 말했을 것이고 자세히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믿지 않았다. 그 일주일 동안 나머지 제자들이 기쁨으로 지내는 동안에 한 사람 도마만은 갈등과 의심 속에 죽어 지냈을 것이다.
모임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다. 그것은 모임의 중요성이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은 함께 모였고 주님은 그 모임에 찾아오셨다. 모임에 나온 사람들이 그때 만난 주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참 좋다, 은혜 받았다’고 할 때에 모임에 빠진 사람들은 시큰둥하며 소극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가급적 모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은 하나의 습관이기도 하다(히 10:25).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하나의 습관의 문제이다. 습관이란 연속적 행동에서 나온다. 조금 피곤하고 가기 싫더라도 한 번 가고, 또 한 번 가고, 지속적으로 모임에 참석할 때에 그것이 습관이 되는 것이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주님은 일주일 뒤 다시 한 번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도마를 돌보셨다. 주님은 도마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그에게 손을 내보이셨다. 도마는 마침내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위대한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주님은 도마의 이런 고백을 만류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 수가 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고넬료가 발 앞에 엎드려서 절하려고 할 때 거절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말리지 않으셨고 그가 믿는 것을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거나 덜한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그분은 사람이시지만 또한 그분은 분명히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도마가 의심하다가 일주일 정도 늦게 믿었지만, 그의 고백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훌륭한 것이었다. 우리 역시 조금 뒤처졌더라도 만일 주님의 긍휼로 회복한다면 이렇게 좋은 간증을 할 수 있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마지막에 밝혔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글을 마친 것이다. 요한의 복음서 기록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힙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 여러분은 믿었는가? 믿었다면 그 귀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